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신문을 보고 30여분만에 우다다다 쓴 성명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수정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조간신문들 훑어보니, 이젠 이런 사건 벌어져도 사람들이 그냥 그런갑다 하고 마는 모양이다. 경향신문, 한국일보, 동아일보 세 신문 제외하곤 아예 사건을 기사로 다루지도 않았다. ㅠ

한국은 정말 아이들에게 가혹한 땅이다. "여성, 최후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동, 최후의 식민지"다.

이런 상황이 과연 바뀌기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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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를 범죄로 규정하고 부모 체벌 금지를 위한 법적 조치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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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아동 체벌 사망 사건에 대한 세이브더칠드런의 입장

2 21일 인천에서 초등학교 2학년인 김 모군(8)이 부모에게 맞아 숨진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세이브더칠드런은훈육을 앞세운 부모의 폭력으로 아동이 숨진 사건에 비통함을 금지 못하며, 한국이 과연 문명국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모가 아이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이유로 때리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초에도 우는 버릇을 고치겠다며 부모가 아이를 폭행하다 숨지게 하는 등의 사망 사건이 잇따랐다. 그러나 반짝 관심이 쏠린 뒤 곧 잊혔다. 당시 영국에서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 전체가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복지 시스템을 전면 재검토했다는 보도가 잇따랐으나, 국내에선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입법과 사법, 행정을 책임지는 당국이 나서서 우리 사회가 그나마 갖고 있는 보호망의 어디에 문제가 있기에 이런 일이 계속되는지 점검하고 개선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가?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부모를 비난한 뒤 잊어버린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저지른 예외적 사건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부모의 체벌과 학대는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된 아동 학대 사건의 82%는 부모가 가해자다.
그러나 현행 형법 상 존속살해, 존속상해는 가중처벌의 대상이면서 영아살해를 제외한 아동학대는 범죄로 규정조차 되어 있지 않다. 아동복지법에 학대 금지 조항이 있으나 정의가 모호하며 범죄 요건에 대한 규정이 아니므로, 아동을 학대한 부모가 이 법을 근거로 처벌받지도 않는다.
또한 아동복지법은 아동학대가 의심되면 누구나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 군의 사건에서도 이웃들의 증언은 학대 신고로 끔찍한 일을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다. 아동학대가 신고해야 하는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더 나아가 부모가 자녀를 때리는 것은 훈육이고사랑의 매는 불가피하다는 인식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일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아동이 잘못했을 때 다스리는 소위사랑의 매와 폭행치사는 그 본질상 다르지 않다. 많은 연구들은 심각한 폭력이 가벼운 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사랑의 매는 무엇보다 사랑하면 폭력을 써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하다. 부모의 아동 폭행치사사건이 더 이상 비정상적 부모의 예외적 행동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집안에서의 아동 체벌,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정부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동보호 관련 사회적 시스템의 느슨한 부분을 찾아내어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기를 촉구한다. 아동에 대한 폭력을 형법상 범죄로 규정하고, 부모의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기를 촉구한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그 집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쉬쉬하지 말고 아동폭력을 적극적으로 신고하도록 대대적 교육에 나서기를 촉구한다. 이번 사건처럼 문명국의 시민임이 부끄러운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모든 제도적 대책 마련에 나서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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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새는 움막집엔 어린 육남매가...

난민촌없는 피난생활, 살인적 집세에 울고 혹한에 덜덜

시리아 내전 21개월...민간인 참혹한 나날

사진 잘 나오는 '난민 풍경' 없어 관심 덜받는 듯

 

위의 기사들 취재 주선을 위해 한겨레신문 기자와 함께 12월 중순, 레바논에 다녀왔다. 2년 가까이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하여 레바논에 온 난민들의 생활상이 어떤지, 세이브더칠드런은 어떤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을 취재하러 갔던 길. 실태는 기사가 상세하게 전하고 있으니, 여기선 내 단편적 인상만 끼적이면..... 

 

# 맨 위의 기사에 게재된 사진을 보면 아이들이 맨발이다. 북부 레바논과 베카 계곡의 난민들 거주지를 돌면서 계속 유심히 보았는데, 한겨울인데도 예외 없이 맨발이었다. 돌아온 뒤에도 시리아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이들의 맨발...

