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주제로 잡지 한 권을 꾸미는 독특한 계간지 [1/n]의 여름호 주제는 '환승'입니다.

비행기나 버스를 갈아타듯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을 주제로 한 권을 꾸몄는데요. 전체 책의 구성과 디자인이 재미있네요. 각 꼭지 글들도 좋습니다. 방금 전에 손에 든 잡지를 밑줄 그어가며 읽었어요. (위 그림을 클릭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목차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버스 터미널에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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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터미널에서

얼마 전 나는 17년 넘게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렸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불안했다. 이 장거리 여행길에, 갈아 탈 버스가 있기나 할까……. 하지만 이대로 더는 가고 싶지 않아서 큰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탈 버스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 내리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 하고 어디로 갈지 궁리하며 터미널 근처를 서성이던 내가 한 일은 다른 환승객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18명의 환승객들을 만났다. 회계사가 요가학원 원장이 되고 광고회사 임원이 요리사가 됐으며 간호사가 소설가가 되고 음반가게 사장이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성공적인 환승의 결과보다 나는 이들 안에서 꿈틀대며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 마음의 씨앗이 궁금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전복하고 싶은 열망? 혹은 오래 묵은 꿈을 더 늦기 전에 실현하겠다는 의지? 


이전의 삶이 좋기만 하다면 누가 환승을 꿈꾸랴. 한 분야에서 오래 길을 닦아 어른이 되고 나면 젊은 날의 혼란 따위 말끔히 해결하고, 살아가는 일, 아니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만큼은 도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기대는 번번이 배신당하며 성인이 되어도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개 나이 마흔쯤 되면 발달심리학자 프레데릭 허드슨의 말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갖지 못했고, 현재 가진 것은 바라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각은 여러 계기로 찾아온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선 자각이 위기의식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았다. 일 중독자였던 회계사는 어느 날 아침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일시적 마비 증세를 겪은 뒤 “일과 돈 말고 내 인생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승진을 거듭했으나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이 궁했던 외국계 회사 사장에겐 “삶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는 자각이 깃들었고, 생계 때문에 음반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 어떤 이는 IMF 외환위기 때 한 팀이 몽땅 해고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단단해보였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겪었고, 10년 위 회사 선배들을 지켜보며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구석에 밀쳐두었던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올렸다. 위기가 자기 삶에서 비롯되었건 외부에서 왔건 이들의 마음속에 터 잡기 시작한 질문은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내 속도감으로 살아가고 있나” 하는 거였다.


그런 질문을 품는다고 누구나 ‘환승’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환승을 선택하는 이들이 상세한 지도와 시간표를 갖고 있을 거라 여기며 부러워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환승객들 중 정밀하게 짜인 계획표대로 움직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NGO 활동가가 된 전직 광고회사 임원은 “회복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었는데, ‘그 때가 그만둘 때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내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고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다. 반면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이건, 뭔가를 꿈꾸는 열망 때문이건, 언젠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지향이 ‘일시적 충동’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지속적으로 나를 부르면, 더 이상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때를 만나게 된다. 그 때에 내린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미친 짓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만난 삶은 그 후회까지 포함해 한 번은 살아야만 하는 삶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이들은 ‘내가 어느 때 가장 행복했던지’를 오래 생각했고, 자신의 강점과 연결되지 않는 판타지를 꿈으로 착각하지 않으려 주변의 도움을 청했으며, 온전히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하프타임을 갖고 미래의 꿈을 기록했다. 어디로 가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일단 이만큼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큰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러다보면 별개인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어 뒤돌아보면 어느새 하나의 길이 만들어져 있곤 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농부가 된 이는 내게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으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누군가 뭔가를 이루었다면 행동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단 뛰어들어 경험하고 성찰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내가 환승객들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어쩌면 환승을 선택할 때 필요한 필수품은 상세한 노선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서로 이어지고 통합되어 결국은 ‘내 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믿음뿐일지도 몰랐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나는 곧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힘』에서 들려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가자는 대로 그 부름을 따라 살면,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눈빛을 달라지게 하는 조그만 직관을 따라 가다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말.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부러 좇은 게 아닌데도 마치 계획이나 한 듯 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지거나 도움을 받는 경험을 겪었다.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보트 제작을 배우고 돌아오니 보트 쇼가 열리고 요트계류장이 속속 들어서는 식이다. 물론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반대로 악운이 겹치고 학비 대줄 돈이 없어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라던 캠벨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궤도였다.


