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3.24 인류학과 나 (6)
  2. 2010.07.10 타인의 취향 감별법 (12)
  3. 2010.06.29 [훅]착한 부자는 가능한가? (10)

컴퓨터 폴더 정리하다가 찾은 글. 재작년인가, 인류학과 창립 50주년 기념 문집에 논문을 쓸 역량은 안되고동문 이야기 코너에 썼다. 선배의 반 부탁, 반 강제가 없었더라면 이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이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장기 휴학 상태가 될 줄은 모르고 대학원은 마칠 거라고 상상했던 듯하다.

 

사실 코스는 마쳤고 논문만 쓰면 되는데... 논문 주제를 정하질 못했다. 한때 대강의 주제를 정하고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기도 했으나, 내가 논문을 써서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 영 떠오르질 않았다.

지도교수인 선배는 문제 자체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논문을 쓸 수 있는데 내가 자꾸 "그래서 해결책은 뭔데?"쪽에 너무 관심이 쏠려 있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내 성향이 원체 실용적이어선지,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질 않아서인지... 아무튼 논문을 써서 학위를 꼭 따야 하겠다는 절박감도 없고 해서 휴학 상태가 길어졌다.

논문을 써서 대학원을 마치겠단 생각을 앞으로 내가 하게 될진 모르겠다.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될 것같진 않다. 그래도 가끔씩 인류학 논문들을 읽고, 미국의 인류학 블로그들을 구독하고 인류학자들의 트위터들을 읽는다. 지식을 생산하기보다 그저 즐기는 애호가, 딜레탕뜨로 살아도 뭐 괜찮지 않은가 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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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인류학

 

저는 학부 85학번, 대학원 석사과정 09학번입니다. 그 사이에 18년 간 신문기자로 일했습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가니 ‘왜?’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학부 때 너무 공부를 하지 않은 게 한이 돼서”라고 대답합니다.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이시던데…, 진담입니다.

 

학부 시절엔 강의실보다 집회·시위 장소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고, 6월 항쟁이 불붙었던 1987년에는 어쩌다가 과 학생회장을 했어요. 공부를 하기는커녕 길거리로 나가자고 자주 수업거부를 부추기느라 교수님들 속을 많이 썩여드렸지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광대한 ‘앎’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에 최적인 20대 초반을 사회적 의무감과 이념에 짓눌려 보내야 했던 그 때의 풍경은 오래 안타까웠습니다.

 

모두들 한 번쯤 겪어봤겠지만, 인류학과 재학생은 유난히 “그 과 졸업하면 어떤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학부 땐 “사람과 관련된 일이면 뭐든 다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졸업생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그게 꼭 농담만도 아니더군요. 제 동기들은 그 숱한 ‘사람과 관련된 일’들 중 언론사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졸업할 무렵 소위 ‘언론고시’의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 경우엔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데모로 날을 지새우느라 그리 좋지 않은 학점의 영향이 큽니다.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는데, 엉망진창인 학점 때문에 1차를 서류전형으로 걸러내지 않는 취직자리를 찾다보니 그 땐 언론사 밖에 없었어요. 인생의 방향이 그렇게 어영부영 정해지기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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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TAG 인류학

오늘 아침자 한겨레 신문 '문화칼럼'에 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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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이 꽂힌 책장이 있다. 『내 몸 사용 설명서』 『우먼 바디 포 라이프』 『기적의 휘트니스 30분』 『달리기와 부상의 비밀, 발』…. 혹시 ‘몸짱 아줌마’의 책꽂이?  또 이런 책장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죽음 앞의 인간』『죽음과 죽어감』『떠남 혹은 없어짐』…. 이건 우울증 환자의 책장?


