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유럽의 한 도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번잡한 광장의 한 구석에서 특이한 모양의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침묵의 예배당이라고 한다. 대화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바깥의 소음에서 뚝 떨어져 고요히 자기 안으로 침잠하기를 권유하는 공간. 반가운 마음에 긴 의자에 앉아 침묵의 세계로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바람은 금세 무너졌다. 자리에 앉기는커녕 계속 움직이며 스마트폰으로 몰래몰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때문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들만 탓할 일도 아니지 싶었다. 어디를 가든, 멋진 풍경과 작품, 맛을 경험하기 전에 촬영부터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게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자신을 변호라도 하듯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남는 건 사진뿐이잖아.”

 

침묵의 예배당에서 스스로 침묵해보는 경험 대신 공간의 규칙을 어겨가며 침묵의 이미지만 찍어대던 이들도 그랬으리라. 남는 건 사진뿐이니까. 사실, 기억할 경험자체가 없는 이미지는 나 거기 가봤다이상의 아무 것도 우리에게 남기지 못할 텐데, 우리는 기를 쓰고 뭔가 남기려 든다. 어쩌면 매사에 나한테 남는 것부터 따지는 강박이 우리 몸에 밴 것은 아닐까?

 

나한테 남는 게 뭐지?’와 같은 질문은 효율성, 가성비를 따지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고의 중심을 차지해버린 듯하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을 쓴 독일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이를 오래 세월 원금과 이자의 범주로 사고해왔고, 늘 모든 가치를 그것이 앞으로 더 불어날지를 잣대 삼아 평가해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삶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이익을 가져다주어야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는 사고방식, 그저 삶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은 뭔가 손해 보는 장사로 여기는 마음의 습관 말이다.

 

슬픈 일은 우리가 이처럼 미래의 이득을 잣대 삼아 현재를 평가하는 태도를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얼마 전 개최한 한국 아동의 삶의 질 연구 발표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중학생은 자신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능력과 인성을 평가하는 자료로 쓰이는 생활기록부에 잘 기록되기 위한 생기부 인생을 살아간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중학생들이 왜 불행한지를 설명하던 그 학생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잊히지 않는다.

 

생기부 인생을 사는 우리들에겐 항상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덜 급하고 점수화되지 않을 일들이 가장 먼저 저희들의 인생에서 지워집니다. 어쩌면 행복은 지워진 일들 속에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중학생들 사이에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한다. 오로지 미래에 남는 것’ ‘이득을 따지는 환경에선 미래의 결과로 환산할 수 없고 생기부에 기록할 수 없는, 벚꽃 날리는 봄날의 추억 따위는 가장 먼저 지워질 것이다. 그 학생 말마따나 어쩌면 행복은 그 지워진 일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침묵의 예배당에서 시작된 몽상이 교육제도까지 너무 멀리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지금 이 순간만 경험할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대신 미래에 무엇이 남는지만 따진다면 행복한 미래를 말하면서 정작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의 행복을 빼앗고 말지도 모른다. 그 위기감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의 감각으로 여전히 생생하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사업본부장

 

( * 월간 에세이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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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 해도 해외원조랍시고 개발도상국의 오지에 학교 하나 덜렁 짓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를 지어 취학률은 높아졌으나 교재도 없고 교사도 부족해 학교를 몇 년씩 다닌 아이들이 여전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황당한 사례도 숱했다.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건물만 짓고 손 떼는 몇 달짜리 국제개발협력사업은 거의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현지에 상주하는 민간단체들이 최소 3년 이상 학교 건물을 고치고 양질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만들며 교사를 길러낸다.


국제개발협력사업에서 민간단체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민간단체들은 개발도상국 정부 주도의 개발에서 배제되기 쉬운 빈곤층 아이들과 여성, 소수자에게 가닿고 소외된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을 한다. 9월 유엔개발정상회의가 채택한 지속가능개발목표가 시민사회와의 파트너십을 중시하고, 정부가 작성 중인2차 국제개발협력기본계획에서 민관협력의 확대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정작 정부의 국제개발 민관협력 운영 방식은 선진화 흐름에 역행하려 들고 있어서 우려스럽다. 원대한 목표를 세워놓고 실제로는 뒷걸음질 치는 형국이랄까. 현재 정부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민관협력사업 예산을 보조금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그런 경우다.