손에 지도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환승을 선택하면서 남들 따라 ‘되는 쪽’에 걸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성배를 찾아서』의 오래된 프랑스판 문헌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신화에서 남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곧잘 길을 잃는다. 공연장 대표가 된 전직 변호사의 말마따나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대신 나만의 길을 고르고, 자신의 괴물과 싸우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환승객들에게 인생 전환은 지금의 자기로부터 멀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난 18명 중 이전보다 수입이 확실히 늘어난 사람은 4명뿐이다. 세속적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순 없겠지만 삶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들로부터 나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기쁨에 대해 들었고 먼 길을 돌아 미리 계획된 듯한 소명을 만났다는 충만함도 엿보았다. 반면 또 다시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자기반성, 가끔 환승을 후회한다는 고백도 들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가 어떻든 단 한 번의 전환으로 삶이 완성되리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승객들은 미래의 불투명함을 불안하게 여기는 대신 우연에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환승하는 우리들은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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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12> 이인식 씨- 대기업 상무에서 과학칼럼니스트로

Before: 대성그룹 상무이사
After: 과학칼럼니스트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지금이야 ‘평생직장’이 낡은 개념이 되었지만 18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평생직장 시대’에 42살에 큰 기업체 상무가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칼럼니스트인 이인식 씨(64)를 이 시리즈의 인터뷰 대상으로 떠올린 이유는 그래서였다. 금성반도체(현 LG 정보통신)에서 최연소 부장이 되었고 대성그룹 상무이사를 지낸 그는 중년의 절정인 46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다. 인생 2모작, 3모작이 낯설지 않은 요즘에도 쉽지 않을 결단이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지난 주말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두 번 놀랐다. 크고 멋진 아파트는 ‘글쟁이’의 삶은 곤궁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렸다. 그의 서재에 들어서면서 다시 놀랐다. 널찍한 책상과 빽빽한 서가를 기대했으나 너무 낡아 무늬목이 너덜거릴 지경이 되어버린 작은 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의 아내가 옆에서 “총각 때부터 쓰던 책상”이라고 들려주었다.

이 작은 책상에서 그는 원고지에 글을 쓴다. 매체에 칼럼을 쓸 땐 그의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컴퓨터에 글을 입력해주고, 책을 쓸 땐 A4 용지에 깨알같이 글을 써서 넘긴다.

‘왜 컴퓨터를 안 쓰느냐’고 묻자 그는 “컴퓨터를 안 쓰는 게 아니라 워드 프로그램을 안 쓰는 것”이라고 정정해줬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메일도 쓰지만, 펜으로 글을 쓰는 게 너무 익숙해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작인 472페이지짜리 책 ‘지식의 대융합’도 그렇게 썼다. 워드로 이리저리 문장을 옮기고 조합하는 편집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겐 거의 ‘미션 임파서블’의 경지다.


● “결국은 사람이 재산이에요”


그는 중년이 될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늘 ‘생존’이 목표였다. 대학 4년 내리 입주가정교사를 했고 졸업할 때도 취직이 급했다. 금성반도체에 입사한 뒤 정신없이 달려 8년 만에 부장이 되고 이후 일진금속을 거쳐 대성그룹에서 87년 상무이사가 되고 보니 42살이었다.

“돈은 남 못지않게 벌었지만 참 허망했어요. 내 인생이 회사원으로 끝나나…, 한숨만 나왔지요.”


글쓰기는 그의 은밀한 꿈이다. 그의 첫 책은 금성 반도체에 다닐 때인 75년 사보에 연재한 꽁트 12개를 묶어 펴낸 소설집 ‘환상 귀향’이었다. 생활에 치여 꿈이 시들해질 무렵, 어쩌다 연이 닿아 잡지 ‘컴퓨터 월드’의 기획을 알음알음 돕기 시작했다. 미국 과학 잡지를 매달 10여권씩 받아 읽으며 기사 기획을 돕다 보니 직접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 ‘하이테크 혁명’과 ‘사람과 컴퓨터’다.


잡지 일을 돕고 글을 쓰다보니 제대로 된 과학 잡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91년 가을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까지 쏟아 넣어 잡지를 만들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잡지를 두 번이나 만들었어요. 결국 94년 여름에 완전히 망했는데, 월급 줄 돈이 없어 직원들이 컴퓨터를 들고 가는 걸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했어요. 하는 수 없이 아들은 군대에 보내고…, 그야말로 밑바닥이었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제 드라마틱한 반전이 시작될 차례’라고 기대했다. 웬걸, 극적 반전은 없었다. 미련하다 싶을 만큼 우직한 전진만 있었을 뿐이다.

