제가 쓴 세번째 책이 오늘 나왔어요.
제목은 [내 인생이다] 입니다.
제 블로그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예전에 제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시리즈 연재했던 것 기억하실 겁니다. 인생 중반에 삶의 방향을 튼 분들을 잇달아 만났던 그 인터뷰에 살을 붙여 만들어진 책입니다. 
블로그에는 쓰지 않은 분들도 포함됐고, 반대로 블로그에 썼지만 책에 등장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구요.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 두 번씩 만나서 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그 분들 덕분에 이 책이 나오게 되었어요. 늘 이렇게 사람들 빚을 지고 삽니다...^^;
내용이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출판사가 만든 보도자료를 아래 붙였습니다. 이 책의 운명이 어찌 될지 저도 궁금하고 맘이 설레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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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하나의 주제로 잡지 한 권을 꾸미는 독특한 계간지 [1/n]의 여름호 주제는 '환승'입니다.

비행기나 버스를 갈아타듯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을 주제로 한 권을 꾸몄는데요. 전체 책의 구성과 디자인이 재미있네요. 각 꼭지 글들도 좋습니다. 방금 전에 손에 든 잡지를 밑줄 그어가며 읽었어요. (위 그림을 클릭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목차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버스 터미널에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답니다.

       *        *        *        *        *

버스 터미널에서

얼마 전 나는 17년 넘게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렸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불안했다. 이 장거리 여행길에, 갈아 탈 버스가 있기나 할까……. 하지만 이대로 더는 가고 싶지 않아서 큰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탈 버스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 내리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 하고 어디로 갈지 궁리하며 터미널 근처를 서성이던 내가 한 일은 다른 환승객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18명의 환승객들을 만났다. 회계사가 요가학원 원장이 되고 광고회사 임원이 요리사가 됐으며 간호사가 소설가가 되고 음반가게 사장이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성공적인 환승의 결과보다 나는 이들 안에서 꿈틀대며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 마음의 씨앗이 궁금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전복하고 싶은 열망? 혹은 오래 묵은 꿈을 더 늦기 전에 실현하겠다는 의지? 


이전의 삶이 좋기만 하다면 누가 환승을 꿈꾸랴. 한 분야에서 오래 길을 닦아 어른이 되고 나면 젊은 날의 혼란 따위 말끔히 해결하고, 살아가는 일, 아니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만큼은 도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기대는 번번이 배신당하며 성인이 되어도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개 나이 마흔쯤 되면 발달심리학자 프레데릭 허드슨의 말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갖지 못했고, 현재 가진 것은 바라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각은 여러 계기로 찾아온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선 자각이 위기의식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았다. 일 중독자였던 회계사는 어느 날 아침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일시적 마비 증세를 겪은 뒤 “일과 돈 말고 내 인생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승진을 거듭했으나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이 궁했던 외국계 회사 사장에겐 “삶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는 자각이 깃들었고, 생계 때문에 음반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 어떤 이는 IMF 외환위기 때 한 팀이 몽땅 해고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단단해보였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겪었고, 10년 위 회사 선배들을 지켜보며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구석에 밀쳐두었던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올렸다. 위기가 자기 삶에서 비롯되었건 외부에서 왔건 이들의 마음속에 터 잡기 시작한 질문은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내 속도감으로 살아가고 있나” 하는 거였다.


그런 질문을 품는다고 누구나 ‘환승’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환승을 선택하는 이들이 상세한 지도와 시간표를 갖고 있을 거라 여기며 부러워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환승객들 중 정밀하게 짜인 계획표대로 움직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NGO 활동가가 된 전직 광고회사 임원은 “회복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었는데, ‘그 때가 그만둘 때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내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고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다. 반면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이건, 뭔가를 꿈꾸는 열망 때문이건, 언젠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지향이 ‘일시적 충동’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지속적으로 나를 부르면, 더 이상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때를 만나게 된다. 그 때에 내린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미친 짓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만난 삶은 그 후회까지 포함해 한 번은 살아야만 하는 삶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이들은 ‘내가 어느 때 가장 행복했던지’를 오래 생각했고, 자신의 강점과 연결되지 않는 판타지를 꿈으로 착각하지 않으려 주변의 도움을 청했으며, 온전히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하프타임을 갖고 미래의 꿈을 기록했다. 어디로 가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일단 이만큼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큰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러다보면 별개인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어 뒤돌아보면 어느새 하나의 길이 만들어져 있곤 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농부가 된 이는 내게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으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누군가 뭔가를 이루었다면 행동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단 뛰어들어 경험하고 성찰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내가 환승객들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어쩌면 환승을 선택할 때 필요한 필수품은 상세한 노선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서로 이어지고 통합되어 결국은 ‘내 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믿음뿐일지도 몰랐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나는 곧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힘』에서 들려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가자는 대로 그 부름을 따라 살면,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눈빛을 달라지게 하는 조그만 직관을 따라 가다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말.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부러 좇은 게 아닌데도 마치 계획이나 한 듯 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지거나 도움을 받는 경험을 겪었다.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보트 제작을 배우고 돌아오니 보트 쇼가 열리고 요트계류장이 속속 들어서는 식이다. 물론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반대로 악운이 겹치고 학비 대줄 돈이 없어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라던 캠벨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궤도였다.


손에 지도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환승을 선택하면서 남들 따라 ‘되는 쪽’에 걸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성배를 찾아서』의 오래된 프랑스판 문헌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신화에서 남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곧잘 길을 잃는다. 공연장 대표가 된 전직 변호사의 말마따나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대신 나만의 길을 고르고, 자신의 괴물과 싸우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환승객들에게 인생 전환은 지금의 자기로부터 멀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난 18명 중 이전보다 수입이 확실히 늘어난 사람은 4명뿐이다. 세속적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순 없겠지만 삶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들로부터 나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기쁨에 대해 들었고 먼 길을 돌아 미리 계획된 듯한 소명을 만났다는 충만함도 엿보았다. 반면 또 다시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자기반성, 가끔 환승을 후회한다는 고백도 들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가 어떻든 단 한 번의 전환으로 삶이 완성되리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승객들은 미래의 불투명함을 불안하게 여기는 대신 우연에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환승하는 우리들은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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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7> 심바루 씨-외국계 회사 사장에서 종합예술인으로