정부의 보조금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 민간보조사업에 대한 지침 등을 보면 관리와 처벌을 강화하고 보조사업의 확대를 억제하며 규모를 최소화한다는 것이 골자다. 선진국들은 공적개발원조의 10% 이상을 민관협력 방식으로 집행하는데 한국은 2% 수준에 불과한 이 방식마저도 더 줄어들 판이다. ‘축소 지향인 법과 지침은 민관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정책 방향과도 어긋난다.


또한 1년 단위로 운영되고 집행을 엄격히 통제하는 보조금의 성격상양질의 교육 확대처럼 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국제개발협력사업은 더 이상 하기 어렵게 된다. 1년 단위라 해도 회계보고 때문에 실제 사업기간은 7개월 안팎이고, 2년으로 늘려도 보고와 평가를 하느라 사업 중단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과거의 후진적 원조처럼 건물만 덜렁 짓고 마는 식으로 국제개발협력사업이 퇴보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재해로 보건사업이 중단됐는데 현장 수습을 위해 원래 계획에 없던 인력을 추가로 파견하는 등의 융통성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인건비도 엄격하게 통제하는데, 로봇을 투입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떻게 인건비를 쓰지 않을 수 있는지 요령부득이다. 과연 이것이 정부가국제개발협력 선진화를 말하면서 원하는 모습일까?


기금을 투명하게 쓰지 못하는 민간단체는 규제받아야 옳다. 그러나 큰 혼란에도 불구하고 의견수렴 절차도 없이 보조금 전환을 관철시키려 하는 정부를 보면 그 속내가 궁금해진다. 겉으로는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사업본부장 

(동아일보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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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결정은, 결정을 내리는 어른들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8년 전 발리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했던 15살 소녀의 말이다. 어떤 사안이든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일을 결정한 성인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아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책상 옆에 붙여두었다.

 

재난이 발생할 때 구호단체 역할의 최우선 순위는 긴급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인데, 내가 일하는 단체가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는 재난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시리아와 남수단의 분쟁 때에도, 태풍 하이옌이 덮친 필리핀, 대지진이 일어난 네팔에서도 우리 스태프들은 쑥대밭이 된 마을을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서를 썼다.

 

아이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빤히 짐작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불필요해보일지도 모르는 이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재난에 가장 취약한 존재인데도 정작 그들의 필요와 시각은 간과되어 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도적 지원 활동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리지만 아이들에게는 집, 밥만큼이나 긴급한 교육의 중요성이 그 한 예다. 남수단의 12살 소녀는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학교가 집보다 안전하다”고 말했다. 남수단 보르 지역의 한 학생은 교복을 “안전복”이라고 불렀다. 학생인 줄을 모두가 알아보므로 납치와 강제징집의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상황의 아이들에게 교육은 그냥 ‘공부’가 아닌 거다.

 

아이들은 재난의 최대 피해자이지만 무력한 희생자만은 아니다. 성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문제를 짚어내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필리핀에서 태풍 하이옌이 덮친 지 6주 뒤에 가진 모임에서 아이들은 구호활동가들에게 구호품에 집수리 도구를 넣고, 옷의 사이즈를 분류해서 배분하고, 구호물품을 나눠줄 때 어른과 아이의 줄을 분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는 등 지원의 적절성을 파악하는 능력과 눈썰미를 보여주었다. 네팔에선 대지진 이후 “부자와 노숙자가 똑같이 천막에서 살고” “엄마가 이웃과 싸움을 멈추고 서로 돕기 시작하는” 상황이 기쁘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서술한 대로 평소의 질서가 모두 파괴되는 대재난 속에서 때로 공동체적 감각이 피어나고 비극과 동시에 관대함이 표출되는 ‘재난 유토피아’적 상황을 아이들도 체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5년간 우리 단체가 거의 모든 재난지역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펴낸 숱한 보고서 중 함께 겪는 고통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상황, 슬픔 속에서도 희미한 기쁨이나마 발견하는 경험을 단 한 줄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 분쟁이다. 증오의 폭력에 의해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가 뿌리 뽑히는 경험을 한 시리아, 남수단, 가자지구 등 분쟁지역 아이들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에 떨면서 하루하루가 무섭다고 호소한다. 고통의 등가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겐 분쟁 상황에서 받는 고통만큼 지독하고 긴 형벌도 없다.

