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간 번역하고 해설을 쓴 책 "푸른 눈, 갈색 눈-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표지 예쁘죠?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실시한 차별 실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꽤 유명한 실험이고 제가 예전에 칼럼에서 소개하기도 했었죠. 오래 전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 무려 30페이지가 넘는 옮긴이 후기와 해설을 썼습니다

성인들 중 특히 학교 선생님들이 이 책을 많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다문화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과정을 간단히 적은 해설의 도입 부분만 아래 붙입니다.

   *            *          *          *          *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 옮긴이 후기와 해설

 

지금 당신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게 된 사연은 열한 살 소녀가 서툰 솜씨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도화지의 위쪽 절반에는 주먹만 한 글씨로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엔 덩치 큰 아이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혼자 동떨어진 작은 아이를 향해 소리친다. “저리 가! 너는 우리랑 달라!

작은 아이는 이 세 명에게 맞서는 모양새로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야! 나는 너희와 같아.

 

작은 아이의 모델이자 그림을 그린 소녀는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가정의 아이다. 내가 이 그림을 본 것은 2010년 가을, 우연한 계기로 비영리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단체 연구진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자료 수집을 이미 마친 프로젝트에 뒤늦게 합류한 뒤 그림을 그린 아이의 동영상 인터뷰도 보게 되었는데, 또랑또랑한 눈빛의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막 얘기하고… 어렸을 때요. 제가 발음이 많이 이상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나더러) ‘너 우리랑 같은 사람 아니지? 저리 가’라고 하고, 만날 놀리고 그랬는데… (학교에서) 다문화가정인 사람 손들라고 만날 그러잖아요. 그럼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가정인가 봐’ 어쩌고저쩌고해요.

 

이 아이는 “똑같은 사람이고 말만 다를 뿐인데,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은 필요도 없고(듣기) 싫다”고 했다. 다문화가족지원법이라는 법률도 있고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기에 다문화가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으려니 했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그러고서 며칠 뒤에는 단체 활동가들에게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동아리 활동을 지원했던 경험을 듣게 되었다. 동아리 아이들이 직접 같은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평소 다문화가정의 아동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두 개만 적어보라’는 주관식 질문이 있었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이랬다. “따돌림, 더럽다, 외모, 의사소통, 아프리카, 초콜릿, 짜장면, 흑인, 불행…….

 

이 학교 학생 중엔 외모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다문화가정 아이는 없다고 했다.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를 직접 본 적이 있건 없건 간에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에 따라붙는 편견의 리스트가 놀라웠다.

 

내가 차별과 편견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두 사례를 접하고 난 뒤부터다. 말투나 피부색처럼 단순한 특징으로 ‘너는 다르다’라고 판단하고 이에 근거해 쉽게 차별하며 완강한 편견을 갖는 마음의 구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방에서 다문화 사회를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말 다양해지고 있는 걸까?

 

의문을 안고 자료를 뒤지던 중, 이 책의 주인공인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을 접하게 되었다. 엘리어트의 실험에서 핵심 주제인 ‘차별당하는 사람의 마음 공감하기’를 응용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한겨레신문"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에 그 내용을 글로 썼다. 그 뒤 초등학교에 찾아가 엘리어트의 실험을 응용한 연극 수업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할 연극 작품을 만들 무렵, 한겨레출판의 눈 밝은 편집자께서 이 책을 찾아내 번역과 해설을 제안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은 ‘다문화’라고 놀림받는 게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그림을 그리고도 모자라 도화지 오른쪽 위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놓았던 소녀가 맺어준 인연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끈을 통해 다가온 당신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이 21세기 한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차별은 오로지 나쁜 환경의 영향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마음일 뿐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왜 차별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만 게재할게요. 나머지가 궁금하신 분은...책을 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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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님들, 연극 보러오세요~~~

세이브더칠드런과 극단 사다리가 함께 초등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마음을 보여줄 다문화 이해 아동극 '엄마가 모르는 친구'를 만들었어요.

원래는 블로그에서 초대권 나눠드리는 이벤트를 할 계획이었는데, 수익을 목적으로 한 공연이 아니라서 관람료가 단돈 1천원입니다. 별로 큰 부담이 아닐테니 그냥 오시라고 소개 드립니다.