Before: 사이베이스365 동북아시아 사장
After: 종합예술인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심준보 또는 에릭심 또는 심바루 씨(48). 그를 만났을 땐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삶 자체가 무대”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쏟아놓은 말들이 너무 솔직한데다 그가 설명해준 자신의 행보도 희한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그가 속내를 기록해둔 싸이 홈피를 보고서야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하겠다. (심바루씨, 죄송.....^^;)


AT&T, 워너 브러더스, 노텔, 노키아 등 외국계 회사에서 줄곧 일해 온 그는 2007년 사이베이스365 동북아시아 사장을 마지막으로 20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한 뒤 자칭 ‘종합예술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11월 배우 출신 미술작가인 강리나 씨(45)와 함께 ‘외계인 출입금지’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가졌고, ‘봉춘홍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다니고 있으며, 강리나, 뮤지컬배우 김선경 씨와 함께 ‘지구방위대’를 만들어 환경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기획 중이다.


외국계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누릴 만큼 누려봤다”는 그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성공’과 ‘풍요’는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재미있고, 특이하고, 용감하게” 사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는 ‘재미’있고 ‘특이’하고 ‘용기’있는 심바루 씨였다.


● ‘가짜인 삶’에서 벗어나기


자신의 과거를 그는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오죽하면 인터뷰 도중에 ‘아, 왜 그러세요’하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설명해준 이력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부유한 집 아들로 10대 때부터 ‘날라리’였고, 1981년 미달된 외국어대 영어과에 운 좋게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문무대 입소 훈련 도중 “문제의식도 없는데 그냥 친구들이 맞는 게 화가 나서” 인권 유린성 훈련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두 달 뒤 징계퇴학을 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TV오락프로그램인 ‘영11’에 개그맨으로 출연하고 장발에 흰색 디스코 바지를 입고 싸돌아다니던 그를 보고, 어느 날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고 한다.

“넌 나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미국 뉴저지 주립대에 유학을 가게 됐다. ‘에릭심’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돌아온 뒤 AT&T 한국지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외국계 회사에 다니며 ‘수직상승인생’을 살았다.

“조직생활도 싫고 적성에 맞질 않았지만 돈이 좋아서 참고”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늘 “내 삶은 가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고급 차에 고급 양복을 입고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렇게 살던 스스로를 어찌나 경멸했던지 그는 “난 상류인 척 위장하고 쾌락을 좇던 쓰레기였다”고까지 말했다.


왜 진작 방향을 바꾸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조적으로 "돈이 좋아서"라고 말했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큰아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큰아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안심할 수준이 될 때까지"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자폐아에겐 한국이 힘든 사회”여서 2005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그는 2년간 매일 전화로 아내를 설득한 끝에 2007년 11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겠다고 노래를 불렀건만 정작 46살의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떠나는 건 그에게도 겁나는 일이었다.

“그만두기 직전, 원형탈모가 5군데나 생겼어요. 머리에 주사를 맞는 치료를 받는데 처음엔 너무 아파도 맞고 나니 견딜만하더라고요. 그만두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했죠. 지금은 두렵지만 저지르고 나면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결심할 수 있었지요.”


● “세상에 장난을 거는 게 재미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두 달간은 후회막심이었다고 한다.

“비서도 없고, 기사도 없고, 그야말로 ‘노바디’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늘 대접받고 살아서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친절한 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세상 참 터프하더군요.”


요리사가 되려고 캐나다에서 요리를 배우면서도 내면에서 들끓던 표현의 욕구가 가라앉지 않았다.

노키아에 다닐 때도 그는 3년간 주말마다 이태원 게이클럽에서 DJ로 일했고 틈틈이 영화 단역으로도 출연했다. ‘스캔들-남녀상열지사’에선 중국인 신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선 게이 구둣방 주인 역을 맡았다. ‘다세포소녀’에서 맡은 변태 역할은 “최고의 연기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잘려버렸다”고 한다.

2005년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간 뒤에는 분당에 프렌치 레스토랑인 ‘살롱 드 춘자’를 열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겼지만 ‘게이 필’이 나는 인테리어를 직접 하면서 너무 즐거웠다”고 한다.

‘요리사’로만 살기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아내에게 재산을 다 넘기고 “3년만 군대에 다녀올게”하고 약속한 뒤 2008년 9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지금은 아버지와 둘이서 지내며 아내가 한달에 30만원씩 보내주는 용돈으로 산다. 고급 양복 대신 헌옷 수거함에서 주운 예비군복을 입고, 한때 푹 빠졌던 BMW 오토바이 대신 스쿠터를 탄다.

“주말엔 가끔 바지 위에 치마를 입는다”고 해서 내가 폭소를 터뜨리자 그는 한술 더 떠 “성남 모란시장에서 산 털신이 치마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줄 아느냐”고 자랑했다. 내가 황당해하는 것처럼 보였던지 그가 혼잣말처럼 “남들은 다 꿀꿀하다고 하는데 난 왜 행복하지”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는 피곤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더 피곤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서 얼마나 좋은데요. 난 웃기는 게 좋아요. 큰아들의 장애 때문에 집안이 어두워지지 않게 하려고 집에서도 늘 웃고 까부는 게 버릇이 됐어요. 이 세상에 장난을 걸면서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 공식 대신 ‘아트’로 살리라


그가 강리나, 김선경과 함께 만든 ‘지구방위대’는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사용, 많이 걷기 등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환경보호를 주제로 전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는 공연에 쓸 돈을 벌기 위해 한 통신회사에 투자했고 캐나다에서 생수를 수입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소득의 10%를 공연에 쓸 계획이며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환경보호를 위한 비영리 활동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삶의 목적이 ‘재미’라고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사소한 일 하나도 그는 남들과 똑같은 걸 못 견딘다. ‘심바루’라는 예명은 ‘똑바루 살자’에서 따왔고, 명함이라면서 ‘심바루, 배우, 종합예술인’이라고 판 도장을 꾹 찍은 재생용지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다. 밴드의 이름을 지을 때도 가장 촌스러운 세 글자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 ‘봉’ ‘춘’ ‘홍’이 각각 떠올라 그걸로 작명했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난 아티스트예요. 환경을 주제로, 요리와 공연, 미술을 키워드로 삼아 작업할 겁니다. 지금까진 공식에 맞춰 살아왔어요. 능력 있는 남자, 예쁜 여자를 선호하는 것도 번식의 본능 때문이라고들 하잖아요? 생존과 번식, 그 공식은 이제 나한테서는 끝났어요. 그 숙제는 다 했으니 이제 뭐든 마음 가는 대로, ‘아트’로 살래요!”