 

전쟁의 위협이 어른거리던 최근 며칠, 내가 체감한 위험도는 크지 않았지만 오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쟁지역 아이들의 비명이 간간이 떠올랐다. 서두에 인용한 말마따나 전쟁은 그 시작을 결정하는 성인보다 속수무책으로 혼란과 공포를 감당해야 하는 아이들의 평생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지상파 뉴스 앵커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지만 전쟁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다. 현실화하지 않더라도 불안한 기운부터가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 가운데 하나다. 분쟁지역 아이들의 공포를 절대로 이 땅에서 목격하고 싶지 않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사업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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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로된 데이트 폭력도 그 한 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구타유발자’라며 피해자 탓을 했다. ‘맞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웠다’던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 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폭력의 맥락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재작년 겨울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동학대사망사건 이후 민간단체와 국회의원이 함께 만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학대로 숨진 아이가 살던 지역에서 조사를 할 때의 일이다.

 

당시 동네 이웃과 교사,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의 증언으로 본 가해자와 숨진 아이의 관계는 위의 데이트 폭력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와 비슷했다. 가해자는 은폐해온 폭행이 드러난 뒤에도,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등 맞을 짓을 해서 때렸다고 아이 탓을 했다. 반면 아이는 죽도록 맞으면서도 계속 가해자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고 ‘요리도 잘하는 예쁜 엄마’라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연인을 잃는 게 두려워 가해자의 말들을 내면화했다면, 학대로 희생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성인과 아이가 처한 상황은 물론 다르지만,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애착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도 사랑의 허울아래 행해지는 폭력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서글픈 모습이다. 가해자들이 폭행하다가 잘 대해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탈을 쓰고 저질러지는 이 고약한 폭력이 데이트 폭력과 아동학대의 비정상적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사랑을 폭력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 단적인 예가 한국인 85% 이상이 찬성한다는 소위 ‘사랑의 매’, 즉 체벌이라고 생각한다.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도 효과적이지 않다는 연구도 숱하게 많지만, 그보다 더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모든 아동학대의 시작이며, 폭력을 ‘할 만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첫 단추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폭력성의 역사를 살핀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체벌 찬성율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했다. 체벌을 용인하는 하위문화가 성인의 극단적 폭력도 부추긴다는 뜻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체벌 근절이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줄이고 방지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체벌은 6월 현재 46개 국가가 법으로 전면금지한 폭력이다.

 

국내에서도 9월부터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체벌 금지를 규정한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체벌’이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쓰지 않았고 다른 법들은 체벌을 애매하게 허용하는 탓에 전면금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비하면 한걸음 나아갔다.

 

데이트 폭력, 아동학대,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특징은 당하는 사람에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맞을 짓’이 어디 있겠나. ‘사랑의 매’도 없다. 사랑은 매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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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은 네팔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수업이 중단됐던 지진영향지역 학교들이 이날 공식적으로 수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특별했으리라 짐작하는 이유는 내가 일하는 단체의 후원으로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를 비롯한 15개국 연구자들이 실시한 ‘아동의 삶의 질’ 조사에서 네팔 아이들의 응답을 보고 나서다. 건강, 물질적 만족, 가정환경 등 삶의 질을 구성하는 여러 지표 중 네팔 아이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영역은 학교였다. 이들의 학교에 대한 만족도는 조사에 참여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조사 시점인 지진 발생 이전에도 네팔의 학교 사정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 ‘학교 가기’를 꼽은 답변에선 어떤 간절함까지 느껴진다.

 

교실 3만2천여 개가 완파되고 1만5천여 개가 수업을 하기엔 위험한 상태인데도 31일 수업 재개가 가능했던 것은 방수포와 대나무로 임시 교실을 만들고 잃어버린 교재를 다시 나눠주고 안전대책을 마련하여 학생들을 안심시킨 주민들의 노력과 국제사회의 지원 덕분이다. 안타까운 점은 파괴된 학교가 많아 여전히 1백여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교를 파괴하는 건 자연재해뿐만이 아니다. 요즘처럼 분쟁지역에서 학교와 학생들이 테러집단의 직접적 공격대상이 된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미국 매릴랜드 대학 연구팀이 1970년부터 2013년까지 테러리스트의 학교 공격을 조사한 결과, 2004년 186명의 아이들이 숨진 러시아 베슬란의 초등학교 인질사건이후 테러리스트의 학교 공격으로 25명 이상이 숨진 사건이 그 전에 비해 6배 늘었다. 지난해와 올해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케냐에서 일어난 학교 테러와 납치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증가 폭은 훨씬 가파를 것이다.

