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02 박쥐-즐거웠어요, 신부님! (10)
  2. 2006.06.23 올드보이-슬픔을 나누면 정말 반이 될까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영화 ‘박쥐’에서 -


영화 ‘박쥐’를 보기 직전에 읽어서 그런지, 영화관에 가면서 블로그 이웃인 inuit님이 쓴 한 줄짜리 촌평 의 앞머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우가 닭 먹는 게 죄야?”


음, 그러니까 ‘박쥐’는 닭 먹으면서 죄책감 느끼는 여우, 죄가 아니라고 우기며 마구 닭을 먹는 여우, (죄의식이 있든 없든) 닭 먹고 사는 여우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 아니 불쌍한 닭들, 뭐 그런 동물 농장이 무대인갑다…. 신부가 뱀파이어가 되어 친구의 아내를 탐한다는 설정 정도는 미리 알고 있었으니, 닭 먹으면서 죄책감 느낄 여우는 당근 이 신부이겠고, “여우가 닭 먹는 게 죄냐”고 우기는 자는 누구일지 궁금했다.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라~~~)


영화를 보는 내내 키득거렸다.
영화보고 밥 잘 먹고 돌아와서 포털사이트에서 ‘박쥐’를 다룬 어떤 기사 제목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


글쎄다......,
박찬욱 감독의 오래된 주제인 ‘죄의식’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불가항력으로 주어진 죄(원해서 뱀파이어가 된 것도 아닌데)도 내 죄인가 하는 질문도 그렇고, 깊은 죄의식과 새로 눈을 뜬 탐욕 사이에서 헤매던 인간의 말로도 그렇고, 보기에 따라선 ‘본질’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뭐, ‘깊은 고민’ 씩이나….-.-;;;


내 눈에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였다. 쫌 양심적인 흡혈귀도 어쨌건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차함, 뱀파이어와 70년대 분위기의 한복집, 뽕짝 음악과 마작, 보드카, 그런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부딪혀 생성되는 독특한 공기가 팽배하고, 연극적 무대 위에서는 ‘심오한 질문’ 대신 심각한 대목을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으로 비트는 엉뚱한 유머가 펼쳐진다.


시작할 때부터 죽어가는 환자의 말에 생뚱맞게 “당근이죠”라고 대답하는 신부, 자살하겠다는 수녀의 고해성사에 ‘거, 떠난 남자 잊어버리라’고 경박하게 충고하다가 면박이나 당하는 신부를 보면서 이 영화가 ‘심오한 질문’ 따위와 거리가 멀 것이라고 기대했고, 실제로 그랬고, 그래서 웃겼다.
어느 잡지에서 감수성 풍부한 어떤 리뷰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도 찔끔 났다던데, 나는 왜 뒤죽박죽 골 때리는 B급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떠오르던지….
불이 켜진 영화관을 걸어 나오며 화면을 바라보고 이런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다.

“즐거웠어요, 신부님!”

덧1. 영화 보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핏빛에 홀린 탓인지 저녁도 시뻘건 떡볶이를 먹었다능....


덧2. 박찬욱 감독은 여배우 발탁에 일가견이 있는 듯. ‘박쥐’ 최고의 발견은 김옥빈이다. 티 없이 맑은 표정과 요부의 관능을 동시에 갖춘 김옥빈의 얼굴을 보며 ‘올드 보이’의 강혜정이 떠오르더라는...

'영화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으로 쓴 "시"  (8) 2010.05.28
경계도시2-건망증과 수치심  (3) 2010.04.11
인디에어-쓸쓸한 품위  (14) 2010.03.25
박쥐-즐거웠어요, 신부님!  (10) 2009.05.02
일요일의 외출  (0) 2009.02.22
데쓰 프루프 - 애들은 가라!  (8) 2007.09.07
사랑의 레시피 - 배려의 방식  (16) 2007.09.03
밀양-살려고 하는 생명  (4) 2007.05.31
Posted by sanna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 영화 <올드보이>에서 감금방의 액자에 적힌 글 -

한 사내가 생각 없이 입을 놀린 죗값을 어마어마하게 치러야 했던 영화 ‘올드 보이’(DVD·스타맥스)에서 처음, 중간, 마지막에 세 번 되풀이되는 말이다.

                                                 오대수가 감금된 방의 벽엔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예수를 그린 그림 ‘슬퍼하는 남자’가 걸려있고 거기에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갇힌 남자가 15년간 매일 대면하는 충고치고 얼마나 기가 막히는 말인가.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미치기 일보직전인 사람에게 웃으라니. 무지막지한 조롱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새겨들을 말이기도 하다. 거기서 울어본들 뭐하겠는가. 오대수가 풀려난 뒤 이 말은 그가 살아가는 태도가 된다.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려던 남자를 살려놓고도 그 남자가 자기 사연을 털어놓으려 하자 매정하게 뒤돌아섰고, 자신을 덮친 비극의 전말이 드러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 그는 끝까지 ‘슬퍼하는 남자’처럼 눈은 울어도 입은 웃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 대사는 계시처럼 내레이션으로, 앨범에 적힌 글로 반복된다.

‘올드 보이’에 쓰이기 전부터 영문 속담집에 곧잘 실리곤 했던 이 말은 원래 19세기 시인 엘라 윌콕스가 쓴 시 ‘고독’의 첫 구절이다.

박찬욱 감독에게 물으니 시나리오를 쓸 땐 그게 시인 줄 몰랐다고 한다. 몇 년 전 유럽의 한 도시에서 커피를 마시다 머그 컵에 새겨져 있던 그 말을 처음 봤는데 “흔해 빠진 경구 같으면서도 냉소적인 뉘앙스가 기억에 남아” 영화에 쓰게 됐다고 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가 세상의 상식인데 이 말은 ‘기쁨은 나눌 수 있어도 슬픔은 나눌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하긴 슬픔은 고사하고 기쁨조차 나누기 어려울 때도 얼마나 많은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남의 행, 불행을 엿보며 비교를 근거로 위안을 얻고 또 비교를 근거로 불행해지는 게 사람들이다. 그래서 시니컬한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 같은 이는 “남의 불행을 애통해 하는 것보다 남의 행복을 함께 즐기는 것이 더 고결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가 타자일 땐 남의 슬픔을 나누려는 연민은 가질 수 있어도 내가 고통의 당사자일 땐 슬픔은 나누기 어렵다. 영화 ‘문라이트 마일’(DVD·브에나비스타 코리아)에서 딸을 잃은 엄마 조는 남편에게 “누가 위로해도, 위로하지 않아도 화가 난다”고 쏘아붙인다. 슬픔으로 마음의 빗장을 닫아 건 그에게 남의 위로는, 험한 일이 자신들에게 닥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값싼 동정으로 느껴질 뿐이다.

제 손으로 눈물을 닦을 준비가 된 후에야 위로도 굴절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 전까진, 우는 사람은 철저히 저 혼자다. 그러니 행여 ‘왜 나만…’하는 자기연민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거든 이 싸늘한 조언,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를 되새겨보는 것도 스스로를 다잡는 데 도움이 될는지 모른다.

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