"근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하면서 묻지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던 끝에 그가 선언하듯 '공식 대신 아트'를 강조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자유롭지 않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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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김호 씨는 제 블로그 이웃입니다. (아래 김호 씨 이름에 블로그 링크 걸어두었습니다) 블로그를 관심갖고 보다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사실은 인터뷰 대상자 중 맨 처음에 만난 사람입니다. 일요일에 귀한 시간을 할애해 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대로 잘 정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김호 씨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연설 때 말한 'connecting the dots'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김호 씨만큼 삶에 산재한 경험들을 잘 잇고 통합해낸 사람도 참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와 기업의 위기관리에 대한 김호 씨의 강의를 들어볼 기회도 있었는데요. 강의 참 부러울 정도로 잘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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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6> 김호 씨- 에델만 코리아 사장에서 1인 기업으로

Before: PR컨설팅사 에델만 코리아 사장
After: 위기관리 전문가. '더 랩 에이치' 운영.
Age at the turning point: 39


‘박수칠 때 떠나라’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김호 씨(41)는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났다. 대형 PR컨설팅사인 에델만 코리아에서 서른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서른여섯에 사장이 되었다. 그가 사장으로 일하는 동안 회사는 매년 최고 매출기록을 갱신했다. 커리어가 절정에 올랐던 2007년, 그는 자진해서 사장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위기관리전문가로 1인 기업인 ‘더 랩 에이치’를 운영하고 있으며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그가 잃은 것은 타이틀과 고액 연봉. 얻은 것은 삶의 균형과 장기적인 자신 만의 일, 그리고 행복감이다. 그는 “인생 전환으로 인한 변화는 과거의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일에 대해서도 “타이틀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업(業)을 추구하면 직(職)은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동시에 찾아온 성공과 위기


2004년은 그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성공과 위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고속승진으로 사장이 되었지만 같은 해, 이혼의 고통을 겪었다. 성공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30대 때, 그에게 가장 두려운 질문은 “취미가 뭐냐?”는 것이었다. 늘 할 말이 없었다.


전환의 계기는 2006년에 찾아왔다. 코엑스 리빙 디자인 페어에서 본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 디자인은 그에게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고, 그는 바로 다음날 사표를 썼다.

“그만둔다는 생각이야 그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사표를 쓰게 된 데에는 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마 10%는 작용했을 거예요. 세상에 PR 말고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의 전문 분야에서 원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장을 하면서도 연 100시간 이상 기업체 임원들을 대상으로 위기관리 코칭을 해왔는데 회사 경영 때문에 이 일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게 늘 안타까웠어요. 사장을 나보다 잘 할 사람은 많겠지만 위기관리 코칭 분야에선 내가 제일 잘 하고 싶다는 욕구도 컸구요.”


또 블로그로 대변되는 개인 미디어의 발전 양상과 그로 인해 달라진 여론 형성 과정을 지켜보면서 위기관리의 패러다임을 바꿀 미디어의 변화에 대한 연구도 하고 싶었다.


사장을 그만둔 뒤 그가 이뤄낸 결과를 보면, 그는 이 세 가지 요구를 정확하게 해결했다. 목공예를 배워 가구 9개를 만들었으며 일과 놀이 문화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회복했다. 1인 기업을 만들어 위기관리 코칭에 전념하고 있으며 연구를 위해 KAIST 대학원에 다닌다. 이 깔끔한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세상의 지혜를 끌어 모으기


그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는 데에 적극적이다. 에델만 코리아의 사장이 될 때부터 사비를 들여 호주의 리더십 코치와 계약을 맺고 3년간 코칭을 받았다. 젊은 나이의 경륜 부족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리더십 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코칭을 받았어요. 그가 강조한 핵심은 ‘균형’이었어요. 일과 가족, 문화, 놀이가 삶에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나는 일에 80%가 몰려 있어서 문제라고 늘 지적했지요.”

리빙 디자인 페어를 가게 된 것도 이 같은 코치의 조언 덕분이었다.


또 사장을 그만두기 전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가 운영하는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참여해 2박3일간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면서 공부와 1인 기업을 하자는 꿈을 구체화했다.

박사과정 진학도 사장 시절 프로젝트 때문에 알게 된 KAIST 정재승 교수와 의논하면서 구체화됐고, 회사를 그만둔 뒤 7개월간 하프타임을 갖게 된 것도 1년에 한두 차례 만나는 한 신문사 논설위원으로부터 ‘삶의 하프타임’을 가질 필요성에 대해 듣고 나서였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돼요. 사람들의 좋은 영향으로 길이 열리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멘토가 정말 중요해요.”


● 좋은 뒷마무리 그리고 하프 타임

그는 실제로 그만두기 7개월 전 사표를 냈다. 회사가 후임자를 새로 구할 시간을 주고 일을 제대로 승계하기 위해서였다. 후임자를 함께 물색했고 새 사장이 정해진 뒤에는 한 달간 함께 일하며 돕고 회사를 떠났다. 그의 이런 성실한 뒷마무리는 나중에 그가 홀로 서기를 할 때에도 평판에 도움이 되었다.


사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시간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할애하는 ‘하프 타임’을 7개월간 가졌다. 호주 코치의 권유로 경영과 참선을 접목한 캐나다의 캠프에도 다녀왔고 더블린에서 열린 창조성 워크샵도 다녀왔다. 오래 혼자 지내고, 여행하고 책을 읽었다.


“하프타임은 내 꿈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익숙한 환경으로부터는 배울 게 별로 없어요. 혼자 낯선 곳으로 떠나야 아이디어도 생성되지요.”


