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2.03.16 산티아고, 파타고니아, 여기 (6)
  2. 2010.08.19 산티아고 책 관련 강좌 열립니다 (20)
  3. 2008.08.17 소시지 기계 (18)
  4. 2008.01.19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4)
  5. 2007.07.29 느긋하게 걸어라 (13)

백만 년만의 잡담 포스팅.

 

# 2월말에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는 공사를 했는데, 젤 맘에 드는 건 이 액자를 제자리에 걸어둘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34일간 걸어간 끝에 산티아고에서 받은 순례자 증서. 졸업사진이고 상장이고 예전 결혼사진이고 뭐고 오로지 나하고만 관련된 걸 내 손으로 액자에 넣어 벽에 붙여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파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저 액자를 본다. 4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액자를 볼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구불구불한 길. 사방을 둘러봐도 풀과 나무 뿐인 평원에서부터 자궁처럼 깊은 숲길까지. 언제 다시 갈 수 있게 될까. 잊지 못할 길. 지금도 늘 걷고 있는 길.

 

이번에 공사 하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20권씩 포장한 책 11박스를 팔았다. 한 권에 2천원 이상 쳐주는 책만 알라딘에 팔고, 그 미만이거나 몹시 낡았거나 누구에게 읽으라 권할만하지 않은 책들은 kg 단위로 고물상에 팔고 버리기도 했으니, 이번에 처분한 책만 500권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너무 많다.

읽지 않은 책들도 꽤 된다. 공사만 끝나면, 번역만 끝나면, 저 책들을 다 읽어주리라 다짐했는데...... 공사도 끝내고, 번역도 끝낸 내 손에 어제까지 들려있던 책은 엉뚱하게도 도서관에서 빌린 루이스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였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 읽고 나니 그 황량한 땅에 몹시 가고 싶어졌다아무 곳도 아닌 곳을 향해 가는 여행. 지구상에서 행복한 존재가 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절대 속임수에는 속지 않는 뻥쟁이들의 땅, 아름답고 불가능한 무정부주의 혁명을 위해 은행을 털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최후를 맞은 곳. 어젯밤에 트위터에 파타고니아에 대한 낙서를 올렸더니 파타고니아에 세 번 다녀왔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트위터 말고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분이지만, 성미 급한 나답게 이달 안에 만나서 파타고니아 이야기를 듣기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적어도 2주 동안은 마음 설렐 일이 생겼다. ^___^

 

# 말과 글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말과 글에 대해 갖는 불신이 깊다. '전업' 글쟁이를 하겠노라 맘 먹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다. 아주 사소한 변화라도 직접 만들어내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잘 알지 못하던 비영리단체에 들어가 1년 반 째 일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이 온통 '사회적'인 이슈, 공익과 관련된 읽을 거리, 쓸 거리, 그 이유로 만날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잘 견디질 못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므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나, MBTI 검사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혼자 있어야 충전되는 극단적 내향형이다. (파타고니아 다녀온 사람과 만날 약속을 서둘러 잡아버렸다는 위의 낙서 읽고 나면, 소가 풀 뜯는 소리 하고 있네, 하겠지만...) 입장을 갖고 주장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어떨 땐 기자를 할 때보다 에너지 소모가 더 심하다.
엊그제 만난 예전 후배들은 내게 "맞지 않는 일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갑자기 기분이 아득해졌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도 자주 듣는 질문이다. 지금의 일을 언제까지 할지 정해두지 않았고, 꼭 지금 일이 아니라도 뭐가 되었든 '언제까지 할거냐?'라는 질문엔 '하고 싶을 때까지만'이라는 게 내 대답이었지만, 뭉뚱그리지 말고 한번쯤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에서 할아버지가 위대한 여행으로의 초대장이라며 손자에게 건네준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대학 2학년 시작될 무렵쯤 분명 읽었는데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대신, 나 역시 어떤 여행으로의 초대장처럼 받았던 책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밑줄을 잔뜩 그은 그 책을 건네주던 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동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땐 몰랐지만 어떤 운명의 문 하나가 내게 열렸다. 그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없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의 주인공이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여행한 뒤 커다란 원의 출발점에 다시 섰듯, 나도 결국은 먼 길을 돌아 그 출발점에 다시 선 것일까. 때로 자연스러운 순환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어쨌거나, 손자를 고난으로 점철된 여행으로 이끈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잡담은 여기서 끝.  