공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고 예매도 가능한 사이트를 아래 링크합니다.
(엄마가 모르는 친구 사이트 바로가기)


이 연극은 제가 이 단체에 합류한지 얼마 안되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연말 공연만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올해 봄, 극단 사다리의 연극놀이 강사, 배우들과 함께 초등학교 5곳에 나가서 진행한 '차별 인식 개선 연극 수업'을 먼저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차별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직접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연극'이라는 장치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수업을 석 달동안 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만든 상황과 대사가 이번 연극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전문 작가의 손을 거쳐 각색되고 전문 배우들이 연기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일반적인 공연과 다른 점이랄까요. 많은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더 자세한 뒷이야기,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블로그에 쓰려고 해요.

또한 이 연극은 세이브더칠드런이 진행하는 '다양한국 만들기'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앞에 링크한 토론문에도 썼지만, 이 캠페인은 다문화 아이들에게 똑같은 한국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대신 차이를 인정하고 공생하자는 시각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취지가 아무리 좋은들 재미가 없으면 소용이 없지요. 그런데
지난 주 금요일 배우들 연습실에 놀러갔다왔는데, 재미도 상당할 듯합니다. 극단 사다리는 어린이 대상 연극으로 워낙 이름높은 수준급 극단인데, 전 몇 개 장면만 지켜봤는데도 "역시!"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어요. 랩과 노래가 많이 포함된 semi-musical이니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 거여요.
초등학교 4~6학년 대상으로 만든 연극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와 함께 보셔도 좋고, 중고생, 성인이 봐도 심심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연말에 공연 보러 많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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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삼아 저장해둠.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해온 다문화 아이들 이중언어 지원 프로그램과 한국 아이들의 비차별 교육이 '다양한국 만들기' 캠페인으로 한데 묶였다.
9월 발표회에서 얼떨결에 캠페인 취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아래 (요약본)와 같은 내용의 발표를 함. 뜻했던 대로 잘 지속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자기답게 살기, 함께 살아가기

- ‘다양한국 만들기캠페인 소개

<요약본>

1.     다양한국 만들기캠페인의 취지

세이브더칠드런의 다양한국 만들기는 기존에 진행해오던 다문화 아동 지원 프로그램, 올해 한국 일반 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한 차별 방지 다문화 이해 교육을 결합한 통합 캠페인이다. 두 갈래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우리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다문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활동이 더 이상 소수자의 입장에 처한 이주자들만을 대상으로, 그들을 한국인으로 동화(同化)’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문화는 외국인 이주자인 '그들'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우리'의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 정책에서 무엇보다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결혼 이주자 여성과 그 자녀의 교육 문제 등 궁극적으로 한국인으로 포함되는 대상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 즉 이방인의 동화(同化)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와 같아지라'고 요구하는 획일화된 문화에서 기존 토착민과 다른 사람은 피부색, 언어 등의 표지에 의해 결핍된 존재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이처럼 이주민을 타자화하고 복지의 시혜 대상으로만 간주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적 용어로 인식되는 낙인 효과도 생겨났다. 세이브더칠드런이 2010 12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아동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면담한 다문화 아동은 일상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손들라고 맨날 그러잖아요. 그럼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가정인가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막 이야기하고…. 어렸을 때요. 제가 발음이 많이 이상했는데 애들이 '우리랑 같은 사람 아니지 저리 가'라고 하고 맨날 놀리고.” (11, )

 

이 다문화 아동이 겪은 차별의 경험은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태도와 의식, 이에 기반하여 우리보다 못하다고 간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우월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가정 내에도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소위 '못사는 나라'로 간주하는 국가 출신이며 한국말을 못하는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가족 내 다른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서도 존중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문화 가정 자녀의 긍정적 정체성 형성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가 슬로건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려면 이미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 다문화 가정 내에 존재하는 차별과 부정적 정체성 형성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주민에게 한국사회가 낯설듯,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가 강했던 한국인에게도 다문화 사회는 낯설고 새로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 차별적 의식과 태도를 버리고 나와 다른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기,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며 체계적 교육과 각성된 의식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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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에서 얼떨결에 맡은 일 때문에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아이들 차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됐는데, 맨 땅에 헤딩이라고 답답해하지 말고, 이럴 때 공부 좀 해봐야겠다.
그래서 새 카테고리를 만듦. 사람들이 어떻게 그룹을 지어 차이를 차별하게 되는지, 차별의 극복은 가능한지, 다양성의 공존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책, 논문 등을 읽고 메모해둘 예정.

이 주제에 꽂힌 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을 좇다가 지난 달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라는 책을 읽었다. 
건성건성 읽던 도중 페이스북 담벼락에 낙서했던 걸 여기 옮겨놓는다.