예전에는 테러집단이 살상 목적보다 지역사회를 겁주고 교란하려 빈 학교 건물을 대상으로 삼았다면 요즘의 사건들에서는 직접 학생들을 겨냥한다. 테러집단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강도 높은 폭력적 메시지다.

 

다행히 학교 파괴에 맞서려는 국제적 노력도 꿈틀거린다. 지난달 21일 인천에서 폐막한 세계교육포럼의 ‘인천선언’은 재난과 분쟁 영향지역에서 학교가 처한 위기상황에 시급한 대응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주일여 뒤인 29일 노르웨이에서는 37개 정부의 지지로 분쟁영향지역에서 학교와 학생, 교사를 보호하고 무장세력이 학교를 기지 등으로 사용하는 데 반대하는 ‘안전한 학교 선언’ 발표가 있었다. 이는 휴먼라이트워치,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한 10여개 국제기구, 시민단체들이 연대모임을 결성하고 2012년부터 분쟁지역 정부, 반군, 주민, 아이들의 자문을 얻어 노력해온 결실이다.

 

위의 네팔 아이들처럼 재난, 분쟁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은 간절하다. 영국 국제개발연구소가 아이티 시리아 등 재난․분쟁영향지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위기 발생 후 필요한 지원의 우선순위를 묻자 아이들은 교육을 1순위로, 성인들은 3가지 우선순위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육은 인도적 지원 중 가장 지원이 열악한 분야여서 전 세계 인도적 지원 기금의 2% 미만이 쓰일 뿐이다.

 

4월 국제개발협력위원회가 의결한 ‘우리나라의 인도적 지원 전략’은 분쟁도 인도적 지원 대상에 포함시켰고 아동, 여성 등 취약계층 지원을 한국의 인도적 지원 브랜드 강화 방안으로 꼽았다. 그 전략에 걸맞게 재난․분쟁영향지역 아이들의 교육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에 한국 정부가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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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대형 참사가 아이들에게 남기는 상처는 길고도 깊다.

 

네팔 대지진 긴급구호 대응을 거들던 와중에 타산지석이 될까 하여 내가 일하는 단체가 올해 1월에 펴낸 ‘아이티 지진, 그 후 5년’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5년이 지났지만 운명을 바꾼 그날의 상황은 아이들에겐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를테면 벽이 머리 위로 무너질 때 함께 있던 아기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떨치지 못하는 소년 장탈은 해마다 대지진이 일어난 1월 12일만 되면 지독한 두통에 시달린다. 여전히 그 기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삶이 뒤흔들린 아이들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행복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는 경구는 속수무책인 대형재난의 경우엔 해당되지 않나 보다. 대지진의 참사를 겪은 네팔과 아이티는 비극의 쌍둥이라 할 만하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허약한 두 나라가 대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전개과정도 비슷하다. 구조는 더디고 우기가 다가오면서 전염병 공포가 번지고 있으며 대도시에서의 탈출 행렬은 시골로 문제를 안고 간다.

 

대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 남은 아이들의 처지는 더 닮은꼴이다. 깨끗한 식수와 음식, 의약품이 태부족한 환경에서 질병의 위험 앞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어린 아이들이다.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은 혼란 속에서 성폭력 및 착취,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네팔에서는 5천여 개의 학교가 파괴됐는데 어떤 아이들에겐 이번이 평생 받을 교육의 끝일지도 모른다. 5년 전 아이티의 아이들이 이미 겪었던 일들이다. 지금도 아이티에선 돌아갈 집을 잃은 사람 8만 여명이 캠프에서 살고 있고 그 중 절반이 아이들이다. 네팔에서 집을 잃은 아이들은 32만 명. 이들의 미래가 아이티의 현재와 다르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네팔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은 지진 발생 후 1주일 여간 헬기와 트럭 오토바이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아이들 8천 명을 포함한 1만9천여 명의 이재민들에게 방수포와 아이들을 위한 위생용품 등 구호물자를 배포했다. 며칠 내로 136톤의 구호물자를 네팔에 추가로 들여보낸다. 박타푸르를 비롯한 재난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또래와 어울리고 심리적 지원도 받을 수 있도록 아동친화공간을 열기 시작했다. 여러 긴급한 지원조치들 중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아동친화공간 만들기와 교육 재개를 위한 지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재난 직후 음식과 의료가 생명을 구하듯, 교육도 그렇다. 아동친화공간과 학교를 통해 다시 친구들을 만나며 일상을 회복하는 것은 아이들이 당장의 심리적 외상을 이겨내고 장기적으로는 회복탄력성을 갖도록 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재난이 발생하는 곳마다 아동친화공간을 만들고 교육 재개를 보건의료지원 못지않은 긴급과제로 삼는 이유다.