"누가 되었든 행복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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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이거 참 민망해서리....흠흠..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

제 책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성공회사회교육원과 한국출판인회의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비영리단체인 '독서대학 르네21'에서 금요대중강좌를 운영하는데요. 10월의 주제가 '여행'입니다. 모두 네차례의 강좌가 열리는데 저는 그 중 두번째를 맡아 10월 8일 밤에 합니다.  
강좌를 하는 다른 분들이 워낙 쟁쟁하셔서 제가 낄 자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건 산티아고 가는 길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경험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가을 강좌이지만 지금 신청을 받는 중이라 미리 말씀드려요.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 들러보세요~ 

강좌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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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옛날에 두 대의 소시지 기계가 있었다. 한 대는 열심히 돼지고기를 받아들여 소시지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으로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기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부는 더 공허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결국 이 기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에서-

석달 전,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때 나 자신이 텅빈 내부만 들여다보는 소시지 기계처럼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다. 걸으면서 본 것이 오직 나 자신 뿐이었던 날들. 내 자책, 내 후회, 내 불안...그러려고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도.

낯선 풍경과 사람들, 세상의 무수한 사건들은 내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내 경험이 된다. 어디서든 뭔가를 얻고 싶다면, 근사한 풍경과 만남, 사건이 날 찾아와주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선 나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했다. 그 길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두달 전 마쳤던 여행의 경험을 밤새 정리하면서, 다시 그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때는 뭔지 잘 몰랐던 느낌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명료해지기도 한다. 어떤 일을 겪든 사람이 저절로 변화하는 경우란 없는 것같다. 변하기로 '선택'할 뿐이다. 그 선택이 당장은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무엇보다 어떤 경우든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선명한 인생의 메타포를 갖게 되어 그 길을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이 잘 안보일 땐 그 길에서 모진 비바람이 불 때 무작정 걷던 일을 생각한다. 그 길에서 언덕을 오를 때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상상했다. 때론 좋은 사람, 멋진 경치, 또 때론 진창, 메마른 자갈밭을 만났다. 무엇을 만날 지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간다는 걸,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어디쯤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답은 자명하다. 걷는 일 뿐이다. 조금 지나면 배낭을 내려놓고 쉴 바위를 만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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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산티아고에 대해 뭘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프랑스 생장피드보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에 이르는 순례길. 이미 그 길 여행기 3권을 읽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부터 시작해 도보여행가 김남희 씨의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산티아고 편’, 미국 수녀님인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까지.

이젠 눈을 감으면 순례자 숙박소 앞의 풍경, 길가의 우물까지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도 자석처럼 이끌려 목록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책을 읽고 난 뒤, 사는 일처럼 길 역시 누가 걷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수십 번씩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독일의 코미디언 하페 케르켈링이 쓴 이 책의 소문은 국내에 번역되기 전부터 들었다. 독일에서 오래 공부한 내 친구는 지난해 가을 카미노 산티아고에 갈 거라고 떠벌리던 내 말을 듣더니 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저자는 아주 유명한 코미디언이고 독일에선 이 책이 1년 넘게 베스트셀러 1위였다고 한다. 성공의 법칙(? 그런 게 있다면)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도 아닌 이런 책이 그렇게 오래 1위일 수 있다니, 그게 더 인상적이었다.


이 길에 나선 사람들은 대개 뭔가 해결할 문제를 짊어지고 발을 내딛는다. 저자는 중년에 이르러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난 뒤 사고의 전환을 위해 카미노 산티아고에 오른다.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도 그에겐 풀어야할 숙제 중의 하나였다.

엄숙한 질문을 안고 길 위에 오르지만,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읽은 산티아고 여행기 중 가장 경쾌하고 불량한 순례자다.