...책은 참 재미없게 썼더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실업, 범죄의 원인으로 이주노동자를 지목하듯 사회에 상존하는 위험을 놓고 '타자'를 비난하는 게 근대 이후의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파리인들에겐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 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 연관되어 왔다
.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 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또한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 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 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고, 책 마지막 챕터는 이런 타자화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챕터만 못읽고 대여 기한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책을 반납하고 말았다. (뭐하는 거니.....)
사실 대여기간 초과보다는, 번역이 별로 좋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아 읽기를 포기한 것. 마지막 챕터는 잘 이해해보고 싶어서, 곧 지를 예정인 킨들로 원문을 읽어보려고 함. (더 이해 못할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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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과 연극수업을 하면서, 영화배우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는데 사진을 보고 적당한 배역을 골라보자고 제안했다. 사진엔 백인 남녀, 동남아시아 여성과 흑인 남성이 있었고 필요한 역할은 사장과 악마, 천사, 걸인이었다. 캐스팅 결과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악마에 흑인 남성, 사장에 백인 남성, 천사에 백인 여성, 걸인에 아시아 여성을 골랐다. 아시아 여성에 대해선 “가난하게 생겨서”가 이유였고, 흑인 남성은 “무섭게 생겨서” “손에 총을 들고 있어서 (총이 아니라 카메라였다)” 악마로 골랐다.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른들부터 무턱대고 백인을 선망하는 반면 동남아인을 깔보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피부색에 따라 편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방에서 ‘다문화’를 말하지만, 이 단어는 ‘미국, 유럽이 아닌 우리보다 못한 나라 출신’이라는 부정적 개념이 되다시피 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민자 출신국의 다변화, 다양한 문화 소개 등이 거론되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건 사람의 오래된 습성이다. 인류학 조사에서도 ‘우리’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성이 그렇다면 나와 다른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바꿀 방도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1954
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로버스 케이브’ 캠프라고 불린 유명한 실험을 했다. 전부 백인 중산층 출신인 열 살 소년 22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캠프장에 도착했다. 각 그룹은 이름과 심벌, 규칙을 만들고 놀다가 엿새째가 되던 날, 캠프장에 다른 그룹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부터 두 그룹 사이에서는 열 살짜리 소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욕설과 증오를 동원한 싸움이 시작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절망적이지만 셋째 주에 연구진은 이들이 집단 구분을 포기하고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실험했다. 캠프의 유일한 물탱크 꼭지를 막아버리거나, 멀리 데려가며 일부러 트럭을 고장 내자 새로운 환경에서 두 그룹의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비하하는 충동도 수그러드는 동시에 ‘우리 편’에 대한 열광도 시들해졌다. 1주일 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소년들은 그룹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섞여 앉았다.


이 실험의 결론은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좇아 한 패가 되는 게 아니라, 한 패가 되고 난 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백인과 흑인 소년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어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까? 비슷한 의문을 품은 다른 심리학자가 9년 뒤 실험을 재연했는데 이번엔 종교분쟁이 심한 레바논에서 기독교인 열 명과 무슬림 여덟 명을 모았다. 연구진은 소년들을 섞어 ‘푸른 유령’과 ‘붉은 요정’ 팀으로 나누었다. 예상대로 그룹 간 싸움이 벌어졌지만, 뜻밖에 이 싸움은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니라 유령 대 요정 팀 사이에서 일어났다.


두 실험이 들려주는 것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분류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으므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의 해법도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로버스 케이브’ 캠프의 소년들처럼 ‘우리’의 폭을 넓힌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다문화 논의는 여전히 외국인 ‘그들’을 다루는 문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문화 사회가 ‘그들’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정 집단을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면한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사회의 다수자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더 나아가 다문화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며 수평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래야 ‘함께 사는 우리’가 된다. 다문화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화(同化) 교육 대신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이해, ()차별 인권 교육이 더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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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쓴 글입니다. (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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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은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이 분류되는 방식에 얼마나 민감한지 절감하곤 한다. 예컨대 ‘다문화’를 생각해보자. 공식적인 법률 명칭도 ‘다문화가족지원법’인데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고 기업이 지원하는 ‘다문화’ 행사가 넘쳐난다. 이렇게 보편화하였으니 가치중립적 용어가 된 걸까? 내가 일하는 단체의 권리 교육에 참여했던 열한 살 난 ‘다문화’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문화 가정 손들라고 맨날 그러잖아요. 그럼 손을 드는데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인가봐’ 어쩌고저쩌고 하고….”