조직의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하프 타임을 시작하며 그는 처음엔 자격지심이 생기더라고 했다. 자주 가는 식당에서도 대접이 달라진 것만 같았고, 평일 낮에 아파트를 오가다 경비 아저씨를 마주치면 괜스레 민망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평일 오전 10시에 이마트를 가는 데 아무렇지도 않았을 때 “아, 자유다”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고 한다.


● ‘A4 멘탈리티’ 벗어나기와 자기 암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생각이 처음부터 뚜렷한 사람 같았는데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20대 때도 PR이 제 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하프타임 때 생각을 구체화했어요. ‘From what’이 아니라 ‘For what’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애를 썼어요.”


원하는 것을 찾는 작업을 할 때 중요한 것은 기록이었다.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면 기분에 따라 선택하게 되니까 기록해놓고 계속 들여다보면 균형 잡힌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기록을 할 때에도 ‘A4’ 멘탈리티(mentality)를 벗어나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컴퓨터의 A4 화면에 갇혀 있으면 생각도 제한되는 면이 있어요. 낯설게 하기를 자꾸 시도해봐야 막힌 생각도 뚫리지요. 저는 줄 없는 노트를 활용했어요. 스케치북에 여러 색 사인펜으로 꿈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고, 하프 타임을 갖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기록한 뒤 남은 일은?

바다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일단 바다에 뛰어들어야 수영을 하는 거잖아요. 너무 꼼꼼하게 계획하면 모험을 하기 어렵습니다.”


뛰어들 때 중요한 건 자기암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경험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입 안이 어떤가요? 침이 고이지 않나요? 두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요. 상상하면 현실이 됩니다. 뇌가 뭔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 몸의 세포가 그리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봐요. 무작정 ‘하면 된다’가 아니라 꿈꾸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겁니다. 꿈이 있으면 스쳐 지나가는 일에서도 관심사가 눈에 걸리고 자꾸 돌아보게 되고, 그런 것들을 통해 길이 열리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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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5] 정한진 씨 - 미학도에서 요리사로


Before: 프랑스 파리8대학 미학 전공 박사과정

After: 요리사

Age at the Turning Point: 40


정한진 교수(47‧ 창원전문대 식품조리과)는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내 인생전환은 극적이지 않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도 했다. 한번 만나만 달라고 졸라 겨우 만난 뒤에도 계속 그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을 탓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미학 전공 박사과정을 밟던 2002년 진로를 바꿔 요리사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르 코르동 블뢰’ 요리 과정을 수석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 요리사로 일했고 지금은 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친다.


그는 “인생전환은 결코 멋지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엄혹한 결단”이라면서 “모든 현실적 문제를 다 따져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 선택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일을 향해 떠나는 행위를 낭만적으로 상상했다면,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그의 말을 기억해둘만 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단, 그 때부터가 더 어렵다.” 


● 몸을 쓰는 세계에 매혹되다


1996년 파리 유학길에 오를 때 그는 부부유학생이었고 딸아이는 만 두 살이었다. 그간 저축한 돈으로 5년쯤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환위기가 터졌다. 1프랑에 150원이던 환율이 340원까지 올랐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돈이 축나는 상황에서 그는 “내가 정말 공부 체질인가” 회의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미학에 매료됐고 대학에 갈 때에도 부모와 싸워가며 미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랬는데 한국과 달리 어느 누구도 밀어붙이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환경에 처하면서, 내게 과연 학문적 자질이 있는지 심각한 회의가 들었어요.”


“계속 책상물림으로 사는 게 즐거울까” 자문하던 그의 눈에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유학생들이 모일 때마다 그가 족발, 잡채, 양장피 같은 요리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선후배들이 ‘박사 말고 요리사를 해보라’고들 농담하던 터였다.


“요리를 배운 적은 없는데 어디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면 집에 돌아와 그대로 만드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해서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도 메주 찧고 손질하고 엿기름 곱는 일을 같이 했거든요. 오죽하면 고3때 시험이 내일모레인데 김장을 같이 담갔겠어요. 그게 제겐 자연스러웠어요. 결혼 이후에도 김치는 계속 제가 담갔으니까요.”


요리를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르 코르동 블뢰’의 제과제빵, 요리, 와인 3가지 과정을 동시에 등록해 다니면서 “몸을 쓰는 다른 세계”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길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돌아와 한 달 간 설득 끝에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요리사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나이 마흔에 무슨 환상이 있겠어요. 저는 가장이고 잘못하면 가족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불안하지요. 게다가 어떤 일이든 늦게 시작하는 건 절대로 유리한 고지가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면 정말로 죽자 사자 매달려야 해요.”


● 항로를 바꿔도 갈등의 본질은 여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요리를 배우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일이 내 본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한다. 몸을 쓰는 구체성의 세계로 옮겨오니 자신이 오래 속해있던 추상성의 세계에서 해방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는 9개월 만에 요리 과정을 1등으로 졸업한 뒤 곧바로 파리 레스토랑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며 도제식으로 요리를 배웠다. 아침마다 도마 수십 개와 요리 도구를 제 자리에 배치하고 수십 마리의 닭 뼈를 씻어 기름 떼고 피 빼고 목욕탕 욕조 크기만 한 냄비에 넣어 육수를 끓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에 10여시간 서 있느라 자다가도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고 욕설이 끊이지 않는 거친 주방에서 자식뻘 되는 요리사들에게 욕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배수진을 친 그에겐 물러설 곳도 없었다.


6개월 실습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는 강남의 부티크 레스토랑인 ‘라미띠에’와 ‘일 마레’ 등을 거쳐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해보고 싶은 내 요리가 있는데 자본도 없고 독립의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했다”면서 “나는 모험을 피한 셈”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전환을 결심할 때의 갈등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자신만의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과 생계를 위해 마뜩치 않은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은 이전에 공부할 때 느꼈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인생의 항로를 바꿔도 여전히 맞서야 하는 과제였다.


● 삶 속에서 맛과 멋을 통합


인생전환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 오기가 생겼고, 자기 기술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일하는 사람,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요리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토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문학 전공자의 해석, 그럴만한 여유는 잃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생애의 경험들이 결국은 통합되어 간다고 느껴지진 않을까. 그는 요리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 ‘향신료 이야기’등의 책을 썼다. 미학 공부를 할 때에도 예술품을 미적 대상이라기보다 사회적 산물로 다뤘듯, 그는 음식 역시 문화적 산물이라고 믿는다.