순례자는 숙박소에서 묵으며 경험도 나누고 해야 한다는 조언에도 “경험을 나누는 건 좋은데요, 무좀을 옮기고 뭐 그러는 것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요”하고 호텔로 달려간다. “가난한 사람 흉내 내지 않겠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게다가 화장실과 샤워실을 30명과 같이 써야 하고, 낯선 이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한 방에서 7~8명씩 자야하고 사적 공간이 전혀 없는, “그런 게 끈끈한 인간적 만남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우긴다.

억지로 꾸민 순례자의 경건함이 없어 좋다. 사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죄다 진솔하고 길 위의 풍경은 죄다 환상적이며 길 위의 모든 일은 죄다 깨달음을 준다는 식의 여행기들은 얼마나 지루한가.

순례자연 하지 않는 저자의 솔직함은 읽는 이가 ‘어,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까지 나아간다. 저자는 힘들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몸이 영 못 버틴다 싶을 땐 기차를 타버렸다. 순례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100km는 걸어갔지만, 남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를 학대하지 않으며 내게 맞는 속도와 방식으로 가겠다는 고집이 마음에 들었다. 내 길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이 싫어질 지경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농땡이 순례자였지만, 그에게도 길이 가르쳐주는 것은 있었다. 

저자는 순례길이 인생의 여정과도 같다고 돌아본다. 시작은 난산이었지만 중간쯤에는 긍정적 경험과 함께 오류와 혼돈이 공존한다. 때론 길 밖에 나앉기도 했다. 목적지까지 기쁜 마음으로 행진할 수 있게 된 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다. 다른 순례자들과 어울리기를 피하던 저자가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기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신뢰하되 작은 검토를 게을리 않는, “불신과 신뢰 사이의 균형을 잡는 법”, 삶의 사소한 불행들과 불투명한 미래를 개의치 않는 “유쾌한 담담함”을 스스로에게 가르치는 저자의 자세도 좋았다.


다른 여행기들과 이 책이 또 하나 다른 점은 길 위의 사람들 이야기다. 저자가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덕택에 온갖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면모가 풍성하게 드러난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갑자기 공부가 부질없이 느껴져 간호사 교육을 받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네덜란드 여인, 말기 유방암에 걸린 딸과 함께 이 길을 걷다 딸이 죽은 뒤 순례를 완수하기 위해 혼자 다시 걷는 엄마. 반면 몇 년간 이 길을 오르내리며 동냥만 하는 사람도 있다. ‘순례자’라고 명함을 파고 중세 수도사복을 입고 걸으며 여자를 꼬시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다. 이 길을 걸으러 오는 목적이 오로지 ‘섹스’인 사람도 있단다. ^^;

순례자 중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특히 남미 여성이 많다. 저자에 따르면 이 길은 남미 여성에게 커다란 결혼시장이다. “엄격한 가톨릭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미래의 배우자와 함께 돌아오라는 과제를 주어 보낸다”는 것이다. 남자 보쌈 하러 2천리 길 걷는 셈인데... 딸 참 터프하게들 키우신다…. -.-;


코미디언답게 웃음의 차이를 설명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가슴으로 웃는다면 그건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인종차별적 개그를 듣고 웃는 사람은 목에서 웃는다. 목이 열리지 않고 닫힌 상태인 것이다. …지식인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빈틈이 없지만 내용적으로 별것 아닌 외설적 농담을 좋아한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독일에서 출간된 하페 케르켈링의 야고보 길 순례여행 에세이.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험난한 순례코스로 유명한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야고보 길에 도전한 총 42일간의 순례 여정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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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내가 기록해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중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프랑스 생장피드보르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길.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길.

