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 2012년에 번역한 책 《푸른 눈 갈색 눈》에 쓴 옮긴이 후기와 해설을 옮겨 놓는다. 지금은 그때와 생각이 달라진 대목 (예를 들면 한겨레신문 칼럼으로 쓴 아래 글 '역지사지는 가능한가'가 그때와 달라진 요즘의 생각) 도 있지만 어쨌든. 계속 관심이 가는 주제라서 다른 맥락에 옮겨놓고 보기 위해 블로그 게재.

-------------------------------------------------------------------------------------------------------------------------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 옮긴이 후기와 해설

지금 당신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게 된 사연은 열한 살 소녀가 서툰 솜씨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도화지의 위쪽 절반에는 주먹만 한 글씨로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엔 덩치 큰 아이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혼자 동떨어진 작은 아이를 향해 소리친다. “저리 가! 너는 우리랑 달라!”

작은 아이는 이 세 명에게 맞서는 모양새로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야! 나는 너희와 같아.”

작은 아이의 모델이자 그림을 그린 소녀는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가정의 아이다. 내가 이 그림을 본 것은 2010년 가을, 우연한 계기로 비영리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단체 연구진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자료 수집을 이미 마친 프로젝트에 뒤늦게 합류한 뒤 그림을 그린 아이의 동영상 인터뷰도 보게 되었는데, 또랑또랑한 눈빛의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막 얘기하고… 어렸을 때요. 제가 발음이 많이 이상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나더러) ‘너 우리랑 같은 사람 아니지? 저리 가’라고 하고, 만날 놀리고 그랬는데… (학교에서) 다문화가정인 사람 손들라고 만날 그러잖아요. 그럼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가정인가 봐’ 어쩌고저쩌고해요.”

이 아이는 “똑같은 사람이고 말만 다를 뿐인데,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은 필요도 없고(듣기) 싫다”고 했다. 다문화가족지원법이라는 법률도 있고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기에 다문화가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으려니 했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그러고서 며칠 뒤에는 단체 활동가들에게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동아리 활동을 지원했던 경험을 듣게 되었다. 동아리 아이들이 직접 같은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평소 다문화가정의 아동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두 개만 적어보라’는 주관식 질문이 있었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이랬다. “따돌림, 더럽다, 외모, 의사소통, 아프리카, 초콜릿, 짜장면, 흑인, 불행…….”

이 학교 학생 중엔 외모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다문화가정 아이는 없다고 했다.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를 직접 본 적이 있건 없건 간에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에 따라붙는 편견의 리스트가 놀라웠다.

내가 차별과 편견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두 사례를 접하고 난 뒤부터다. 말투나 피부색처럼 단순한 특징으로 ‘너는 다르다’라고 판단하고 이에 근거해 쉽게 차별하며 완강한 편견을 갖는 마음의 구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방에서 다문화 사회를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말 다양해지고 있는 걸까?

의문을 안고 자료를 뒤지던 중, 이 책의 주인공인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을 접하게 되었다. 엘리어트의 실험에서 핵심 주제인 ‘차별당하는 사람의 마음 공감하기’를 응용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한겨레신문〉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에 그 내용을 글로 썼다. 그 뒤 초등학교에 찾아가 엘리어트의 실험을 응용한 연극 수업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할 연극 작품을 만들 무렵, 한겨레출판의 눈 밝은 편집자께서 이 책을 찾아내 번역과 해설을 제안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은 ‘다문화’라고 놀림받는 게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그림을 그리고도 모자라 도화지 오른쪽 위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놓았던 소녀가 맺어준 인연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끈을 통해 다가온 당신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이 21세기 한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차별은 오로지 나쁜 환경의 영향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마음일 뿐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왜 차별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더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으로 나는 ‘역지사지’를 꼽겠다.