“별 볼 일 없는 음식에도 생애의 추억, 개인의 정서가 담겨 있고 시대, 문화를 볼 수 있잖아요. 음식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작업이 내 삶에서 경험의 통합이라면 통합이겠지요.”


그는 ‘맛있다’는 개념을 시골에서 뜬 된장 같은 맛으로 정의했다. 발효식품처럼 기다리는 음식, 느린 삶이 후퇴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맞물려가는 삶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음식문화 개선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슬로 푸드와 연관된 삶을 사는 방식을 현실화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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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 4] 엄홍길 - 고산에서 내려와 사람 속으로


Before: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세계 최초 완등
After: 비영리단체  설립, 사회 공헌 활동
Age at the Turning Point:  48

“시간이 남고 돈이 남아 유유자적하게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산에서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을 지키려는 거예요.”

인터뷰를 하던 날 오전 삼각산에 입춘 산행을 다녀왔다는 산악인 엄홍길 씨(49)의 얼굴엔 봄의 생기가 넘쳐났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완등한 그에게 540m 높이의 삼각산도 산일까 싶은데, 그는 “사무실 벗어나 산에 오르면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5월 비영리단체인 엄홍길 휴먼재단 을 설립해 사회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이기도 하다. 호칭이 약간 난감해 “어떻게 불리는 게 좋으세요?” 물었더니 옆에서 커피를 타 주던 재단 직원이 “그야 당연히 대장님이죠” 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대장이다.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에 오르는 대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루트만 달라졌을 뿐이다. 한 편으론 인생 전환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평생 해온 방식 그대로 자신의 길을 내고 있었다.


● ‘제2의 인생’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


지난해 5월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산에 도전하겠다”면서 재단을 설립한 그는 지금까지 장애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산행 체험교실, 네팔 의료 봉사 등을 이끌어 왔다.

이제 본격적인 첫 사업으로 해발 3930m에 있는 고산 마을인 네팔 쿰부히말라야의 팡보체에 초등학교를 짓는다. 사무실 한쪽 벽면엔 초등학교 설계도가 쫙 붙어 있었다. 4월30일 출국해 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착공할 예정이다.

팡보체 마을은 1986년 그가 두 번째 히말라야 등반 도전에 나섰을 때 목숨을 잃은 현지 세르파 술딤 도루지가 살던 곳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유가족을 보살펴온 그는 오지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짓기로 했다.


초등학교를 짓는 일은 그가 말한 “목숨을 걸고 한 약속” 중 하나다. 그가 ‘제2의 인생’에서 재단 설립을 통해 히말라야 산간 오지의 교육․ 의료 환경 개선, 청소년 교육, 기후환경변화 대책에 나서기로 한 것은 “산에서 얻은 것을 산에 돌려주고 산에서 진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2000년 8000m 14좌 완등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도전과 실패 죽음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산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도 커졌지요. 인간의 능력에는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하고 기술이 좋아도 마지막엔 산이 우릴 받아줘야 성공할 수 있어요.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욕심을 내지 않고 순리를 따라야 산은 비로소 정상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산이 받아주기 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뒤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14좌를 향해 치달을 때 동료도 잃었고…. 살아서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 당신(산)에게 받은 보답을 반드시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시 16좌를 향해 가면서도 숱하게 기도했어요. 나는 이런 일을 해야 하므로 꼭 살아서 내려가야 합니다, 하고…. 목표 지점에 다가갈수록 그 다짐이 더 간절해졌지요.”


그는 “내가 지금 16좌를 다 오르고도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면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이니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

엄 대장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에 더 귀가 쏠린다. 1985년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하기 시작해 2007년까지 22년간 세계 최고봉 16개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 17번의 실패를 겪었다. 성공한 것 이상으로 실패해온 셈이다. 게다가 함께 산에 오른 동료 10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3번의 도전 끝에 첫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988년 에베레스트 첫 등정에 성공한 뒤 그는 의기충천했지만 1993년까지 5년간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등을 대상으로 시도한 6번의 등반이 모두 실패했다. 절망 속의 그를 붙들어준 말은 불가의 가르침인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였다. 다시 일어서서 1993년 7번째 도전한 초오유 등정에 마침내 성공했을 때 그는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드디어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다”고 느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같은 해 시샤팡라에서 그는 동료 박병태 대원을 잃었다. 1998년 네 번째 시도한 안나푸르나 등정에선 미끄러진 셰르파를 구하려다 같이 추락해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고 ‘산행 불가’ 선고를 받기도 했다.


“제가 경험하기론 성공과 실패엔 큰 차이가 없어요. 중요한 건 실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실패와 현실의 불행을 끌어안고 거기에 고착되면 영영 벗어나질 못해요.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불가항력이었다면 ‘이럴 수도 있겠지, 더 나빴을 수도 있는데’하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했다면 겉으로 드러난 실패는 진짜 실패가 아니에요.”


숱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99%가 불가능해 보여도 1%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면 시도하는 결단력 덕분이었다. 그의 별명은 ‘탱크’다.

“산에서 갈등의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아요. 지금 출발할까 말까, 더 올라갈까 말까, 이 길이 나은가 아닌가, 계속 결정해야 해요. 게다가 눈사태 같은 위험이 예고하고 일어나는 일도 아니잖아요. 결단력과 팀워크를 통해 최선을 다 하되 순리에 따르는 겸허함이 결합되어야지요.”


하나의 일에 정통하고 실패와 성공을 오래 겪으면 나중엔 ‘육감’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는 “어느 산은 처음부터 가긴 가야 되는데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고 험한데 끌리는 산이 있다. 그런 육감이 대체로 적중했던 편”이라고 들려주었다.



● 8000m도 한 걸음에서 시작됐다


고산 정복에 비한다면 사회공헌사업을 하는 ‘두 번째 도전’은 쉽지 않느냐고 묻자 엄 대장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고,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산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의기투합하니까 오히려 더 명료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해도 여러 사람들을 접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천천히 가야지요. 8000m도 한 걸음에서 시작됐어요. 조급한 마음으로 자꾸 보폭을 넓히다 보면 주저앉게 됩니다”하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오지 지원, 기후변화 대책 마련 등과 함께 그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청소년들의 정신력을 키우는 일이다.