 

네팔과 아이티의 상황은 닮은꼴이지만 5년 전의 비극이 이번엔 반복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아이티에서 ‘거대한 실패’를 겪은 국제사회의 책무일 것이다. 콜레라 발병으로 제2의 재난을 겪었던 아이티의 참상이 네팔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돕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더 큰 문제를 만들지 않기를, 아무리 허약하더라도 현지 정부를 배제하지 않고 모든 구호와 재건의 노력에서 현지의 주민들을 중심에 두기를, 그리고 재난의 직격타를 가장 크게 받는 대상인 취약계층, 즉 아이들,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세이브더칠드런 네팔 후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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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규 교육과정에 안전 교육이 의무적으로 포함된다는 내용 뒤에 기사가 이렇게 이어져서다. “이에 따라 앞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 과목이 신설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깜짝 놀라 정부의 공식자료를 찾아보니 다행히 몇몇 기사가 언급한 ‘안전교육의 수학능력시험 포함 검토’ 같은 대목은 없다. 하지만 섣부른 추측보도라고 무시하기엔 찜찜하다. 시험에 넣으면 경쟁적인 주입식 교육이 되지만 시험과 무관하면 있으나마나한 과목이 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중요’하고 ‘의무적’인 과목이라면 시험에 포함되리라 짐작하는 게 무리도 아닐 것이다. 과연 학교 안전교육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좋은 걸까?

 

마침 지난달 중순 일본에서 열린 세계재난위험경감총회에서도 학교 안전교육이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총회에 다녀온 동료에게 안전교육의 핵심이 무엇이더냐 물으니 대답은 이랬다. “핵심은 마인드세트(mindset‧사고방식) 갖추기다. 언제 어디서든 배운 내용을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사고방식으로 체화돼야 한다.”

 

그러려면 교육이 지속적이어야 하고, 지루한 주입식이 아니어야 하며, 교문 밖을 나가도 배움이 지속되도록 지역사회가 같은 내용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가 컸던 미야기 현의 히가시마쓰시마에서 재난위험경감 교육을 진행하는 일본 세이브더칠드런이 카드 게임, 만화를 만들어 학생과 주민들을 동시에 교육하는 것도 그래서다.

 

만화는 재난 대비, 지진과 쓰나미, 재난 이후 등 여러 상황을 보여준 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자기자신을 지키는 기술을 가르치는데도 최소한의 대피요령을 익히고 나면 대다수의 내용이 더 작은 아이들의 필요를 고려하기, 체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기 등 남을 돕는 일로 채워진 게 인상적이었다. 이 만화는 일본 세이브더칠드런이 쓰나미 생존자 50명을 인터뷰한 뒤 공통적인 어려움, 유용한 대응요령 등 다음 세대에 전해줄 교훈들을 간추려 만든 것임을 감안하면, 실제 재난상황에서 생존자들이 체험한 필수적 생존기술도 각자도생이 아니라 ‘서로 돕기’였으리라.

 

‘서로 돕기’는 교육 방법에도 적용됐다. 고등학생들에게 재난대응 카드게임 진행 방법을 먼저 가르치면 고등학생들이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 가서 어린 동생들을 가르쳤다. 초등학생들은 교사보다 ‘언니들’의 안전교육을 더 재미있고 멋지다고 받아들이며, 고등학생들도 가르치는 것을 통해 더 배운다. 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조모임을 만든 주민들에게 재난대응 카드게임을 먼저 가르치면 그들이 다른 주민들을 교육했다. 요는 학교 안전교육은 지역사회와 동떨어진 진공상태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고 재난 대응 교육의 핵심은 ‘서로 돕기’라는 것이다.