 

 

 

아이들이 맨발로 돌아다녀도, 예외 없이 남의 비극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이라 할 수도 없고 거적때기를 이어 붙인 가건물을 지어놓고 오갈 데 없는 난민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사람들.

한 번은 난민들에게 가건물을 지어 잘 곳을 제공하는 목수의 작업장을 지나치게 됐는데, 외지인인 우리와 이야기할 때 목수는 "하늘의 뜻"에 따라 이런 선행을 한다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이 지역에 상주하는 우리 단체 필드 매니저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주의를 줬다. 난민의 증가를 돈 벌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수혜자가 필요한 물품을 사기를 쳐서 추가로 받아와 가건물을 짓고, 난민이 임대료를 내지 않으면 가차없이 길거리로 쫓아낸단다.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를 받아내고 돈을 못낼 경우 바로 쫓아내니 아파트에서 가건물로, 움막으로, 끝내는 길거리로 점점 하락하는 난민들이 많다고 한다. 소위 '선행'의 껍질을 까보면 냄새 나는 탐욕만 가득한 이런 경우가 레바논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어디 한둘이겠냐만...... 참 씁쓸했던 장면. 


더불어 떠오르는 아주 오래된 질문. 구조적 장벽과 그 장벽에 기생하는 착취자들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질문...20대 때는 단호하게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생각이 점점 엷어졌다. 구조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 때문이기도 하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은? 글쎄다. 나보다 먼저 구호개발단체에서 10여년간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현장에 가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던 그는 왜 비참함이 사라지지 않는가 고민하다보니, 쏟아지는 오물을 닦아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 오물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손모가지를 비틀든, 차단하는 방법을 연구하든 해야지 이대로는 안되겠다면서 공부를 하러 떠났다. 

둘째날 베카 계곡의 난민들을 만나러 이동하던 차 안에서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모금을 해서 현장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일하다보면, 아주 구체적인 삶의 요구에 응답한다는 보람도 있으나 동시에 한 사람의 삶, 한 마을의 삶이 장기적으로 나아지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에 대한 회의도 질기게 따라다닌다. 그래서 '구조'의 문제를 다루라고 내가 일하는 advocacy 부서를 만들었고, 나 같은 사람도 뽑았겠지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 레바논은 여행유의지역, 특히 북부는 여행제한지역이라 미리 혈액형까지 신고해야 했고 바짝 긴장하고 갔는데, 수도 베이루트는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중동의 파리'라 불린다더니, 대형 쇼핑몰들이 있고 입간판은 서울 못지않게 화려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섰다. 음식도 맛있어서 중동의 유명한 요리사들 중엔 레바논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 돌아오는 날, 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베이루트에서 1시간 거리인 비블로스에 다녀왔다. 사람이 계속 거주한 도시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도시. 책이라는 뜻의 도시 이름 때문에 호감을 가질 준비가 돼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 한적하고 평화로워 아주 마음에 든다. 

이곳에서 알파벳의 기원인 페니키아어가 생겨났는데, 알파벳에 대응하는 철자를 보고 써본 페니키아어 내 이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움직이면서 베껴쓰느라 내 이름은 엉망이지만 조형미가 좋은 글자다. 관광객들에게 페니키아어로 이름을 써주는 기념품 샵 같은 걸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분쟁지역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겠지만.

 


비블로스도 그렇고, 베이루트도 그렇고, 지중해에 면한 레바논의 도시들은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웠다. 신산스럽게 살아가는 난민들을 만나고 온 바로 다음 날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되는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

베이루트의 해변가에선 층층바위 위에 사람들이 하릴없이 앉아 해지는 풍경을 구경했다. 비교적 형편이 좋아 북부의 가난한 마을 대신 수도의 친척집에 머문다는 시리아 난민 가족도 만났다. 아름다움이 그들에게도 위안이 될까... 그럴 거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한 구절을 읽어보면 더더욱.

"꽃보다는 샐러드용 채소라도 심으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녀가 묻자 주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요. 아름다운 것은 유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익해요."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아마 더 유익할 거요."


- "레미제라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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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4월 둘째 주, 네팔에 다녀왔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다시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는 시골인 반케 지역 나우바스타 마을에 새로 지은 초등학교를 보러 나선 길. 내가 일하는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의 소개로 이 학교를 지은 한국의 후원자를 모시고 다녀왔다.