“산행 체험학교를 해보면 청소년들이 신체적으로는 크지만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는 걸 절감합니다. 뭐든 쉽게 이루려 하고 쉽게 좌절해요. 전 그게 자연과 동떨어진 생활 때문이라고 봅니다. 요즘 학교에선 체육시간도 점점 없앤다는데 등수로만 따지면서 허약한 성인으로 자라면 뭐하나요. 배려나 이해심은 말로는 못 가르쳐요. 자연 속에서 행위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덕목이죠.”


성인에게도 그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중년에 인생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을 위한 조언을 청하자 “인생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므로 변화를 두려워 말라”고 들려주다가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말을 맺었다.


“운동을 하세요, 운동을! 뭘 하든 자신감과 긍정적 사고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자기 몸이 피곤하면 도전이고 자시고 무슨 의욕이 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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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 3] 차백성 씨- 대기업 상무에서 자전거 여행가로
Before:
대우건설 상무
After: 자전거 여행가
Age at the turning point: 49


‘춤추는 사람은 바보/ 구경하는 사람은 더 바보/ 어차피 바보 될 바에/ 춤이나 추세.’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 씨(58)는 갑자기 일본 민속춤의 가사를 읊어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 때려치우고 자전거 여행이나 하겠다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말립니다. 도피, 낭만이 동기라면 안 하는 게 나아요. 사람은 누구나 치열한 전장(戰場)에서 싸워보는 경험을 한번은 해야 해요. 나는 전장에서 물러난 게 아니고 내가 만든 새로운 전장에 뛰어든 겁니다. 구경하는 대신 춤추기로 결정한 거죠.”


겨울 끄트머리에 만난 그는 또래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자전거 여행가는 자전거를 타는 모습으로만 비쳐지고 싶다면서 사진 촬영을 한사코 거부했다.


대우건설 상무였던 그는 50을 앞둔 해인 2000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자전거 여행가로 나섰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만 얼추 3만km. 이른 은퇴 이후 유유자적하는 복 많은 사람이겠거니 했던 생각은 그와 이야기하던 동안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전사(戰士)였다. 필생의 꿈에 몰두하는 은륜(銀輪)의 전사.


● 30여년 준비한 자전거 여행


9년 전 그가 자전거 여행을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둘 때 사람들은 그를 “또라이”라고 했다. 아이들 둘에 아내는 전업주부였다.


“내겐 돈보다 시간이 더 급했어요. 늙어서 다리에 힘이 빠지면 자전거를 못 탈 테니까. 불안할 텐데도 ‘대기업 상무보다 자전거 여행가가 더 멋지다’면서 전폭 지원해준 가족에게 고마울 따름이죠.”


가족이 씀씀이를 줄이고 10년 이상 해외 근무를 통해 모은 저축으로 몇 년은 버틸 거라 계산했다. 토목기술자인 덕분에 틈틈이 돈을 벌 수단도 있었다. 아이들이 자립하면 집을 처분해 생활비를 충당할 생각이었다. 죽을 때까지 집을 갖고 있을 생각도, 아이들에게 자산을 물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자전거 여행이 중요한가?


그는 “자전거 여행은 내 필생의 꿈”이라고 단언했다. 자전거를 처음 갖게 된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혼자 서울에서 대구까지 3박4일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무모한 ‘생애 첫 여행’이후 그는 “자전거로 낯선 세상에 길을 내리라”하는 소망을 잊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도 죽겠구나’하는 생각을 일찍 한 편이예요. 어떻게 살아야 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람에게 주어진 시‧공간 중 시간은 어쩔 수 없지만 공간은 여행을 통해 확장할 수 있잖아요. 그런 공간의 확장을 통한 ‘삶의 풍성함’이 어릴 때부터 제 목표였어요.”


자전거 여행을 통해 그가 이룬 또 하나의 꿈은 책을 쓴 것.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책을 쓰는 게 꿈이었다던 그는 세 번에 걸친 미국 자전거 여행을 ‘아메리카 로드’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출간 석 달 만에 5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은 편이다. 일본 유럽 대양주 아프리카까지 모두 5권의 자전거 여행 시리즈 책을 쓰는 것이 그의 계획. 지금은 일본 시고쿠 섬과 오키나와 자전거 여행을 준비 중이다.



● 실패보다 무서운 건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인생 아닌가? 


그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를 향해 매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인생을 사는 동안 두 번째 인생 때 할 일을 생각해두고 미리 준비해야 해요. 그게 자전거든 그림이든 뭐든 몰두할 수 있는 일을요. 나는 자전거 여행만 30년 준비했어요.”


‘몇 살엔 뭘 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되어야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고’ 같은 남의 기준 말고 자신의 기준을 세우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출생신고를 5년 늦게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실제 나이보다 5년 젊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 아니겠어요? 정말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풀빵 장사를 해도 대한민국 최고면 된다는 생각으로 몰두하다보면 거기서 돈을 벌 가능성도 열리고 새로운 관계도 따라와요.”


불안정한 미래가 겁나고 낯선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 그러나 몰두할 일이 있으면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에서 내려올 때 말이죠. 앞에 돌멩이나 나무뿌리 등 장애물을 보고 덜컥 겁이 나면 반드시 넘어져요. 그럴 땐 과감하게 확 지나가버려야 되레 안전합니다. 뭘 해보질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겁이 많아요. 그런데 사실은 뭘 하다 실패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 조차 없는 인생이 더 무서운 것 아닌가요?”


그는 자신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마음껏 여행하고 책도 썼고 건강도 좋아졌다.
  완치가 어렵다고 했던 간염을 극복한 것도 여행의 부수적 소득으로 꼽았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비활성 B형 간염에 걸렸는데 놔두면 간경화,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인 2007년에 저절로 항체가 생겼어요. 지난해 10월 20일 ‘간의 날’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자전거 여행으로 간염을 완치했다는 사례 발표를 했을 정도라니까요.”