 

정치권에선 ‘네가 문제’라고 비난할 때에도, 비난을 멈추자고 호소할 때에도 역지사지를 들먹인다. 이른바 ‘갑질’ 논란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공무원 연금 개혁 논란 때에도, 여성혐오에 남성혐오 패러디로 맞선 인터넷 논란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단어다. 가치관이나 입장, 이해관계가 팽팽히 대립할 때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모두가 주장하지만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이 말이 쓰이는 맥락도 점점 기이해져 간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자기반성 없는 가해자가 반격에 나선 피해자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급기야 ‘역지사지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운 한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에선 욕설과 비난이 오가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역지사지, 감정이입, 공감 등 엄밀하게는 약간씩 다른 뜻이지만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들의 공통점은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마치 내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능력인데다, 주변에 대충 물어봐도 누구나 역지사지에 근거한 자신의 공감 능력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오락 프로그램의 소재로 쓰일 정도이니, 요즘엔 ‘모자라면 이상한’ 덕목처럼 간주되는 듯하다.

 

하지만 실천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도 ‘다른 사람의 신을 신고 걸어보는’ 공감의 능력이 이질적인 사람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낭만적 기대를 배반한다.

 

우선 공감은 편협하다. 혈연, 인종, 국적, 유사성, 가치의 공유 등으로 금을 그은 집단의 경계, ‘내 편’의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나은 이상은 다음과 같다고 했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 게 먼저다.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자고 권하기보다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최근 인터넷을 달군 ‘불법체류자 자녀에게 특혜를 주는 한국판 이민법 논란’은 오해에서 비롯된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다. 정청래 의원이 발의했고 미등록 이주아동의 교육권, 의료권 보장이 골자인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이자스민 의원이 발의한 이민법’으로 잘못 알려져 발생했던 논란은 잠잠해졌으나, 불씨는 여전하다. 이번 논란으로 불거진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비난에는 다소 우려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은 대통령의 선거공약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보면 보수적인 여당이 야당보다 앞서간다. 이 문제에 열심인 이자스민 의원이 여당 소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제정을 추진해온 사회단체들은 애초에 이 법안 대표 발의자로 이주와 무관한 야당 의원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협의를 진행했지만, 유권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해당 의원의 거부로 결국 무산됐다.

 

야당을 지지 (혹은 여당을 싫어)하면서도 이주민을 혐오하는 그 유권자들이 이번 ‘한국판 이민법 논란’의 진원지였다. 사회연결망 프로필에 권위주의적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정부, 경찰의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 빼앗아간다’고 비판한다.

 

무수한 비판 중 일상생활에서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개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불법체류 아동을 돕느냐’는 논리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을 돕는 사회보장제도는 비난하지 않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는 ‘세금이 아깝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들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금을 낸다는 것도, 간접세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안중에 없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 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관찰됐다.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피지배집단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타자 비난, 희생양 찾기의 가장 흔한 형태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공적 소통의 장이 사라지고, 인권이 하찮고 허무맹랑한 가치로 취급당하며,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증오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증폭되는 사회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과장된 공포가 더욱 쉽게 확대 재생산된다. 이번에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주아동이 그러한 외부의 희생양이 됐다는 점이다. 아동의 보호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너무나 손쉽고 무차별적으로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 위기의 구조가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인 걸까.

 

이자스민 의원은 조만간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안’을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 이 의원을 마땅찮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민법 논란’ 때와 유사한 십자포화를 쏟아 붓기 이전에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비난하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정부나 경찰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민의 시선으로 보면 미등록, 이주자, 아동이라는 삼중의 취약성에 노출된 나약한 존재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권리의 보장은 특별히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원래 갖고 있는 자격을 인정해주는 거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격과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그 자격을 갖고 있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 기사 바로가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구호개발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가끔 지인들이 자녀에게 개발도상국 아이와 1대1 해외결연을 맺게 해주고 싶다며 방법을 문의해오곤 한다. 왜 자녀에게 해외결연을 권하는지 이유를 물으면 의외로 이런 대답이 꽤 많다. “우리 아이가 자신은 얼마나 좋은 환경에 운 좋게 태어났는지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주고 싶다.”