92년 2월 ‘사람과 컴퓨터’가 발간되고 두 달 뒤 시사월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면서부터 그의 책과 칼럼을 본 출판사, 매체의 글 요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학칼럼니스트가 드문 시절이라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월간지->주간지->일간지로 글이 실리는 매체 폭이 확대됐고 잡지와 출판사의 기획을 도와주며 돈을 벌었다. 외환위기가 닥친 97년엔 연재도 다 끊겨 자다가 가위에 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절망감 역시 그는 글로 달랬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인간관계 덕분이에요. 인생 전환도 인간관계가 좋아야만 가능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싸가지 없는 사람’은 전환도 어려워요.”


그가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까치 출판사 박종만 사장의 소개 덕분이었다. 김영사 박은주 사장으로부터는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그가 ‘바닥에 처한’ 94년 추석 무렵, 박 사장은 ‘사람과 컴퓨터’ 책만 보고 그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하더니 추석 직전 직원을 보내 “선생님은 국보”라면서 100만원을 건네기도 했다.


“결국은 사람이 재산입니다. 돈보다 사람예요. 일감이 들어오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요. 저 역시 판단착오로 몇 번 신뢰를 그르치고 뼈아프게 반성한 적도 있지만, 일단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제가 만나는 사람의 인간적 삶에 동참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한 분야 10년 파면 길이 트입니다”

 

어떤 이는 그를 ‘잡학의 대가’라고 부른다. 과학지식의 온갖 분야를 섭렵하지만 관련 분야 석, 박사 학위는 없다. 칼럼을 쓸 때 간판이 필요하다고들 해서 95년에 ‘과학문화연구소’ 간판을 달았을 뿐이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으나, 엄청난 공부로 이뤄낸 글쓰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식씨가 펴낸 책들)


96년 월간지  ‘과학동아’에 성에 대한 연재를 시작할 때도 그는 2년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고시원에 출퇴근하면서 공부하고 글을 썼다. 다음엔 어디로 갈지 모호할 때에도 그는 늘 책 속에서 길을 발견했다.


“컴퓨터 인공지능을 공부하다보니 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뇌를 공부하다보니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죠. 억지로 분야를 넓힌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책 속에 답이 있고, 한 분야를 10년 파면 길이 열립니다.”


18년 전, 회사를 그만둘 때 그도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큰 조직의 소모품 대신 작아도 ‘내 것’을 생산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컸다. “별로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별로 없다”는 배짱도 한몫했다.


18년 후인 지금, ‘내 것’을 만들고 싶다던 그의 꿈은 실현된 셈이다. 자기 이름 석자로 브랜드가 되었다. 요즘 그의 수입은 인세 원고료 강연료 기획료 등 4가지 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점점 강연의 비중이 늘어난다. 14일에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서 특강이 예정돼 있다. 


“조직 안과 밖의 가장 큰 차이는 안정적인 수입인데, 때론 과감한 포기도 필요해요. 돈도 안정적으로 벌고, ‘내 것’ 생산도 하고 그렇게 너무 욕심내면 안돼요. 친구들이 연봉 1억 받을 때 나는 쪼들렸지만, 지금 나는 일하는데, 연봉 1억 받던 친구들은 은퇴하고 다 놉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듯 결국은 세상이 공평한 거거든요. 그러니 좋아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내공을 쌓으면 언젠가 한번은 찬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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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5] 정한진 씨 - 미학도에서 요리사로


Before: 프랑스 파리8대학 미학 전공 박사과정

After: 요리사

Age at the Turning Point: 40


정한진 교수(47‧ 창원전문대 식품조리과)는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내 인생전환은 극적이지 않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도 했다. 한번 만나만 달라고 졸라 겨우 만난 뒤에도 계속 그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을 탓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미학 전공 박사과정을 밟던 2002년 진로를 바꿔 요리사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르 코르동 블뢰’ 요리 과정을 수석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 요리사로 일했고 지금은 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친다.


그는 “인생전환은 결코 멋지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엄혹한 결단”이라면서 “모든 현실적 문제를 다 따져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 선택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일을 향해 떠나는 행위를 낭만적으로 상상했다면,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그의 말을 기억해둘만 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단, 그 때부터가 더 어렵다.” 