 

<쓰나미의 아이들>을 쓴 일본 기자 모리 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탱해주고, 그러다보면 또 살아진다”고 썼다. 서로 씨줄과 날줄로 엮여 강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이 동일본 대지진 이후 그가 관찰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의 눈에 1년 전 대참사를 겪은 한국사회는 어떻게 비칠까?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간 건 예외적 사례일 뿐 시민 일반은 그렇지 않다고 안심할 만큼 서로 돕고 살아가는가? 학교 담장 밖에선 서로 지탱해주기는커녕 유가족을 모욕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학교 안에선 어떤 생존기술을 가르치려는 걸까? 참담해질 뿐이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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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한겨레신문 칼럼은 시리아의 민간구조대 화이트 헬멧을 후원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썼다.

위에 링크한 동영상부터 보기를 권하고 싶다. ‘화이트 헬멧대원들이 3층짜리 건물이 무너진 곳에서 생후 2주된 아기를 구해내는 장면이다. 여러 번 봤는데도 볼 때마다 울컥해진다.

 

지금 일하는 단체에 들어온 뒤 시리아 전쟁 중단, 한국정부의 난민 지원 확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 광화문 촛불 캠페인 등등 해마다 시리아 내전 시작일인 315일이 되면 뭔가를 하면서 꼼지락거렸다. 근데 올해는 곧 나올 보고서 홍보를 제외하곤 다른 걸 하지 않을 참이다. 긴 전쟁에 지쳤다거나, 달라진 게 없어서 힘 빠졌다거나 하는 건방진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냥 정말 모르겠다. 해결책은 뭔지, 저 먼 땅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자고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건 지난 달 서울에서 열린 사진전에서 시리아 아이들의 사진을 보았다는 것이고, 사진전이 끝난 뒤에도 그 아이들이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 슬프다고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고, 시리아에 남아 있는 그 아이들의 친구들을 구했을지도 모를 평범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거들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것뿐...... ‘화이트 헬멧홈페이지 들어가면 페이팔로 쉽게 후원할 수 있다. 많이들 도와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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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용기

 

지난 달 내가 일하는 단체가 주최한 ‘서울, 자타리를 만나다’ 사진전에 참가했던 작가가 요르단의 자타리 난민촌으로 돌아간 뒤 사진을 출품했던 시리아 청소년들의 소감을 보내왔다. 아이들이 전시회 사진을 보며 감탄과 기쁨을 쏟아낸 말들의 한 구석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 생활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줘요. 정반대로 난민촌 생활은 슬프답니다.”

 

누가 모르겠는가. 식물을 키우고 고양이를 돌보고 비록 천막이지만 지붕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난민촌 아이들의 사진에 실린 감정은 재미가 아니라 삶의 파괴에 맞서 소소한 일상을 돌보며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인 것을. 구조요청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듯 웃음기를 거두고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오는 15일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지 만 4년이 되는 날이다. 4년 전 청소년들이 담벼락에 쓴 반정부 낙서로 촉발된 시위가 전쟁이 되어 이토록 길어질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망자 수가 20만 명을 넘어서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대량학살’이나 다름없고, 난민의 규모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이라고 한다. 전시회에 걸렸던 시리아 청소년들의 사진 중 고향의 친구를 그리워하고 새가 되어 집에 돌아가고 싶다던 장면들이 눈에 밟힌다. 아이들의 꿈은 아마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이 거대한 폭력의 끝이 어딘지는 누구도 모른다. 민간인에 대한 폭력 중단, 인도적 지원 접근 허용을 골자로 잇따라 발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최소한의 상식과 인간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지켜지지 않는 생지옥의 가장 밑바닥, 최전선엔 누가 있는가?

 

시리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가장 많이 앗아가는 것은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의 참수가 아니라 정부군의 배럴폭탄 투하다. 기름통에 폭발물과 인화물질, 금속조각, 유리 등을 채워 만든 배럴폭탄을 시장 병원 주택가를 가리지 않고 퍼붓는다. 터키의 한 연구자는 시리아에 쏟아지는 폭격과 파괴의 정도를 “하루에 진도 7.6 규모의 지진이 50번쯤 일어난다고 상상하면 된다”고 묘사했다. ‘대재난’이라 불린 아이티 지진이 진도 7.0 규모였다.