 

내게는 특별했던 출장이다. 모시고 간 한국의 후원자가 내 부모님이셨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5년 전 세상을 뜬 내 남동생이 후원자이다. 아들이 남긴 유산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이 돈을 의미 있게 쓸 곳을 찾고 싶어 하셨고, 내가 일하는 단체를 통해 연이 닿아 네팔에 초등학교를 지었다

 

처음 소개를 받을 때부터 이 학교는 여러 모로 마음이 쓰였다. 마을 사람들은 정부 군과 마오이스트 사이에 10년 가량 이어진 내전을 피해 도망쳐 온 이주민들이다. 카스트 제도의 맨밑바닥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인데다 이주민인 탓에, 처음엔 아이들의 출생등록증도 받지 못해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네 명 중 한 명 꼴로 문맹인 마을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했다. 주민들이 직접 돈을 모아 짚과 흙으로 허름한 학교를 짓고 교육청의 허가를 받아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흙집은 비가 오면 지붕이 새고, 화장실도, 식수 시설도 없었다. 그나마 2학년까지밖에 없어 3학년이 되면 3km나 떨어진 옆 마을 학교로 걸어 다녀야 했다.

이런 학교에 부모님은 1~3학년 교실 3개와 교무실 1, 화장실과 물탱크, 식수시설, 시소와 미끄럼틀을 갖춘 놀이터를 짓고 교육 자재를 선물했다. 아래 사진 왼쪽이 이전의 흙집 학교, 오른쪽이 부모님의 후원으로 새로 지은 학교 건물이다.

 

 

아래는 새로 지은 학교의 교실과 놀이터 풍경.

 

학교 완공 소식을 듣고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직접 보러 가실 계획까진 없었다. 아버지는 생색내기 방문은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셨고, 어머니는 몸이 편찮으셨다. 그런데 사양하고 말기엔, 후원자를 만나고 싶다는 주민들의 요청이 내가 약간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간곡했다. 주민들을 직접 만나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너져 가는 흙집 학교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판단한 주민들은 새 학교를 지어줄 후원자를 찾으려고 흙집 사진을 찍어 도시로 나가 여러 단체나 기업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외진 곳이고 최하층 계급이라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게 하기를 1년 반. 마침내 먼 나라의 낯선 후원자를 만난 거였다. 설움에 북받쳐 그간의 과정을 설명해주던 마을 아저씨의 격정적인 말투와 몸짓만 보아도 1년 반의 고생이 짐작 가고도 남았다. 이런 경우가 이례적이었던지, 학교 준공식엔 네팔의 4개 매체가 취재를 하러 와서 부모님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학교 준공식은 아예 마을 잔치였다. 주민들이 환영의 뜻으로 앞다퉈 이마에 붉은 염료인 티카를 발라주는 바람에, 부모님 얼굴은 붉은 티카 범벅이 되었다. 축하 인사를 하던 아버지는 아래 대목을 읽던 도중 목이 메었던지 자주 말씀을 멈추셨다.

 

"지금 이렇게 학교 신축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우리가 왔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아들의 심부름을 대신 한 것입니다. 이 학교의 신축 기금을 후원한 김인배는 우리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아들 김인배는 4 5개월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중략>...우리 아들 김인배도 이렇게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네팔의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을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축사를 영어->네팔어로 통역해주던 세이브더칠드런 지역사무소장은 위의 대목을 통역하던 도중 끝내 울어버렸다. 나중에 자리로 돌아와 내게 "통역이 차분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말할 때에도 그의 얼굴은 눈물범벅인 채였다.

 

위의 사진은 아이들의 축하 공연 (왼쪽), 준공식에 모인 사람들과 기념 촬영 

 

동생이 지은 학교를 직접 본 것이상으로 뿌듯한 사실은 이 학교가 교육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된 거였다. 지역 교육청이 다음달에 1개 교실을 더 짓고 내년에 1개를 더 지어 5학년 (네팔의 초등학교는 5학년제다) 까지 학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사들 급여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지역의 학교였는데, 동생의 후원이 학교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배우지 못하면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학교라서 운영위원회에 주민들의 참여도도 높았다. 새 건물을 지을 때에도 주민들은 학교 건축위원회와 구매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주민들 스스로 '우리 학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그게 보기 좋았다.