● 몸을 쓰는 세계에 매혹되다


1996년 파리 유학길에 오를 때 그는 부부유학생이었고 딸아이는 만 두 살이었다. 그간 저축한 돈으로 5년쯤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환위기가 터졌다. 1프랑에 150원이던 환율이 340원까지 올랐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돈이 축나는 상황에서 그는 “내가 정말 공부 체질인가” 회의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미학에 매료됐고 대학에 갈 때에도 부모와 싸워가며 미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랬는데 한국과 달리 어느 누구도 밀어붙이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환경에 처하면서, 내게 과연 학문적 자질이 있는지 심각한 회의가 들었어요.”


“계속 책상물림으로 사는 게 즐거울까” 자문하던 그의 눈에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유학생들이 모일 때마다 그가 족발, 잡채, 양장피 같은 요리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선후배들이 ‘박사 말고 요리사를 해보라’고들 농담하던 터였다.


“요리를 배운 적은 없는데 어디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면 집에 돌아와 그대로 만드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해서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도 메주 찧고 손질하고 엿기름 곱는 일을 같이 했거든요. 오죽하면 고3때 시험이 내일모레인데 김장을 같이 담갔겠어요. 그게 제겐 자연스러웠어요. 결혼 이후에도 김치는 계속 제가 담갔으니까요.”


요리를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르 코르동 블뢰’의 제과제빵, 요리, 와인 3가지 과정을 동시에 등록해 다니면서 “몸을 쓰는 다른 세계”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길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돌아와 한 달 간 설득 끝에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요리사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나이 마흔에 무슨 환상이 있겠어요. 저는 가장이고 잘못하면 가족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불안하지요. 게다가 어떤 일이든 늦게 시작하는 건 절대로 유리한 고지가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면 정말로 죽자 사자 매달려야 해요.”


● 항로를 바꿔도 갈등의 본질은 여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요리를 배우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일이 내 본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한다. 몸을 쓰는 구체성의 세계로 옮겨오니 자신이 오래 속해있던 추상성의 세계에서 해방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는 9개월 만에 요리 과정을 1등으로 졸업한 뒤 곧바로 파리 레스토랑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며 도제식으로 요리를 배웠다. 아침마다 도마 수십 개와 요리 도구를 제 자리에 배치하고 수십 마리의 닭 뼈를 씻어 기름 떼고 피 빼고 목욕탕 욕조 크기만 한 냄비에 넣어 육수를 끓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에 10여시간 서 있느라 자다가도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고 욕설이 끊이지 않는 거친 주방에서 자식뻘 되는 요리사들에게 욕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배수진을 친 그에겐 물러설 곳도 없었다.


6개월 실습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는 강남의 부티크 레스토랑인 ‘라미띠에’와 ‘일 마레’ 등을 거쳐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해보고 싶은 내 요리가 있는데 자본도 없고 독립의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했다”면서 “나는 모험을 피한 셈”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전환을 결심할 때의 갈등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자신만의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과 생계를 위해 마뜩치 않은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은 이전에 공부할 때 느꼈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인생의 항로를 바꿔도 여전히 맞서야 하는 과제였다.


● 삶 속에서 맛과 멋을 통합


인생전환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 오기가 생겼고, 자기 기술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일하는 사람,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요리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토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문학 전공자의 해석, 그럴만한 여유는 잃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생애의 경험들이 결국은 통합되어 간다고 느껴지진 않을까. 그는 요리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 ‘향신료 이야기’등의 책을 썼다. 미학 공부를 할 때에도 예술품을 미적 대상이라기보다 사회적 산물로 다뤘듯, 그는 음식 역시 문화적 산물이라고 믿는다.


“별 볼 일 없는 음식에도 생애의 추억, 개인의 정서가 담겨 있고 시대, 문화를 볼 수 있잖아요. 음식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작업이 내 삶에서 경험의 통합이라면 통합이겠지요.”