둘 다 내 책장의 이웃 칸에 나란히 꽂힌 책들이다. 나는 몸짱 아줌마도, 우울증 환자도 아니다. 몸 쓰는 일, 죽음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에 몰두했던 한때의 관심사, 변덕스러운 취향의 흔적이 책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이다. 누군가 둘 중 하나의 리스트만 갖고 내 취향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려 든다면 몹시 억울할 것이다. 소지품이나 생활공간의 특성으로 사람 성향을 판별하는 심리 기법인 ‘스누핑(snooping)’에서도 특정 단서가 늘 특정 성격을 가리킨다는 따위의 완벽한 답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기본 전제다.


    사진출처=한겨레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씨 서재의 책들이 요즘 구설에 올랐다. 그가 문화방송 ‘피디수첩’과 인터뷰할 때 배경에 비친 책들이 『한국 민중사』『현대 북한의 이해』『혁명의 사회이론』등 평범하지 않아 문제라는 거다. 글쎄다. 스누핑 기법을 설명한 베스트셀러 『스눕』을 읽고 난 뒤 내 눈엔 그 책장이 이렇게 보였다.
‘서재 전체의 10분의 1도 안될 분량의 책 제목만으론 현재 정치 성향은 알 수 없고, 출간된 지 죄다 10년이 넘는 책들을 주제별로 꽂아놓은 걸 보면 꼼꼼한 장서가인데 그 사이에 주제와 관련 없는 『슬픈 열대』가 뜬금없이 끼어있는 걸로 봐선 자주 이용하지 않는 책장이 아닐까….’ 

엉터리 스누핑은 이쯤에서 접고, 의사가 경제평론가가 되고 공무원이 소설가가 되는 멀티태스킹의 시대에 기업인이 합법적으로 출판된 역사, 사회과학 책 좀 읽었기로서니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공들여 화면 흐림 처리를 한 ‘피디수첩’도 괜한 짓을 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제목이 확인된 책 10권 남짓을 갖고 한나라당 대변인처럼 그가 “특정 이념에 깊이 빠진 편향된 사고의 소유자”라고 단정 짓는 판단의 신속함이다.


면밀한 관찰과 이해의 수고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비합리적 신념의 형성 과정은 사소한 단서가 발견되면 이를 근거로 전체가 참이라고 판단하는 비약 논법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도 마녀사냥이 흔한 남태평양의 파푸아뉴기니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 인류학자 브루스 노프트(Bruce Knauft)가 80년대에 연구한 게부시(Gebusi)족의 마녀 조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마녀는 나뭇가지 뭉치로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조사 대상자의 거주지 근처에서 나뭇가지 뭉치가 발견된다. 그럼 그 사람은 마녀다. 나뭇가지 뭉치야 숲속 공터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데도 이 허술한 증거를 들어 게부시 족은 숱한 사람을 처형했다. 어리석다고? 이들의 믿음과 “좌편향인 사람은 ‘혁명’ ‘북한’ 관련 책을 읽는데, 김 씨의 책장에서 그런 책들이 발견됐으니 그는 좌편향”이라는 논리에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령 김 씨가 서재 전체를 혁명, 북한에 대한 책으로 다 채웠다고 해도 그가 관심 분야가 협소하고 지루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줄지언정 불법사찰을 받아 마땅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취향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건 야한 옷차림의 여자는 성추행을 당할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해자에게 범죄 발생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법사찰만큼이나 비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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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한겨레 오피니언사이트 훅에 실린 글 입니다 (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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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부 서약(Giving Pledge)’운동을 시작한 미국 갑부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부부에 대한 칭찬이 국내에서도 자자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고 권유하는 운동을 일으킨 ‘착한 부자’들에 대한 놀라움과 부러움이 앞섰고, 한국 부자들은 뭐하느냐는 질책이 뒤따랐다. 어느 신문 사설은 “미국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도움으로써 자기가 사는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왔다”면서 ‘기부 서약’을 체제수호 운동으로 해석하는 기발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착한 부자라는 칭찬이나 체제수호에 앞장서는 애국적 부자라는 칭찬이나 그 전제는 이들의 기부가 이기심을 초월하는 이타적 행위라는 것이다. 개인 재산을 아낌없이 투척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슬그머니 어깃장을 놓는 의문이 든다. 이들의 기부가 순전히 이타적 동기에 의한 것일까? 미국 부자들은 유난히 착하기 때문에 그런 운동을 하는 걸까?