한 번은 개발도상국의 5세 미만 영유아가 예방하기 쉬운 질병으로 얼마나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는지 설명하는 거리 캠페인을 진행하는데 한 여성이 아이의 손을 잡고 다가와 내가 건넨 전단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봐, 여기는 이렇게 아이들이 죽잖아. 그런데 너는 이렇게 편하게 살고 부족한 거 하나 없는데 공부를 안 해? 부끄럽지 않아?”

자녀가 매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갖길 바라는 부모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아이들의 곤경을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와 행복의 근거로 삼는 일부 시선을 느낄 때면, 내가 하는 일이 뜻하지 않게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화하고 개발도상국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데에 기여하고 있지는 않나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다’는 자부심에 걸맞게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늘었다. 10여 년간 구호개발단체와 미디어는 모금홍보방송 등을 통해 개발도상국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단체들과 미디어가 개발도상국의 어려움을 국내에 전달하면서 맥락을 지운 채 부분적 사실만 부풀렸을 때, 하나에 불과한 이야기를 유일한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을 때,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 구호개발단체들의 모임인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는 모금, 홍보의 목적으로 개발도상국의 아이를 다룬 보도제작물을 만들면서 간혹 발생하는 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 ‘아동권리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 가이드라인 제작 과정에서 수집한 부적절한 촬영사례는 급박한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종종 어떤 현실 왜곡이 이뤄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모금방송을 위해 필리핀의 가난한 아이를 촬영하러 간 제작진은 아이가 자신이 가진 가장 예쁜 옷을 성의껏 차려 입고 나타나자 방송 내용과 맞지 않는다며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요구했다. 에티오피아 시골마을의 식수난을 촬영하러 간 한 방송사는 적절한 ‘그림’이 나오지 않자 가축이 이용하는 작은 연못에 아이를 데려가 물을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시도했다.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아이를 촬영하면서 붕대를 풀라고 요구한 미디어도 있다.

가난을 ‘볼거리’로 만드는 이러한 일부의 관행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편견을 유포할 뿐 아니라 그들이 계속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수동적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고착시킨다. 때로는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민에 대한 낙인, 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빈곤 인도적 위기 등 다양한 상황 별로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 기준을 정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그간의 관행이 한 번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체들 내부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을 스스로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개발도상국에 대한 관심과 나눔을 통해 우리 자신은 무엇을 배웠나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나눔의 실천이 공감의 상상력을 키우기보다 비교우위에 선 사람의 시혜적 동정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않을까.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블로거님들, 연극 보러오세요~~~

세이브더칠드런과 극단 사다리가 함께 초등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마음을 보여줄 다문화 이해 아동극 '엄마가 모르는 친구'를 만들었어요.

원래는 블로그에서 초대권 나눠드리는 이벤트를 할 계획이었는데, 수익을 목적으로 한 공연이 아니라서 관람료가 단돈 1천원입니다. 별로 큰 부담이 아닐테니 그냥 오시라고 소개 드립니다.

공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고 예매도 가능한 사이트를 아래 링크합니다.
(엄마가 모르는 친구 사이트 바로가기)


이 연극은 제가 이 단체에 합류한지 얼마 안되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노심초사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연말 공연만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 올해 봄, 극단 사다리의 연극놀이 강사, 배우들과 함께 초등학교 5곳에 나가서 진행한 '차별 인식 개선 연극 수업'을 먼저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차별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직접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보려고 '연극'이라는 장치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수업을 석 달동안 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만든 상황과 대사가 이번 연극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전문 작가의 손을 거쳐 각색되고 전문 배우들이 연기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일반적인 공연과 다른 점이랄까요. 많은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더 자세한 뒷이야기,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블로그에 쓰려고 해요.