그는 ‘맛있다’는 개념을 시골에서 뜬 된장 같은 맛으로 정의했다. 발효식품처럼 기다리는 음식, 느린 삶이 후퇴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맞물려가는 삶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음식문화 개선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슬로 푸드와 연관된 삶을 사는 방식을 현실화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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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 3] 차백성 씨- 대기업 상무에서 자전거 여행가로
Before:
대우건설 상무
After: 자전거 여행가
Age at the turning point: 49


‘춤추는 사람은 바보/ 구경하는 사람은 더 바보/ 어차피 바보 될 바에/ 춤이나 추세.’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 씨(58)는 갑자기 일본 민속춤의 가사를 읊어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 때려치우고 자전거 여행이나 하겠다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말립니다. 도피, 낭만이 동기라면 안 하는 게 나아요. 사람은 누구나 치열한 전장(戰場)에서 싸워보는 경험을 한번은 해야 해요. 나는 전장에서 물러난 게 아니고 내가 만든 새로운 전장에 뛰어든 겁니다. 구경하는 대신 춤추기로 결정한 거죠.”


겨울 끄트머리에 만난 그는 또래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자전거 여행가는 자전거를 타는 모습으로만 비쳐지고 싶다면서 사진 촬영을 한사코 거부했다.


대우건설 상무였던 그는 50을 앞둔 해인 2000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자전거 여행가로 나섰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만 얼추 3만km. 이른 은퇴 이후 유유자적하는 복 많은 사람이겠거니 했던 생각은 그와 이야기하던 동안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전사(戰士)였다. 필생의 꿈에 몰두하는 은륜(銀輪)의 전사.


● 30여년 준비한 자전거 여행


9년 전 그가 자전거 여행을 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둘 때 사람들은 그를 “또라이”라고 했다. 아이들 둘에 아내는 전업주부였다.


“내겐 돈보다 시간이 더 급했어요. 늙어서 다리에 힘이 빠지면 자전거를 못 탈 테니까. 불안할 텐데도 ‘대기업 상무보다 자전거 여행가가 더 멋지다’면서 전폭 지원해준 가족에게 고마울 따름이죠.”


가족이 씀씀이를 줄이고 10년 이상 해외 근무를 통해 모은 저축으로 몇 년은 버틸 거라 계산했다. 토목기술자인 덕분에 틈틈이 돈을 벌 수단도 있었다. 아이들이 자립하면 집을 처분해 생활비를 충당할 생각이었다. 죽을 때까지 집을 갖고 있을 생각도, 아이들에게 자산을 물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자전거 여행이 중요한가?


그는 “자전거 여행은 내 필생의 꿈”이라고 단언했다. 자전거를 처음 갖게 된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혼자 서울에서 대구까지 3박4일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무모한 ‘생애 첫 여행’이후 그는 “자전거로 낯선 세상에 길을 내리라”하는 소망을 잊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도 죽겠구나’하는 생각을 일찍 한 편이예요. 어떻게 살아야 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람에게 주어진 시‧공간 중 시간은 어쩔 수 없지만 공간은 여행을 통해 확장할 수 있잖아요. 그런 공간의 확장을 통한 ‘삶의 풍성함’이 어릴 때부터 제 목표였어요.”


자전거 여행을 통해 그가 이룬 또 하나의 꿈은 책을 쓴 것.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책을 쓰는 게 꿈이었다던 그는 세 번에 걸친 미국 자전거 여행을 ‘아메리카 로드’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출간 석 달 만에 5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은 편이다. 일본 유럽 대양주 아프리카까지 모두 5권의 자전거 여행 시리즈 책을 쓰는 것이 그의 계획. 지금은 일본 시고쿠 섬과 오키나와 자전거 여행을 준비 중이다.



● 실패보다 무서운 건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인생 아닌가? 


그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를 향해 매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인생을 사는 동안 두 번째 인생 때 할 일을 생각해두고 미리 준비해야 해요. 그게 자전거든 그림이든 뭐든 몰두할 수 있는 일을요. 나는 자전거 여행만 30년 준비했어요.”


‘몇 살엔 뭘 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되어야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고’ 같은 남의 기준 말고 자신의 기준을 세우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출생신고를 5년 늦게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실제 나이보다 5년 젊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 아니겠어요? 정말 나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풀빵 장사를 해도 대한민국 최고면 된다는 생각으로 몰두하다보면 거기서 돈을 벌 가능성도 열리고 새로운 관계도 따라와요.”


불안정한 미래가 겁나고 낯선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 그러나 몰두할 일이 있으면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에서 내려올 때 말이죠. 앞에 돌멩이나 나무뿌리 등 장애물을 보고 덜컥 겁이 나면 반드시 넘어져요. 그럴 땐 과감하게 확 지나가버려야 되레 안전합니다. 뭘 해보질 않은 사람들이 대체로 겁이 많아요. 그런데 사실은 뭘 하다 실패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 조차 없는 인생이 더 무서운 것 아닌가요?”