 

이 학교의 이름인 스리딜람은 정부 군과 마오이스트의 내전 와중에 희생된 아이인 딜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딜람과 김인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소년과 청년. 그 둘의 마음이 만나 127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가 지어졌다. 세상의 일들은 이렇게 연결되기도 한다. 여행 기간 내내 해열제와 진통제를 먹으며 버티던 어머니는 학교와 아이들을 보고 계속 "참 감사하다"고 하셨다. 이런 인연에, 나도 깊이 머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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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 홍대앞 카페 슬로비에서 열었던 행사 "초콜릿보다 밥이다" (소개 글 참조) 가 잘 끝났습니다. 며칠 전, 블로그에 행사 초청 글을 올렸던 터라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들려드리려고 간단 후기 올립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 오신 분은 없었습니다. 흑~ ㅠ.ㅠ)
이주여성 지원모임인 '에코팜므'에서 활동하는 콩고의 난민 여성 뇨타가 콩고의 전통요리인 뽄두와 푸푸를 설명하고 직접 만들어 참가자 모두가 시식하는 자리를 가졌고요. 국제개발NGO인 세이브더칠드런이 전세계에서 동시에 발간한 영양실조에 대한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함께 들으며 식량위기, 영양실조의 문제점, 해결방안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카페 슬로비가 제공한 '그때그때 밥상'으로 함께 저녁을 먹었구요. 요리로 인생을 바꾸려는 청소년들의 모임인 '영 셰프'가 아름다운 커피의 공정무역 초콜릿으로 생초콜릿을 만들어 디저트로 선물했어요. 밸런타인데이에 이만하면 괜찮은 경험이죠? ^^

 

이번 행사는 식량이 넘쳐나는데도 매 시간 300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현실의 심각성을 말하고 싶어서 준비한 것입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저개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흔한 고정관념대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연결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저 동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지속적 연대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내전이나 기후변화,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인한 영양실조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평온한 나날일 때 그곳의 밥상은 어떨까,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까...이런 이야기를 음식을 통해 함께 나누고, 평온한 밥상과 위기상황일 때의 밥상을 대비해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콩고 전통 음식을 만들어주신 뇨타는 뽄두와 푸푸를 형편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 먹는지를 설명해주고, 평화로운 시절 뽄두를 빻는 여성의 그림 (위 사진 오른쪽) 을 그려와 보여주었습니다. 곡식 낟알을 가릴 때 부르는 노동요도 불러주셨고, 앵콜 요청에 화답하여 케냐 지라니 합창단의 노래로 유명해진 '잠바 송'도 잠깐 불러주셨지요. 콩고 전통 음식 뿐 아니라 식량위기 상황일 때 카사바 가루를 물에 풀어 먹는 죽도 함께 끓여서 참가자들이 두 가지 음식을 비교해서 시식해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행사 진행하느라 저는 정작 콩고 음식은 맛을 보지도 못했네요. -.-;;; 짧은 시간이었고, 준비도 미숙했지만 밥상을 차린 저로서는 이런 자리를 만들어본 것이 뿌듯합니다. (이것도 깔대기인가요? ^^;) 평소 맡은 일이 아닌데도 기꺼이 소매 걷어부치고 도와준 후배들도 예쁘고요. 
모쪼록 오늘 참가하신 분들이 색다른 음식을 맛본 경험, 식량이 남아도는데도 많은 이들이 굶주리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함께, 료타가 그린 평온한 시절의 그림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소소한 평화를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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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구호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세계 곳곳의 재난, 위기로 인해 아이들이 곤경에 빠진 상황을 알리는 이메일을 수시로 받는다. 그런 소식을 거의 매일 듣다 보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동아프리카를 휩쓴 최악의 식량위기로 케냐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에서는 긴급구호가 필요한 사람이 12백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기아와 물 부족 상태에 시달리고, 중증영양실조로 케냐의 다답 난민캠프 보건시설에 들어온 아이만 해도 올 들어 13천명이 넘는다. 위기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정부와 국제원조기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런가하면 파키스탄과 인도, 방글라데시에서는 대규모 홍수의 여파로, 리비아에서는 내전의 영향으로 집과 가족을 잃고 떠도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이 글을 쓰는 28일엔 네팔에서 열흘 전 발생한 강진으로 피해 지역의 학교가 대부분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지진에 우기 홍수까지 겹쳐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사방이 아비규환이지만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다수의 구호단체들이 여름부터 동아프리카 돕기 시동을 걸었지만 반응이 저조하다.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둔감해졌기 때문일까? 일대일 결연으로 해외 어린이를 돕겠다는 사람들은 꾸준히 늘어나는데?