더 많이 갖는 것이 부(富)라는 관념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인류학자들의 현지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영국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20세기 초반 뉴기니 동북부의 군도인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쿨라 링(Kula Ring)이라는 독특한 교환제도를 연구했는데, 이는 조개팔찌와 조개목걸이를 반대방향으로 끊임없이 순환시키며 교역을 하는 경제체제다. 쿨라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파트너에게 더 많은 선물을 주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더 많이 주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니, 이들에겐 소유욕이 없는 걸까? 아니다. 이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소유욕이 강하며 부를 사회적 지위, 개인적 미덕으로 간주한다. 다만 부의 개념이 다를 뿐이다. 이들에게 부의 징표는 관대함이다. 경쟁과 갈등, 반목은 이들 사회에서도 여전하지만 이들은 누가 가장 관대한가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상대를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과시하는 것이다.

더 많이 주는 것이 부와 세력의 과시 수단인 것은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미치광이 같은 증여의 잔치라 할 포틀래치(Potlatch)를 수시로 벌였는데 어떤 추장은 상대를 끽소리 못하게 압도하려고 가장 비싼 동판을 부숴버리거나 물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추장은 재산을 소비하거나 나눠줌으로써 ‘명성의 그림자’로 다른 사람들을 뒤덮고 자존심을 꺾어버릴 때에만 자신의 부를 증명할 수 있다. 더 많이 주어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며, 이득을 얻기 위해 주는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콰키우틀 족은 포틀래치를 주지 않는 신화 상의 추장을 ‘썩은 얼굴’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위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얼굴이자 인격인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더 주려고 안달했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이와 같은 경쟁적 증여체계를 분석하면서 명예 관념이 이들 사회를 휩쓰는 가치임을 주목했다. “원시 부족에게서도 명예문제는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민감한 문제”이며 “인간은 서명하는 것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거는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모스의 분석이다.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관대함과 경쟁, 그리고 명예에 대한 추구. 게이츠와 버핏 부부의 기부 운동에도 비슷한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멜린다 게이츠는 ‘포츈’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부 운동을 독려하고 참여하는 억만장자들 사이에 “군중심리(crowd mentality)”가 있다고 말했다. 몇 사람이 시동을 걸어 기부가 명예로운 일이 되면 “남들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는 또래 압박감(peer pressure), 관대함의 경쟁심리가 억만장자들의 기부 운동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적 기부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증명하고 명예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국 억만장자들의 기부 운동은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원시 부족들의 증여의 동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거액의 기부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사회적 영향력이 어떨 지는 ‘철강왕’인 앤드류 카네기가 미국 역사상 가장 가혹했던 노조 탄압보다 기부 문화의 선구자로 오늘날 더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한국 재벌들은 왜 그렇게 착하지 못하냐고 너무 탓할 일도 아니다. ‘주는 것이 부(富)’가 되려면 재벌의 인격수양보다 주는 일이 명예가 되고 축적보다 고귀한 가치로 간주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한국 재벌들이 기부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고 부자인 것 그 자체로 존경받는 사회, 편법으로 재산을 불리고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이 툭하면 ‘존경할만한 부자’ 1위에 오르는 사회인데 재벌들이 뭐가 아쉬워 기부를 통해 명예를 추구하고 사회적 존재임을 증명하려 들겠는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저임금을 협상하면서 달랑 10원의 인상안을 내놓았던 '사장님들’을 보면 나눔과 기부는커녕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없어 보인다. ‘착한 부자’가 나오려면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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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