그는 자신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마음껏 여행하고 책도 썼고 건강도 좋아졌다.
  완치가 어렵다고 했던 간염을 극복한 것도 여행의 부수적 소득으로 꼽았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비활성 B형 간염에 걸렸는데 놔두면 간경화,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인 2007년에 저절로 항체가 생겼어요. 지난해 10월 20일 ‘간의 날’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자전거 여행으로 간염을 완치했다는 사례 발표를 했을 정도라니까요.”


그간 여행한 곳 가운데 경치가 너무 좋아 자전거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던 지역을 한 군데만 꼽자면 뉴질랜드 남 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진하게 남는다고 했다. 일본을 여행할 때도 도예가 심수관 씨 집에 찾아갔는데 “숱한 손님 중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환대를 받았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의미 있는 체험을 만들지 않겠어요? 전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자입니다. 인생이 뭘 남기고 이루고, 그러라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전반전 인생에서도 성취나 업적 같은 데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후반전 인생에서도 한번 태어난 인생, 잘 마무리하는 방법을 고민할 뿐입니다.”


스스로 즐거운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자전거 순찰대 자문도 하고 자전거 문화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여도 한다. 그의 말마따나 "스스로 즐겁고 다른 사람도 돕는다면, 그 이상 뭘 더"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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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2] 최혜정- 광고인에서 국제NGO 실무자로


Before: 레오버넷코리아 제작이사,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

After: 국제NGO ‘세이브 더 칠드런’ 자원개발부장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평화’가 떠올라요. 6살 때 낮잠을 자다 깼는데 부엌에선 엄마가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비 온 뒤 적막하고 깨끗한 마당에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던 풍경. 그게 기억에 선명한 ‘행복’의 이미지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란 새로운 모험과의 조우를 뜻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전부 다르니까 ‘나만의 행복’이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최혜정 부장(48)의 표정은 뭘 더할 수도 없을 만큼 충만해 보였다.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을 지내는 등 22년간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그녀는 2007년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뒤인 2008년 세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고액 연봉과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박봉의 NGO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벼락같은 계시로 인생항로를 바꾼 것도 아니고 대안적 삶을 찾은 것도 아니다”면서 “원래 살고 싶었던 방향을 따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와 2002년 신문에 실린 그녀의 기사를 찾아보았다.
당시 레오버넷 코리아 제작이사였던 그녀는 맥도널드 광고 ‘목숨걸지 맙시다’로 세계 3대 광고제 중 칸 광고제 은사자상, 뉴욕 광고페스티벌 금상을 휩쓸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인터뷰에서도 광고는 “인간의 진실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NGO를 선택한 이유로 “사람과의 접점에 서 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7년 전에도 그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던 사람 같았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자기 안의 질문을 따라 가기


40대 초반부터 그녀는 “이게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하는 질문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광고업계에서도 물론 성취감을 느꼈지만 본질적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또 다른 문제 같았어요.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사는가, 내 속도감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질문을 품게 만든 충격적 사건이 2004년에 있었다. 그해 여름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 장애인 교회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인솔자인 그녀가 방문자를 맞으러 문 앞에 서 있는데 교회 담당자가 오더니 갑자기 “여기 말고 부엌에 가 있는 게 어때요?”하는 거였다.

“내 얼굴이 너무 긴장되고 어두워서 오는 사람들이 불편하겠다나요. 얼떨결에 부엌으로 쫓겨나 수십 명 분의 불고기를 볶으며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좀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명상 심리검사 코칭 등 온갖 시도를 해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 ‘링크’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같은 책을 읽으며 다른 시각과 심지를 갖추려 노력했다. “앞으로 20년 더 내 인생을 갖고 뭘 하고 싶은가”를 오래 고민하던 와중에 학창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치유를 겸한 대안학교를 해보면 좋겠다고도 막연하게 꿈꾸었다.


“회복이 아니라 해독을 위해 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2007년 5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가는대로 관심사를 따라 혼자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신문에서 희망제작소의 ‘제1회 행복설계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이 아카데미를 마친 뒤 간사의 우연한 소개로 2008년 5월 ‘세이브 더 칠드런’과 연이 닿게 됐다.

“광고회사를 그만둘 땐 NGO에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대안학교를 꿈꾸며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그녀의 꿈과 크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다른 길로 향한 문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모서리에서 열렸다.