대규모 재난엔 감성에 호소하는 ‘인식 가능 희생자 효과’가 약해서 그럴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희생자 없이 ‘통계적 생명’으로 간주되기 십상인 대규모 재난의 피해자 구하기엔 사람들이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올해 3월 일본 대지진 때 정부가 난색을 표할 정도로 지원이 쏟아진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동아프리카의 위기 등이 이른바 ‘조용한 재난 (Silent Emergency)’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들에겐 조용할 리 없지만 이 재난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다. 사실 세계를 놀라게 한 초대형 자연재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긴급구호 상황, 특히 분쟁이나 기근으로 인한 재난에 언론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보통 긴급구호 상황이 발생하면 그 직후 모금을 시작하는데, 여론의 주목도에 따라 규모에 큰 차이가 난다. 세이브더칠드런 영국이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태 때 2억 원을 모금하는 데 들인 시간은 단 하루였지만 지난해 니제르 식량위기가 발생했을 땐 같은 금액을 모으기까지 49일이 걸렸다. 긴급구호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있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재난 발생 직후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긴급구호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대상은 어린이들인데, 재난이 발생한지 36시간이 지나면 생존율이 절반으로, 72시간이 지나면 10% 미만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조용한 재난’ 상황일 때 이 10% 미만에 처한 아이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난다.


극심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재해 발생 빈도가 급증한 상황에서 이제 긴급구호는 ‘일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If)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 것인가’(When)의 문제가 되었다. 현재 분쟁과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 150명 중 한 명꼴인데 그 중 절반은 아이들이다.


긴급구호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세이브더칠드런 영국, 호주, 이탈리아 등에서는 미리 기금을 적립해두었다가 자연재해나 식량위기 등이 발생할 때 피해를 입은 어린이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신속한 피해 복구와 재활재건 및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긴급구호아동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같은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곳간을 미리 채워 미래의 재난에 대비하자는 긴급구호아동기금은 사태 발생 직후의 여론과 감성적 호소에 크게 좌우되는 기존 관행으로 보면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해결하고 자원이 효율적으로 쓰이게 하려면 어떤 방식이 나은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긴급구호도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때가 되었다.

오늘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긴급구호아동기금 참여하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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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신문에 실린 것보다 살짝 긴 원문입니다.

*   *   *



얼마 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A국출신 여성 B씨가 아이를 낳았다. 낯선 곳에서 살아갈 결심을 한 난민 신청자이지만 아이는 언젠가 고국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 B씨는 아이의 국적 취득 절차를 밟기로 했다. 한국엔 A국 대사관이 없어서 가까운 나라 주재 대사관에 연락해야 한다. 여기까지, 뭐 별 일 아닌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난민 신청자가 본국 대사관에 연락해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민은 정치적 견해, 종교나 인종 또는 특수한 집단적 정체성으로 인해 가해지는 억압과 박해를 피해 자신의 국가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다. 탄압의 주체가 정부가 아닌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난민 신청자들이 본국 대사관에 연락하는 일은 탈출 과정에서 수없이 갈등했을 신념 문제를 없던 것으로 한 채 “나 여기 있소”하고 자진 출두하는 거나 마찬가지의 심리적 부담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B씨는 아이를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한 것인데, 그 뒤의 과정은 쉬웠을까?

이웃나라 주재 A국 대사관은 B씨의 아이가 한국 땅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정부의 ‘공문서’를 요구하면서 국적 부여를 거부했다. 한국 정부는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 아니면 아이의 출생 신고를 받지도 않거니와 출생 증명을 발급해주지 않는다. 조산원에서 떼어준 서류는 외국에까지 가서 한 아이의 출생을 증명하는 공적인 효력이 없다. 결국 B씨를 돕던 단체가 외국 아이의 출생 신고를 받지 않는 한국 법을 설명하면서 지원에 나섰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출생 신고와 등록은 그야말로 존재에 대한 증거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 말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대해 법적 인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출생에 대한 공적인 기록이 없는 아이는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초적 권리조차 누리기 어렵다. 이 때문에 유엔아동권리협약 7조는 모든 아이가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명시해 두었다. 난민 신청자이든, 이주민이든, 부모가 해당 국가의 국적권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아이들은 태어난 지역의 법적 관할권을 지닌 국가에 등록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자국 대사관에 연락하기 여의치 않은 난민 신청자가 아이를 낳으면 이들은 피와 살로 현존하는 존재인데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된다. 아이는 무국적자가 되고 현재 국내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법적 절차가 없다.