‘다문화는 손들라’고 요구하는 무신경한 교사 탓에 꽤 오래 따돌림을 당했던 이 아이는 “너는 우리와 달라. 저리 가!!”하고 내치는 친구들에게 “아니야. 나는 너와 같아”라고 항변하는 포스터를 그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 넣었다.


북한을 탈출해서 온 아이도 다르지 않다. ‘탈북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새터민’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지만, 권리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아이는 자신이 겪은 차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물었다.

“왜 자꾸 우리를 새터민이라고 불러요?”


아이의 개별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편리하게 그룹의 특성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대체로 어른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배우는 대로 따라 한다. 경기도의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는 교사는 “다문화 어린이만 방과 후 교육을 따로 받고 그룹으로 불려 다니다 보니, 급기야 이들끼리 똘똘 뭉쳐 이젠 이 아이들이 부모가 둘 다 외국인인 이주 노동자의 자녀들을 차별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걱정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40여 년 전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유명한 실험 ‘파란 눈, 갈색 눈’을 떠올렸다. 1968년 4월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다음날, 주민이 모두 백인인 아이오와 주 작은 마을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였던 제인 엘리엇이 시작한 파격적인 실험이다.

차별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엘리엇은 아이들을 파란 눈, 갈색 눈 그룹으로 각각 나눈 뒤 첫날엔 파란 눈 아이들이 갈색 눈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파란 눈 아이들에겐 쉬는 시간도 5분 더 주면서 특별대우를 했고 갈색 눈 아이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목에 스카프를 두르게 했다.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나와 다른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룹을 나눠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고 다르게 취급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전에 서로 친했던 아이들은 불과 15분도 지나지 않아 심술궂고 치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날엔 서로 역할을 바꾸어 이번엔 파란 눈 아이들이 차별받는 경험을 치러야 했다.

실험이 끝난 뒤 엘리엇이 아이들에게 차별받는 기분이 어땠냐고 물으니 아이들은 앞다투어 “줄에 묶인 개가 된 기분” “누가 나를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내버린 거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차별 실험이 끝나자 아이들은 스카프를 찢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10여년 뒤 성인이 되어 만난 이들은 “지금까지 받은 모든 교육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 실험을 술회했다.

이 실험을 다룬 PBS 다큐멘터리 ‘분열된 교실(A Class Divided)’은 분리와 차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데, 무엇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호칭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3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파란 눈, 갈색 눈’ 실험을 하던 첫날, 아이들 사이에서 주먹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파란 눈 아이가 친구인 갈색 눈 아이를 이름 대신 “야, 갈색 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별 당하는 그룹이 된 파란 눈 집단의 한 여성은 엘리엇이 “거기 파란 눈 세 사람”이라고 부르자 “나한테도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를 분리하지 않았다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던 아이들이 친구를 ‘야, 갈색 눈!’이라고 부르는 일도, 그렇게 불렀다고 친구를 때리는 일도, “나에게도 이름이 있다”고 반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우리’와 ‘그들’이 나뉘면 사람들은 아주 신속하게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개별성과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지만 ‘그들’ 집단에 대해선 개별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일 뿐이다. 개개인이 모두 다르고 각양각색인데도 피부색이나 종교 빈부격차 등의 단서처럼 ‘그들은 모두 똑같다’는 걸 암시하는 쉬운 표지를 발견하면 개개인의 차이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일부러 그룹을 나누건, ‘다문화는 손들어’라는 지시에 의해서건, ‘나와 다르다’는 구분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어제까지 친구였던 내 짝의 이름이 사라지고 ‘갈색 눈’ 또는 ‘다문화’가 된다.


‘그들’에 속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에 소개한 포스터에 “나는 너와 같아”라고 써넣었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가정이라고 저는 생각 안 해요. 어차피 같은 민족인데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은 필요 없는 말이잖아요. 똑같이 사람이고 말만 다를 뿐인데.”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생각의 수고를 덜기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범주라 할지라도 나와 다른 사람이 나처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는 능력, 낯선 사람과 ‘우리’를 맺는 능력은 인간성의 필수불가결한 부분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적어도 교실 안, 아이들이 함께 배우는 공간 안에서는, 특히 각기 다른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사의 머릿속에서는 ‘그들’에 대한 구분과 경계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개별성에 대한 고려가 시작되고, 개인의 고유함을 알아보게 되고 “야, 갈색 눈!” “야, 다문화!” 대신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게 되는 것이다.

<포스터=ⓒ세이브더칠드런, 사진=ⓒ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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