● 전환의 때를 어떻게 알 것인가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해도 지금이 좋을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겁이 나거나 생계는 어떻게 하나 등등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떠오르고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죠. 제 경험으론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져요. ‘다음에 뭘 하지?’하는 질문에도 ‘6개월간 찾아보자’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아직 때가 아니라면 “장, 단점 파악 등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고 무보수든 주경야독을 하든 원하는 일에 발을 슬쩍 담가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하지만 그 ‘원하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뭘 하고 싶은지가 단 번에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요?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그리 많을까요?”하고 반문했다.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너듯 연결하면서 살아도 되잖아요. 두서없이 여러 생각이 든다면 조금씩 맛을 보고 아닌 걸 지워나가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뭘 하다가 그만두면 그만큼 인생과 시간의 낭비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언젠가는 경험들이 연결되어 쓰이게 되지요. 전 늘 ‘어디로 가든 크게 보면 내 길이겠지’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 길 안에서 움직일 뿐이지 내가 갑자기 영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 다른 사람, 다른 집단과 네트워킹하기


광고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그녀는 일부러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약속의 70% 정도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스님 목사 신부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포럼, 커뮤니티, 광고회사 고객으로 모셨던 어른들을 찾아갔다. 무턱대고 “제가 어떻게 보이나요?”하는 질문도 숱하게 던졌다.


“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늘 보는 직장 동료는 같은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이어서 별 도움이 안돼요. 다른 클러스터, 다른 시각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관심사를 좇다보니 말 그대로 “6개월 만에 100명을 알게 되더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그녀의 관심을 끈 분야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인터넷을 뒤지고 학회지를 구독하고 강연을 찾아가면서 점점 네트워킹을 넓혀 갔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길 위에 서게 되었지만 처음에 희망제작소에 이끌린 것도 이 관심사 때문이었다.


● 계속 성장하기


NGO에서 일하면서 수입은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고 출장지는 파리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보상을 얻는다고 했다.


“이 돈이 가면 한 아이가 웃는다는 그 연결선이 한 눈에, 명확하게 보이니까 그것만큼 큰 보상이 없지요.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한 모자 뜨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동봉해 보낸 편지를 볼 때마다 숱하게 눈물이 났는데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다고 실감했어요. 그렇게 긍정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다른 데에서 얻기 어려운 보상이죠.”


10년 쯤 뒤에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계획이나 결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미래 아닌가요? 나는 여기서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그 마음에 진정성만 있다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 에도 동시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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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모작’은 이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년퇴직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 ‘조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중년도 늘고 있습니다. 35~55세에 인생전환을 이뤄낸 평범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는 [중년의 터닝 포인트]를 주 1회 연재합니다.


 

Before: 자동차 엔지니어

After: 미국 FDA 승인 받은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주)미당 추어탕 대표

Age at the turning point: 36



11년 전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전정욱 씨가 1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추어탕 집을 차리려 준비할 때, 하필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말리던 주변 사람들은 “그것 봐라”는 듯 그를 딱하게 여겼다.

경제상황이 그 때보다 더 힘들다는 2009년. 그는 지금 48개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당 추어탕의 대표로 성장했다. 2006년엔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 중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식품안전승인을 받고 포장 추어탕을 미국에 판매하고 있다.

전 대표 (47)는 “음식 산업은 결국 신뢰의 산업이고 오너의 마인드가 모든 걸 좌우한다”면서 “정 할 것 없으니 음식점이라도…, 같은 생각으론 100% 망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전환에 성공했을까.


1. 스스로에게도 명분이 서는 일을 찾아야 한다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그는 자동차 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다 97년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추어탕 집을 차렸다.

“직장생활 10년차 쯤 되었을 때, 이 회사에서 내 미래가 어떨까 그려봤어요. 사장이 될 것도 아니고, 언젠가 홀로서기가 불가피하다면 더 나이 들기 전에 하자고 결심했지요.”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에게 명분이 서는 일을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업을 계승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전북 남원에서 3대째 추어탕 집을 해왔다. 이미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그는 명맥이 끊긴 가업을 다시 잇겠다고 결심했다. 단순한 ‘추어탕 집’이 아니라 ‘전통음식 발굴, 브랜드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하며 이게 ‘해야 할 일’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퇴직 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음식점은 손님에게 무조건 맞춰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주인이 잘 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의욕적이니까 자신을 낮추지만 떠밀려서 한 사람들은 그걸 못하더라고요. 떠밀려서 하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 태도의 차이가 모든 걸 결정해요.”