또한 이 연극은 세이브더칠드런이 진행하는 '다양한국 만들기'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앞에 링크한 토론문에도 썼지만, 이 캠페인은 다문화 아이들에게 똑같은 한국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대신 차이를 인정하고 공생하자는 시각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취지가 아무리 좋은들 재미가 없으면 소용이 없지요. 그런데
지난 주 금요일 배우들 연습실에 놀러갔다왔는데, 재미도 상당할 듯합니다. 극단 사다리는 어린이 대상 연극으로 워낙 이름높은 수준급 극단인데, 전 몇 개 장면만 지켜봤는데도 "역시!"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어요. 랩과 노래가 많이 포함된 semi-musical이니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 거여요.
초등학교 4~6학년 대상으로 만든 연극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와 함께 보셔도 좋고, 중고생, 성인이 봐도 심심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연말에 공연 보러 많이 오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기록 삼아 저장해둠.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해온 다문화 아이들 이중언어 지원 프로그램과 한국 아이들의 비차별 교육이 '다양한국 만들기' 캠페인으로 한데 묶였다.
9월 발표회에서 얼떨결에 캠페인 취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아래 (요약본)와 같은 내용의 발표를 함. 뜻했던 대로 잘 지속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자기답게 살기, 함께 살아가기

- ‘다양한국 만들기캠페인 소개

<요약본>

1.     다양한국 만들기캠페인의 취지

세이브더칠드런의 다양한국 만들기는 기존에 진행해오던 다문화 아동 지원 프로그램, 올해 한국 일반 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한 차별 방지 다문화 이해 교육을 결합한 통합 캠페인이다. 두 갈래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우리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다문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활동이 더 이상 소수자의 입장에 처한 이주자들만을 대상으로, 그들을 한국인으로 동화(同化)’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문화는 외국인 이주자인 '그들'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우리'의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 정책에서 무엇보다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결혼 이주자 여성과 그 자녀의 교육 문제 등 궁극적으로 한국인으로 포함되는 대상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 즉 이방인의 동화(同化)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와 같아지라'고 요구하는 획일화된 문화에서 기존 토착민과 다른 사람은 피부색, 언어 등의 표지에 의해 결핍된 존재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이처럼 이주민을 타자화하고 복지의 시혜 대상으로만 간주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적 용어로 인식되는 낙인 효과도 생겨났다. 세이브더칠드런이 2010 12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아동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면담한 다문화 아동은 일상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손들라고 맨날 그러잖아요. 그럼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가정인가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막 이야기하고…. 어렸을 때요. 제가 발음이 많이 이상했는데 애들이 '우리랑 같은 사람 아니지 저리 가'라고 하고 맨날 놀리고.” (11, )

 

이 다문화 아동이 겪은 차별의 경험은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태도와 의식, 이에 기반하여 우리보다 못하다고 간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우월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가정 내에도 존재한다. 한국인들이 소위 '못사는 나라'로 간주하는 국가 출신이며 한국말을 못하는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가족 내 다른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서도 존중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문화 가정 자녀의 긍정적 정체성 형성에도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다문화 사회가 슬로건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려면 이미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 다문화 가정 내에 존재하는 차별과 부정적 정체성 형성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주민에게 한국사회가 낯설듯,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가 강했던 한국인에게도 다문화 사회는 낯설고 새로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 차별적 의식과 태도를 버리고 나와 다른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기,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며 체계적 교육과 각성된 의식을 필요로 한다.

더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단체에서 얼떨결에 맡은 일 때문에 다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아이들 차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고민하게 됐는데, 맨 땅에 헤딩이라고 답답해하지 말고, 이럴 때 공부 좀 해봐야겠다.
그래서 새 카테고리를 만듦. 사람들이 어떻게 그룹을 지어 차이를 차별하게 되는지, 차별의 극복은 가능한지, 다양성의 공존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책, 논문 등을 읽고 메모해둘 예정.

이 주제에 꽂힌 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을 좇다가 지난 달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라는 책을 읽었다. 
건성건성 읽던 도중 페이스북 담벼락에 낙서했던 걸 여기 옮겨놓는다.