  언제부터 그 길을 마음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상을 떠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내 모습을 몽상했다. 그러다.... 시들해졌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통해 이 길이 점점 유명해졌고, 급기야 3년 전쯤인가 ‘겁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여행가 김남희씨가 오마이뉴스에 쓴 산티아고 순례기 연재를 보고, 에라, 안되겠다, 마음을 접었다. …좀 이상한 일이다. 깃발 꽂으러 가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나 가는 길이면 내가 안가도 되겠다고 생각하다니, 이건 또 뭐람. -.-;


  한동안 잊었던 이 길을 걷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건 미국 수녀님인 조이스 럽이 쓴 책 ‘느긋하게 걸어라’를 읽은 뒤부터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 수녀님은 오랜 친구인 목사님을 길벗 삼아 36일간 이 길을 걸었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일기처럼 기록하는 대부분의 여행기와 달리 저자는 이 책에서 여행에서 느끼고 얻어온 소주제들을 챕터의 제목으로 삼아 여행의 경험을 되돌아본다.

  여행의 흥분은 가라앉고 경험을 되새김질해 풀어놓은 책이므로, 산티아고 여행에 대한 실용적 정보를 얻고 싶다면 김남희 씨의 책이 더 낫다. (그렇다고 이 책에 실용적 정보가 없는 건 아니다. 나처럼 코스, 숙박시설 등 실용적 정보를 꽤 많이 수집한 독자에겐 오히려 여행의 아주 실제적인 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이다)

  반면 자신이 긴 여행을 해냈다는 감격, 온통 멋지기만 한 여행지와 여행자에 대한 찬사, 몰라도 그만인 시시한 에피소드 일색인 낭만적 여행기들에 싫증난 독자들에겐 이 책을 권한다. ‘왜 떠나는가’ 하는 물음에 열심히 대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대로 순례자가 된다는 낭만과 실제 순례자가 되는 건 전혀 다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장거리 보행에, 날마다 묵을 곳을 찾아 전전해야 하며 지저분한 화장실과 샤워장을 참아야 하고 낯선 이들이 코고는 소리를 들어가며 잠을 청해야 한다.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순례에 대한 환상은 금방 실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모든 성가신 일들과 실망, 계획의 틀어짐을 순례에 부수적으로 뒤따르는 불편한 부록쯤이 아니라 순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계속 생각한다.

  성가신 일을 겪을 땐 뭔가를 원하면서도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자신의 성향을 발견하며, 노숙자들처럼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보고 숙식을 해결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매일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는 생활을 통해 생존에 대한 태도를 성찰한다. 다른 순례자들과 만나면서 느끼는 뭉클한 연대감과 일시적일 줄 뻔히 알면서 그 관계에 자신을 다 주고 싶지는 않은 마음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털어놓는다.

  길 위에서 겪는 일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여러 번 생각하며 풀어놓은 신중함 덕택에 이 책에서 구체적인 경험들은 산발적 에피소드를 면하고, 교훈들은 추상적 설교를 면할 수 있었다.


  만만치 않은 나이에 저자가 기나긴 순례를 통해 배운 건 뭘까. “매사를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성에 대한 끊임없는 부담을 버리고 내 뜻대로 되게 하려는 끈질긴 집착을 버려야” 일상생활을 그 본연의 모습인 순례와 모험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얼마 전 혼자 낯선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길을 찾으려는 집착으로 길이 찾아지지 않자 제풀에 지친 나는, 올라왔으니 내려갈 수도 있겠지, 생각하고 그냥 걸었다. 덕분에 깊은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귀 기울였고 비 내린 직후 숲의 청량함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등산로를 찾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 집착을 버려서가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해 인생을 움켜쥐려고 안달해온 나 같은 사람에겐 ‘통제하려는 태도를 버리라’는 저자의 말이 쉽지 않다.  다만 그 같은 방식만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까진 알겠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서면 저자의 이런 마음자세를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게 될까.

순례자는 신비와 더불어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성지를 향해 걷다보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면에 벌어질 일을 물리적 노정을 짜듯 계획하거나 미리 정해둘 수 없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마음에 지도가 없다는 뜻이다. 여정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느긋하게 걸어라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얻은 인생의 교훈들  조이스 럽 지음, 윤종석 옮김
예순의 노 수녀와 20년 지기 노 목사가 37일간 800킬로미터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가며 그 길에서 건져 올린 인생의 교훈들을 25가지 주제로 정리한 책. 내려놓으라, 모르는 사람들의 친절을 받아들이라 순례길의 권면은, 인생이 곧 순례이며 우리가 일상의 삶을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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