2. 좋은 조력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일류 시설에 일류 주방장을 쓰는 ‘규모의 경제’ 혹은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자본이 모자란 그는 후자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2년간 주말마다 추어탕의 본고장인 남원에 내려가 요리를 배우고 추어탕 집을 순례했다. 그의 행운은 스승을 잘 만난 것. 부모님 집 주방에서도 일했던 노인에게 ‘맛을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한식에는 고추장 된장 마늘 등 7대 재료가 있는데 탕을 먹어보고 그 안에 7대 재료 중 무엇이 들어갔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특히 탕은 이미 끓여 동화된 상태라 재료 감별이 어려워요. 스승께 집중적으로 배운 게 이 기술입니다. 간만 볼 줄 알면 요리 80%는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배합을 알고 무엇이 부족한지 맛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탕 요리의 핵심인 열처리도 노인에게 배웠다. 추어탕 집을 순례할 때 어떤 집의 된장 맛이 유난히 강해 이유를 물으면 주인도 대개는 “된장을 한 숟갈 밖에 안 넣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비밀은 열처리에 있었다.


“추어탕에서 된장 맛은 입으로 느끼게 해야지 냄새가 나면 안 되거든요. 추어탕에 된장을 넣어도 냄새가 안 나는 온도가 360도라고 치면 그걸 불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 스승께 배운 핵심 기술이죠.”


3.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할 것인가


98년 수원에 추어탕 집을 차릴 때 그의 원칙은 ‘천연재료’로 승부하겠다는 것. 멸치 표고버섯 다랭이를 우려 만든 천연양념을 썼고 젓갈도 가거도에서 소금으로만 절인 천연젓갈을 썼다. 이러다보니 원가 상승은 당연지사. 당시는 외환위기가 들이닥쳐 모든 추어탕집이 가격을 1000원씩 깎던 때였다. 그는 고민 끝에 되레 가격을 7000원으로 올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저도 깎으려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다 내리는데 혼자 올리는 결정을 하기가 쉽겠어요. 하지만 천연재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 원가는 7000원이었고, 내 방식을 버리느니 대신 1000원어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직접 빚은 약주, 추어로 만든 전을 서비스하기 시작했지요.”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처음에 하루 20만~30만원이던 매출이 1년 반 만에 하루 250만 원 선으로 늘었다. 차별화를 위해 추어 만두, 어린이 추어 돈가스 등 신규 메뉴도 계속 개발했다.


“업종 선정도 중요합니다. 저는 차별화 전략의 성공이 추어탕집이라 가능했다고 봐요. 김치찌개와 달리 추어탕은 기호식품이고 고객의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 문화이거든요. 입소문이 나면 손님들이 1천원 차이는 무시하고 결국 다시 돌아오시더라고요.”


2005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때도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가 본사 물건 공급 수준을 30% 선에서 맞추는 것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18억 원을 들여 공급시설을 짓고 본사 물건을 100% 공급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를 해줬는데 다 실패했어요. 조리법만 배우고 맛 관리가 안 되니까 경쟁에서 지는 거죠. 일괄적 품질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짓고 본사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 냉장 상태로 매일 배송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4. 끈질기면 길이 트인다


2006년에 그는 미국 진출로 눈을 돌렸다. 탕 문화가 해외에서도 먹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고 재미교포들도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포장 추어탕을 대형 콘테이너로 수출하려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대행업체에 맡겼더니 6개월간 진전이 없었다. 하도 답답해 그는 동시통역사를 구해 매일 밤 FDA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FDA의 요구는 온도별로 제품 영양소가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조사해 제출하라는 것. 식품과학 관련 연구소에 갔더니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해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석 달 동안 공장에서 실험하고 거의 매일 FDA에 전화해 설명하면서 ‘식품 가열온도에 따른 영양소 변화’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더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자료보다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공정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이래요. 추어탕을 승인 받고난 뒤 대게탕 시래기국 황태탕도 일사천리로 승인 받았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는 “물건을 콘테이너에 실어놨으니 무작정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 안 되면 말더라도…. 끈질기게 추구하다보면 일이 되는 방식이 다 있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2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다. 강진 장흥에서 사라져가는 막걸리 초장을 도입해 키조개무침으로 상품화하는 등 전통음식 발굴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제 천직을 찾은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천직? 그런 건 모르겠다. 다만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에도 동시 발행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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