당장은 국적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더라도, 출생을 증명해주는 ‘공문서’가 없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도 무국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의료, 교육 서비스를 받거나 부당한 징병과 범죄 기소로부터 보호받고 결혼하거나 운전면허증을 갖고 투표하고 일을 하면서 신용을 인정받을 경로 자체를 근원적으로 차단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한 아이가 어느 땅에서,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부가 기록해주는 것은 한국 정부가 속인주의에 의거한 현행 국적법을 바꾸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 세이브더칠드런,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위한 NGO 그룹 등 12개 국제 어린이, 난민 관련 인권단체는 공동 성명을 내고 모든 국가에서 모든 아이들에 대한 출생 등록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출생 등록은 인권 실현의 가장 중요한 선결 요건이며 아이를 폭력과 착취,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첫 번째 단계다. 하지만 유엔난민기구의 2009년 기초조사에 따르면 당시 103개 난민 캠프에서 태어난 신생아 중 공식적인 출생 증명을 발급받는 아이는 절반도 안 되는 46%에 불과했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에 체류 중인 난민 신청자는 2천915명이고 이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222명이다. 난민 신청은 꾸준히 늘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들에게 가혹한 땅이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OECD 30개국 평균 난민보호비율은 인구 1천명당 2명이지만 한국은 인구 100만명당 2명에 불과하다. 억압과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차별과 배제뿐이다. 아주 냉정하게 말해 어른은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른 결정을 고난으로 감당한다고 쳐도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에게까지 그만큼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땅에서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은 출생 등록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영유아 때 받아야 하는 필수 예방접종을 포함해 어떤 종류의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한다. 한 사회의 수준을 보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자의 삶을 보라고 했다던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이 그들이다.

사진 ⓒ Save the Children = 난민 캠프의 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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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공지 하나.
제 책 [내 인생이다]를 주제로 독자와의 만남 갖습니다. 
같은 주제로 강남의 크링 시네마에서 11월과 12월 두 차례 열릴 예정인데요. 다행히 이 두 번의 만남은 저 혼자 하지 않고 제 책에 등장하신 분과 함께 해요.
11월25일에는 국제개발NGO인 ‘세이브더칠드런최혜정 부장님과 함께 합니다. 저도 10월부터 이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옆구리를 쿡쿡 찌르신 분이십니다 ^^
그래서 어쩌다보니 11월엔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는 두 언니가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최혜정 부장님이 워낙 말씀도 잘하고 경험이 많으셔서 인생전환, 새로운 설계에 대해 좋은 이야기 들려주실 수 있을 겁니다.
행사 안내, 신청 페이지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알라딘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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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2] 최혜정- 광고인에서 국제NGO 실무자로


Before: 레오버넷코리아 제작이사,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

After: 국제NGO ‘세이브 더 칠드런’ 자원개발부장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평화’가 떠올라요. 6살 때 낮잠을 자다 깼는데 부엌에선 엄마가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비 온 뒤 적막하고 깨끗한 마당에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던 풍경. 그게 기억에 선명한 ‘행복’의 이미지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란 새로운 모험과의 조우를 뜻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전부 다르니까 ‘나만의 행복’이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최혜정 부장(48)의 표정은 뭘 더할 수도 없을 만큼 충만해 보였다.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을 지내는 등 22년간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그녀는 2007년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뒤인 2008년 세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고액 연봉과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박봉의 NGO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벼락같은 계시로 인생항로를 바꾼 것도 아니고 대안적 삶을 찾은 것도 아니다”면서 “원래 살고 싶었던 방향을 따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와 2002년 신문에 실린 그녀의 기사를 찾아보았다.
당시 레오버넷 코리아 제작이사였던 그녀는 맥도널드 광고 ‘목숨걸지 맙시다’로 세계 3대 광고제 중 칸 광고제 은사자상, 뉴욕 광고페스티벌 금상을 휩쓸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인터뷰에서도 광고는 “인간의 진실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NGO를 선택한 이유로 “사람과의 접점에 서 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7년 전에도 그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던 사람 같았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자기 안의 질문을 따라 가기