...책은 참 재미없게 썼더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실업, 범죄의 원인으로 이주노동자를 지목하듯 사회에 상존하는 위험을 놓고 '타자'를 비난하는 게 근대 이후의 현상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파리인들에겐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 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 연관되어 왔다
.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 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또한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 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 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절판된 책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고, 책 마지막 챕터는 이런 타자화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챕터만 못읽고 대여 기한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책을 반납하고 말았다. (뭐하는 거니.....)
사실 대여기간 초과보다는, 번역이 별로 좋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아 읽기를 포기한 것. 마지막 챕터는 잘 이해해보고 싶어서, 곧 지를 예정인 킨들로 원문을 읽어보려고 함. (더 이해 못할 지도 모르지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

초등학생들과 연극수업을 하면서, 영화배우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는데 사진을 보고 적당한 배역을 골라보자고 제안했다. 사진엔 백인 남녀, 동남아시아 여성과 흑인 남성이 있었고 필요한 역할은 사장과 악마, 천사, 걸인이었다. 캐스팅 결과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악마에 흑인 남성, 사장에 백인 남성, 천사에 백인 여성, 걸인에 아시아 여성을 골랐다. 아시아 여성에 대해선 “가난하게 생겨서”가 이유였고, 흑인 남성은 “무섭게 생겨서” “손에 총을 들고 있어서 (총이 아니라 카메라였다)” 악마로 골랐다.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른들부터 무턱대고 백인을 선망하는 반면 동남아인을 깔보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피부색에 따라 편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방에서 ‘다문화’를 말하지만, 이 단어는 ‘미국, 유럽이 아닌 우리보다 못한 나라 출신’이라는 부정적 개념이 되다시피 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민자 출신국의 다변화, 다양한 문화 소개 등이 거론되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건 사람의 오래된 습성이다. 인류학 조사에서도 ‘우리’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성이 그렇다면 나와 다른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바꿀 방도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1954
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로버스 케이브’ 캠프라고 불린 유명한 실험을 했다. 전부 백인 중산층 출신인 열 살 소년 22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캠프장에 도착했다. 각 그룹은 이름과 심벌, 규칙을 만들고 놀다가 엿새째가 되던 날, 캠프장에 다른 그룹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부터 두 그룹 사이에서는 열 살짜리 소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욕설과 증오를 동원한 싸움이 시작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절망적이지만 셋째 주에 연구진은 이들이 집단 구분을 포기하고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실험했다. 캠프의 유일한 물탱크 꼭지를 막아버리거나, 멀리 데려가며 일부러 트럭을 고장 내자 새로운 환경에서 두 그룹의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비하하는 충동도 수그러드는 동시에 ‘우리 편’에 대한 열광도 시들해졌다. 1주일 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소년들은 그룹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섞여 앉았다.


이 실험의 결론은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좇아 한 패가 되는 게 아니라, 한 패가 되고 난 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백인과 흑인 소년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어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까? 비슷한 의문을 품은 다른 심리학자가 9년 뒤 실험을 재연했는데 이번엔 종교분쟁이 심한 레바논에서 기독교인 열 명과 무슬림 여덟 명을 모았다. 연구진은 소년들을 섞어 ‘푸른 유령’과 ‘붉은 요정’ 팀으로 나누었다. 예상대로 그룹 간 싸움이 벌어졌지만, 뜻밖에 이 싸움은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니라 유령 대 요정 팀 사이에서 일어났다.


두 실험이 들려주는 것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분류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으므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의 해법도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로버스 케이브’ 캠프의 소년들처럼 ‘우리’의 폭을 넓힌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다문화 논의는 여전히 외국인 ‘그들’을 다루는 문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문화 사회가 ‘그들’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정 집단을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면한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사회의 다수자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더 나아가 다문화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며 수평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래야 ‘함께 사는 우리’가 된다. 다문화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화(同化) 교육 대신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이해, ()차별 인권 교육이 더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