 

공중폭격이 휩쓸고 간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은 ‘화이트 헬멧’ 대원들이다. 시리아의 시민들이 2013년 결성한 ‘화이트 헬멧’은 잿더미가 된 폐허에서 지금까지 1만2천여 명을 구해냈다. ‘인간성, 연대, 중립’의 원칙을 고수하며 무보수, 비무장으로 일하는 그들의 보호 장비는 하얀 공사장 헬멧뿐이다. 지금까지 구조 과정에서 8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가 ‘화이트 헬멧’의 금과옥조다. 보수적인 시민들이 옷이 찢겨진 채 매몰된 여성을 남성 대원이 구조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여성 대원들도 늘어났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화이트 헬멧’ 대원들은 전직 재단사, 목수, 약사, 학생 등 전부 자원봉사자들이다.

 

잔혹함과 고통으로 가득한 땅에서도 일상의 파괴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의 여러 모습을 목격한다. ‘화이트 헬멧’ 단원들의 구조 활동은 목숨을 건 용기지만, 난민촌의 시리아 청소년들이 카메라를 들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려 애쓰는 것도 용기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낼 수 있는 용기도 있다. ‘서울, 자타리를 만나다’ 전시회에 왔던 한 관객은 소감을 적는 메시지 나무에 이렇게 썼다.

 

“일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잊지 않는 것. 일상을 파괴당한 타인을 위해 분노할 줄 아는 용기. 잊지 않겠습니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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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지리아 북서부의 시골 마을. 갓 엄마가 된 라일라는 딸 라비아를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그러나 라일라가 아무리 노력한들 딸 라비아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잔인한 질문이지만, 라비아가 태어난 지역의 영유아 사망률이 출생아 1천 명당 150명으로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높은 현실이 더욱 잔인하다. 라비아가 이 시골마을 대신 최대도시 라고스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다섯 살까지 생존할 확률이 4배 가까이 올라간다. 아이가 다섯 살 생일을 맞을 기회는 태어난 곳, 부모가 속한 계층 등 아이들에겐 순전히 우연인 변수에 좌우된다. 출생의 복불복이라고 해야 하나.

 

#2. 시선을 같은 대륙의 동남쪽으로 옮겨 역시 가난한 나라인 르완다로 가보자. 부레라 지역 농부의 아내 모데스테의 삶도 힘겹긴 마찬가지이나 갓 태어난 아들 엘리부가 죽을까봐 걱정하던 시름은 덜었다. 예방접종도 받고 아플 때 치료받을 보건센터가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출생아 1천 명당 사망률은 2000년에 182명이었지만 2013년엔 52명으로 줄었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국가건강보험을 도입하고 정부와 함께 구호개발단체 등이 마을에 사는 보건요원을 양성해서 엘리부 같은 시골 마을 아이들도 치료받도록 노력한 결과 빈부차이에 따른 아동사망률 격차도 줄었다. 출생의 복불복도 어쩔 수 없는 운수소관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3. 이번엔 미국 뉴욕. 17일부터 이곳에선 ‘포스트 2015’ 개발의제를 둘러싼 정부 간 협상이 열린다. 21세기 시작 무렵 유엔 회원국들이 지구촌 빈곤을 반으로 줄이기 위해 채택한 새천년개발목표의 종료시한은 올해다. 바통을 이어받아 올해 이후 개발의 방향을 정할 ‘포스트 2015’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한데, 이는 정부 간 협상을 거쳐 9월 유엔 총회에서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이번 정부 간 협상을 앞두고, 세이브더칠드런 옥스팜 등 272개 단체는 공동성명을 내어 “새로운 개발목표가 혁신적이려면 선언의 중심에 불평등의 해소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이지리아, 르완다 시골의 갓난아기가 죽고 사는 문제와 뉴욕에서 모호한 거대담론처럼 들리는 ‘포스트 2015’를 두고 벌이는 협상. 생뚱맞은 대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기의 구체적인 목숨과 추상적인 협상 의제는 사실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포스트 2015’는 앞으로 15년간 전 세계의 공적개발원조예산, 기업과 단체의 후원금, 해당 지역의 정책 등 개발과 관련된 모든 자원의 쓰임새와 방향을 정하는 일종의 표지판이기 때문이다.