40대 초반부터 그녀는 “이게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하는 질문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광고업계에서도 물론 성취감을 느꼈지만 본질적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또 다른 문제 같았어요.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사는가, 내 속도감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질문을 품게 만든 충격적 사건이 2004년에 있었다. 그해 여름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 장애인 교회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인솔자인 그녀가 방문자를 맞으러 문 앞에 서 있는데 교회 담당자가 오더니 갑자기 “여기 말고 부엌에 가 있는 게 어때요?”하는 거였다.

“내 얼굴이 너무 긴장되고 어두워서 오는 사람들이 불편하겠다나요. 얼떨결에 부엌으로 쫓겨나 수십 명 분의 불고기를 볶으며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좀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명상 심리검사 코칭 등 온갖 시도를 해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 ‘링크’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같은 책을 읽으며 다른 시각과 심지를 갖추려 노력했다. “앞으로 20년 더 내 인생을 갖고 뭘 하고 싶은가”를 오래 고민하던 와중에 학창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치유를 겸한 대안학교를 해보면 좋겠다고도 막연하게 꿈꾸었다.


“회복이 아니라 해독을 위해 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2007년 5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가는대로 관심사를 따라 혼자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신문에서 희망제작소의 ‘제1회 행복설계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이 아카데미를 마친 뒤 간사의 우연한 소개로 2008년 5월 ‘세이브 더 칠드런’과 연이 닿게 됐다.

“광고회사를 그만둘 땐 NGO에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대안학교를 꿈꾸며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그녀의 꿈과 크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다른 길로 향한 문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모서리에서 열렸다.


● 전환의 때를 어떻게 알 것인가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해도 지금이 좋을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겁이 나거나 생계는 어떻게 하나 등등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떠오르고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죠. 제 경험으론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져요. ‘다음에 뭘 하지?’하는 질문에도 ‘6개월간 찾아보자’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아직 때가 아니라면 “장, 단점 파악 등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고 무보수든 주경야독을 하든 원하는 일에 발을 슬쩍 담가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하지만 그 ‘원하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뭘 하고 싶은지가 단 번에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요?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그리 많을까요?”하고 반문했다.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너듯 연결하면서 살아도 되잖아요. 두서없이 여러 생각이 든다면 조금씩 맛을 보고 아닌 걸 지워나가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뭘 하다가 그만두면 그만큼 인생과 시간의 낭비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언젠가는 경험들이 연결되어 쓰이게 되지요. 전 늘 ‘어디로 가든 크게 보면 내 길이겠지’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 길 안에서 움직일 뿐이지 내가 갑자기 영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 다른 사람, 다른 집단과 네트워킹하기


광고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그녀는 일부러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약속의 70% 정도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스님 목사 신부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포럼, 커뮤니티, 광고회사 고객으로 모셨던 어른들을 찾아갔다. 무턱대고 “제가 어떻게 보이나요?”하는 질문도 숱하게 던졌다.


“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늘 보는 직장 동료는 같은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이어서 별 도움이 안돼요. 다른 클러스터, 다른 시각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관심사를 좇다보니 말 그대로 “6개월 만에 100명을 알게 되더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그녀의 관심을 끈 분야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인터넷을 뒤지고 학회지를 구독하고 강연을 찾아가면서 점점 네트워킹을 넓혀 갔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길 위에 서게 되었지만 처음에 희망제작소에 이끌린 것도 이 관심사 때문이었다.


● 계속 성장하기


NGO에서 일하면서 수입은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고 출장지는 파리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보상을 얻는다고 했다.


“이 돈이 가면 한 아이가 웃는다는 그 연결선이 한 눈에, 명확하게 보이니까 그것만큼 큰 보상이 없지요.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한 모자 뜨기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동봉해 보낸 편지를 볼 때마다 숱하게 눈물이 났는데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다고 실감했어요. 그렇게 긍정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다른 데에서 얻기 어려운 보상이죠.”


10년 쯤 뒤에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계획이나 결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미래 아닌가요? 나는 여기서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그 마음에 진정성만 있다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 에도 동시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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