그간 여행한 곳 가운데 경치가 너무 좋아 자전거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던 지역을 한 군데만 꼽자면 뉴질랜드 남 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진하게 남는다고 했다. 일본을 여행할 때도 도예가 심수관 씨 집에 찾아갔는데 “숱한 손님 중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환대를 받았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의미 있는 체험을 만들지 않겠어요? 전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자입니다. 인생이 뭘 남기고 이루고, 그러라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전반전 인생에서도 성취나 업적 같은 데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후반전 인생에서도 한번 태어난 인생,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고민할 뿐입니다.”


스스로 즐거운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자전거 순찰대 자문도 하고 자전거 문화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여도 한다. 그의 말마따나 "스스로 즐겁고 다른 사람도 돕는다면, 그 이상 뭘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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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2] 최혜정- 광고인에서 국제NGO 실무자로


Before: 레오버넷코리아 제작이사,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

After: 국제NGO ‘세이브 더 칠드런’ 자원개발부장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평화’가 떠올라요. 6살 때 낮잠을 자다 깼는데 부엌에선 엄마가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비 온 뒤 적막하고 깨끗한 마당에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던 풍경. 그게 기억에 선명한 ‘행복’의 이미지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란 새로운 모험과의 조우를 뜻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전부 다르니까 ‘나만의 행복’이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최혜정 부장(48)의 표정은 뭘 더할 수도 없을 만큼 충만해 보였다.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을 지내는 등 22년간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그녀는 2007년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뒤인 2008년 세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고액 연봉과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박봉의 NGO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벼락같은 계시로 인생항로를 바꾼 것도 아니고 대안적 삶을 찾은 것도 아니다”면서 “원래 살고 싶었던 방향을 따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와 2002년 신문에 실린 그녀의 기사를 찾아보았다.
당시 레오버넷 코리아 제작이사였던 그녀는 맥도널드 광고 ‘목숨걸지 맙시다’로 세계 3대 광고제 중 칸 광고제 은사자상, 뉴욕 광고페스티벌 금상을 휩쓸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인터뷰에서도 광고는 “인간의 진실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NGO를 선택한 이유로 “사람과의 접점에 서 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7년 전에도 그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던 사람 같았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자기 안의 질문을 따라 가기


40대 초반부터 그녀는 “이게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하는 질문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광고업계에서도 물론 성취감을 느꼈지만 본질적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또 다른 문제 같았어요.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사는가, 내 속도감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질문을 품게 만든 충격적 사건이 2004년에 있었다. 그해 여름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 장애인 교회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인솔자인 그녀가 방문자를 맞으러 문 앞에 서 있는데 교회 담당자가 오더니 갑자기 “여기 말고 부엌에 가 있는 게 어때요?”하는 거였다.

“내 얼굴이 너무 긴장되고 어두워서 오는 사람들이 불편하겠다나요. 얼떨결에 부엌으로 쫓겨나 수십 명 분의 불고기를 볶으며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좀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명상 심리검사 코칭 등 온갖 시도를 해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 ‘링크’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같은 책을 읽으며 다른 시각과 심지를 갖추려 노력했다. “앞으로 20년 더 내 인생을 갖고 뭘 하고 싶은가”를 오래 고민하던 와중에 학창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치유를 겸한 대안학교를 해보면 좋겠다고도 막연하게 꿈꾸었다.


“회복이 아니라 해독을 위해 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2007년 5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가는대로 관심사를 따라 혼자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신문에서 희망제작소의 ‘제1회 행복설계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이 아카데미를 마친 뒤 간사의 우연한 소개로 2008년 5월 ‘세이브 더 칠드런’과 연이 닿게 됐다.

“광고회사를 그만둘 땐 NGO에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대안학교를 꿈꾸며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그녀의 꿈과 크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다른 길로 향한 문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모서리에서 열렸다.


● 전환의 때를 어떻게 알 것인가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해도 지금이 좋을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겁이 나거나 생계는 어떻게 하나 등등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떠오르고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죠. 제 경험으론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져요. ‘다음에 뭘 하지?’하는 질문에도 ‘6개월간 찾아보자’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아직 때가 아니라면 “장, 단점 파악 등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고 무보수든 주경야독을 하든 원하는 일에 발을 슬쩍 담가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하지만 그 ‘원하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뭘 하고 싶은지가 단 번에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요?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그리 많을까요?”하고 반문했다.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너듯 연결하면서 살아도 되잖아요. 두서없이 여러 생각이 든다면 조금씩 맛을 보고 아닌 걸 지워나가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뭘 하다가 그만두면 그만큼 인생과 시간의 낭비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언젠가는 경험들이 연결되어 쓰이게 되지요. 전 늘 ‘어디로 가든 크게 보면 내 길이겠지’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 길 안에서 움직일 뿐이지 내가 갑자기 영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 다른 사람, 다른 집단과 네트워킹하기


광고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그녀는 일부러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약속의 70% 정도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스님 목사 신부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포럼, 커뮤니티, 광고회사 고객으로 모셨던 어른들을 찾아갔다. 무턱대고 “제가 어떻게 보이나요?”하는 질문도 숱하게 던졌다.


“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늘 보는 직장 동료는 같은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이어서 별 도움이 안돼요. 다른 클러스터, 다른 시각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관심사를 좇다보니 말 그대로 “6개월 만에 100명을 알게 되더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그녀의 관심을 끈 분야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인터넷을 뒤지고 학회지를 구독하고 강연을 찾아가면서 점점 네트워킹을 넓혀 갔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길 위에 서게 되었지만 처음에 희망제작소에 이끌린 것도 이 관심사 때문이었다.


● 계속 성장하기


NGO에서 일하면서 수입은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고 출장지는 파리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보상을 얻는다고 했다.


“이 돈이 가면 한 아이가 웃는다는 그 연결선이 한 눈에, 명확하게 보이니까 그것만큼 큰 보상이 없지요.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한 모자 뜨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동봉해 보낸 편지를 볼 때마다 숱하게 눈물이 났는데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다고 실감했어요. 그렇게 긍정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다른 데에서 얻기 어려운 보상이죠.”


10년 쯤 뒤에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계획이나 결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미래 아닌가요? 나는 여기서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그 마음에 진정성만 있다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 에도 동시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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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인생 2모작’은 이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년퇴직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 ‘조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중년도 늘고 있습니다. 35~55세에 인생전환을 이뤄낸 평범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는 [중년의 터닝 포인트]를 주 1회 연재합니다.