 

올해 끝나는 새천년개발목표 하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통계의 ‘국가별 평균’을 걷어냈을 때 드러나는 맨얼굴은 불평등으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내가 일하는 단체가 87개국의 아동사망률 데이터를 분석해 최근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국가 중 75% 이상에서 아동사망률의 계층 간 격차가 심각해졌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012년 소득하위 40% 가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가장 부유한 10%가구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2.5배 더 많이 목숨을 잃는다. 이 격차는 2002년 이후 두 배로 뛴 수치다. 국가 전체의 평균은 올라갔을지 몰라도 사회경제적 계층 간 격차가 더 커지는 요즘 추세대로라면 라비아처럼 불운한 아이는 충분히 예방 가능한 질병에도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마따나 ‘모든 악의 뿌리’인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포스트 2015’가 먼 나라 이슈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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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격언을 새삼 다시 떠올린 것은 조만간 벌어질 어린이놀이터 무더기 폐쇄를 앞두고서다.

 

27일부터 전국 어린이놀이터 중 안전관리를 위한 설치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거나 검사를 받지 않은 곳 3천396개 (지난해 12월말 기준, 국가안전처)가 폐쇄된다. 이들 중 85%는 주택단지 안의 놀이터다. 주택단지 안의 놀이터 중 94%는 아예 검사를 받지 않았다. 보도에 따르면 대다수가 영세 주택단지라고 한다.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이 제정된 2008년 이전에 지어진 놀이터들은 불합격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이용에 큰 불편이 없어도 개선공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공사비용이 만만치 않아 주민들이 검사를 받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놀이터의 안전관리 방식이 현재대로라면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어린이놀이터는 계속 폐쇄될 것이다. 안전의 중요성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문제는 시설관리에만 초점을 맞춘 중복검사가 놀이터를 비싼 애물단지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미끄럼틀 한 개가 있다고 치자. 제작단계에서 미끄럼틀은 외부기관의 공장검사, 제품검사로 안전인증을 받은 뒤에도 자체검사와 외부기관의 정기검사를 또 받아야 한다. 잦은 검사 비용이 가격에 반영되니 미끄럼틀 값은 올라간다.

 

이제 이 미끄럼틀을 놀이터에 설치했다고 치자. 관리자는 설치검사, 정기시설검사, 안전점검, 보험가입 등 모두 12개의 의무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 과태료를 내야 한다. 영세 주택단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비용과 의무다. 게다가 설치검사에는 놀이기구의 간격 등 제작 단계의 검사에서 이미 확인한 사항들과 중복되는 항목들이 많다.

 

이 복잡한 검사들이 놀이터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해줄까? 놀이터 디자이너들에게 물으니 다들 고개를 가로젓는다. 덜 까다로운 검사로도 명백한 위해요소는 막을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안전한 놀이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디자이너는 “미끄럼틀에서 아이가 튕겨져 나가 다치는 걸 방지하려 터널형 미끄럼틀이 도입됐는데 아이들은 터널 위로 올라가고 두세 명이 터널 안에 함께 들어가거나 터널을 거꾸로 기어 올라가며 논다”고 들려주었다. 시설 기준을 어떻게 세운들 아이들은 늘 그걸 뛰어넘어서 논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설 중심의 과도한 중복규제가 재미없고 획일적인 놀이터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안전검사에 걸리지 않으려 놀이터 관리자는 단순한 놀이기구를 최소한만 유지하려 든다. 그나마 없는 시간을 내어 짬짬이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 재미없다고 외면하면 놀이터는 썰렁해진다. 가뜩이나 주민공동시설 총량제 도입으로 150세대 미만의 아파트에선 놀이터가 의무사항도 아닌 판국에, 썰렁해진 놀이터를 번거로워도 유지하겠다고 결심하는 주민들도 줄어든다. 이렇게 놀이터는 점점 사라지고 도시에서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비좁아져 갈 것이다.

 

영국의 보건안전청은 놀이터 안전관리의 균형적 접근에 대한 누리집 게시글에서 “놀이기회를 계획하고 제공할 때 목표는 위험의 제거가 아니다. 솜으로 둘러싸인 아이는 위험에 대해 배울 수 없다”고 썼다.

명백한 위해요소를 제거하는 안전관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안전관리가 어린이놀이터를 줄이는 결과를 낳거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적당한 모험을 통해 위험이 상존하는 세계를 탐험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을 자발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서도 안 된다. 주민과 아이들에게 낡은 놀이터를 어떻게 개선할지 묻고 궁리하는 대신 철거 딱지 붙이고 손 놓는 건 정부가 할 짓이 아니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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