 

Before: 자동차 엔지니어

After: 미국 FDA 승인 받은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주)미당 추어탕 대표

Age at the turning point: 36



11년 전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전정욱 씨가 1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추어탕 집을 차리려 준비할 때, 하필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말리던 주변 사람들은 “그것 봐라”는 듯 그를 딱하게 여겼다.

경제상황이 그 때보다 더 힘들다는 2009년. 그는 지금 48개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당 추어탕의 대표로 성장했다. 2006년엔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 중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식품안전승인을 받고 포장 추어탕을 미국에 판매하고 있다.

전 대표 (47)는 “음식 산업은 결국 신뢰의 산업이고 오너의 마인드가 모든 걸 좌우한다”면서 “정 할 것 없으니 음식점이라도…, 같은 생각으론 100% 망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전환에 성공했을까.


1. 스스로에게도 명분이 서는 일을 찾아야 한다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그는 자동차 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다 97년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추어탕 집을 차렸다.

“직장생활 10년차 쯤 되었을 때, 이 회사에서 내 미래가 어떨까 그려봤어요. 사장이 될 것도 아니고, 언젠가 홀로서기가 불가피하다면 더 나이 들기 전에 하자고 결심했지요.”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에게 명분이 서는 일을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업을 계승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전북 남원에서 3대째 추어탕 집을 해왔다. 이미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그는 명맥이 끊긴 가업을 다시 잇겠다고 결심했다. 단순한 ‘추어탕 집’이 아니라 ‘전통음식 발굴, 브랜드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하며 이게 ‘해야 할 일’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퇴직 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음식점은 손님에게 무조건 맞춰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주인이 잘 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의욕적이니까 자신을 낮추지만 떠밀려서 한 사람들은 그걸 못하더라고요. 떠밀려서 하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 태도의 차이가 모든 걸 결정해요.”


2. 좋은 조력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일류 시설에 일류 주방장을 쓰는 ‘규모의 경제’ 혹은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자본이 모자란 그는 후자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2년간 주말마다 추어탕의 본고장인 남원에 내려가 요리를 배우고 추어탕 집을 순례했다. 그의 행운은 스승을 잘 만난 것. 부모님 집 주방에서도 일했던 노인에게 ‘맛을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한식에는 고추장 된장 마늘 등 7대 재료가 있는데 탕을 먹어보고 그 안에 7대 재료 중 무엇이 들어갔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특히 탕은 이미 끓여 동화된 상태라 재료 감별이 어려워요. 스승께 집중적으로 배운 게 이 기술입니다. 간만 볼 줄 알면 요리 80%는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배합을 알고 무엇이 부족한지 맛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탕 요리의 핵심인 열처리도 노인에게 배웠다. 추어탕 집을 순례할 때 어떤 집의 된장 맛이 유난히 강해 이유를 물으면 주인도 대개는 “된장을 한 숟갈 밖에 안 넣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비밀은 열처리에 있었다.


“추어탕에서 된장 맛은 입으로 느끼게 해야지 냄새가 나면 안 되거든요. 추어탕에 된장을 넣어도 냄새가 안 나는 온도가 360도라고 치면 그걸 불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 스승께 배운 핵심 기술이죠.”


3.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할 것인가


98년 수원에 추어탕 집을 차릴 때 그의 원칙은 ‘천연재료’로 승부하겠다는 것. 멸치 표고버섯 다랭이를 우려 만든 천연양념을 썼고 젓갈도 가거도에서 소금으로만 절인 천연젓갈을 썼다. 이러다보니 원가 상승은 당연지사. 당시는 외환위기가 들이닥쳐 모든 추어탕집이 가격을 1000원씩 깎던 때였다. 그는 고민 끝에 되레 가격을 7000원으로 올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저도 깎으려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다 내리는데 혼자 올리는 결정을 하기가 쉽겠어요. 하지만 천연재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 원가는 7000원이었고, 내 방식을 버리느니 대신 1000원어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직접 빚은 약주, 추어로 만든 전을 서비스하기 시작했지요.”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처음에 하루 20만~30만원이던 매출이 1년 반 만에 하루 250만 원 선으로 늘었다. 차별화를 위해 추어 만두, 어린이 추어 돈가스 등 신규 메뉴도 계속 개발했다.


“업종 선정도 중요합니다. 저는 차별화 전략의 성공이 추어탕집이라 가능했다고 봐요. 김치찌개와 달리 추어탕은 기호식품이고 고객의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 문화이거든요. 입소문이 나면 손님들이 1천원 차이는 무시하고 결국 다시 돌아오시더라고요.”


2005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때도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가 본사 물건 공급 수준을 30% 선에서 맞추는 것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18억 원을 들여 공급시설을 짓고 본사 물건을 100% 공급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를 해줬는데 다 실패했어요. 조리법만 배우고 맛 관리가 안 되니까 경쟁에서 지는 거죠. 일괄적 품질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짓고 본사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 냉장 상태로 매일 배송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4. 끈질기면 길이 트인다


2006년에 그는 미국 진출로 눈을 돌렸다. 탕 문화가 해외에서도 먹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고 재미교포들도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포장 추어탕을 대형 콘테이너로 수출하려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대행업체에 맡겼더니 6개월간 진전이 없었다. 하도 답답해 그는 동시통역사를 구해 매일 밤 FDA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FDA의 요구는 온도별로 제품 영양소가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조사해 제출하라는 것. 식품과학 관련 연구소에 갔더니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해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석 달 동안 공장에서 실험하고 거의 매일 FDA에 전화해 설명하면서 ‘식품 가열온도에 따른 영양소 변화’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더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자료보다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공정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이래요. 추어탕을 승인 받고난 뒤 대게탕 시래기국 황태탕도 일사천리로 승인 받았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는 “물건을 콘테이너에 실어놨으니 무작정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 안 되면 말더라도…. 끈질기게 추구하다보면 일이 되는 방식이 다 있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2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다. 강진 장흥에서 사라져가는 막걸리 초장을 도입해 키조개무침으로 상품화하는 등 전통음식 발굴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제 천직을 찾은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천직? 그런 건 모르겠다. 다만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에도 동시 발행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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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