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밑줄긋기'에 해당되는 글 47건

  1. 2010.05.28 몸으로 쓴 "시" (8)
  2. 2010.04.11 경계도시2-건망증과 수치심 (3)
  3. 2010.03.25 인디에어-쓸쓸한 품위 (14)
  4. 2009.05.02 박쥐-즐거웠어요, 신부님! (10)
  5. 2009.02.22 일요일의 외출
  6. 2007.09.07 데쓰 프루프 - 애들은 가라! (8)
  7. 2007.09.03 사랑의 레시피 - 배려의 방식 (16)
  8. 2007.05.31 밀양-살려고 하는 생명 (4)
  9. 2007.05.20 그리스인 조르바 (18)
  10. 2007.03.30 타인의 삶 (20)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 씨밖에 없네요."
- 영화 '시'에서 창작을 가르치던 김용탁 시인이 -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심야 극장에서 보다.
관객이 채 10명도 안되었는데, 엔딩 크레딧에서 덮칠 듯 밀려오던 물소리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배경음악 한 소절 없는데도 감정을 압도하는 영화, 주인공 양미자(윤정희)가 몸으로 써낸 시의 처절함, 아름다움, 그 매서운 윤리적 질문 때문에 가볍게 툭툭 털어버릴 수 없는 영화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꾸 생각하게 만들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만든다. 뭔가 써보려고 꼼지락거렸지만....걍 포기하고 '시'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다가 가장 공감가는 글을 발견.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한겨레21에 쓴 글. 시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니, 이 영화 볼 생각이 없는 사람들부터 일독을 권한다. 

신형철씨 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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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에서 -


영화를 보고 1주일쯤 지난 뒤 위의 내레이션을 찾고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대사와 달랐다. 엉뚱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위의 내레이션이 "그때 우리는 과연 무슨 짓을 한 것일까"로 남아 있었다. 그의 죄보다는 우리의 죄로 더 선명하게 마음에 남은 영화라서 그랬던 걸까.

이 영화를 볼지 말지 한참 망설였다. 2003년 입국한 송두율 교수가 북한 조선노동당 서열23위 김철수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해방이후 최대거물간첩'딱지를 붙이더니 급기야 가짜교수의혹까지 제시하며 미친 듯 몰아붙이던 검찰과 언론의 마녀사냥이 못마땅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송 교수에 대해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하고 그러나…'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머릿속 생각까지 검열하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그 법에 의해 한 사람이 만신창이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 남과 북의 한쪽에서는 용인되고 다른 한쪽에는 발도 디딜 수 없었던 그간의 정치적 상황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식인 전반에 대해 갖고 있던 회의와 불신을 그에게서도 확인받는 듯한 느낌으로 상황을 시니컬하게 지켜봤을 뿐이다. 그 뒤, 그 사건을 잊었다. 2008년 대법원은 송 교수에게 제기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는데, 그 선고 내용조차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한 사람의 머릿속을 단죄하고 발가벗긴 뒤 내팽개치고 잊어버리는 이 잔인한 건망증...그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부끄럽고 힘이 들었다. 그를 초대한 소위 '진보 진영'조차 송 교수가 평생 견지해온 '경계인'을 우스꽝스러운 개념쯤으로 취급하면서 그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장면에선 차라리 눈을 감았다. 송 교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언론의 횡포는 내가 그 업계를 떠났다고 해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기 어려웠다. 같은 사건이 2010년에 벌어졌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마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7년 전의 일을 다룬 영화를 보는 일이 불편하고 괴로운 이유는 그 일이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2003년에 내가 느꼈던 불편함, 내 안의 레드 콤플렉스를 다시 건드리면서 너는 얼마나 달라졌느냐, 달라질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것도 결국은 송 교수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 사건을 보며 불편해하고 거슬려하고, 이곳 아니면 저곳을 강요하는 이분법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그를 무릎 꿇린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1주일 전쯤 영화를 보고 난 뒤 뜬금없이 떠올라 머릿속을 빙빙 도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홍상수 감독의 저 유명한 대사,"우리, 인간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였다. 인간이 될 가능성은 없더라도 적어도 괴물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하나만 꼽으라면 수치심일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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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봐. 소중한 추억이나 중요한 순간에, 혼자였어?”

('인 디 에어' 주인공 라이언이 결혼을 망설이는 매제에게)



이 영화, 이렇게 쓸쓸할 줄 몰랐다.

지난 주말에 마감해야 할 일로 며칠 내리 밤을 새면서, 손을 털면 가장 먼저 할 일로 찍어둔 게 ‘인 디 에어(Up In the Air)’를 보는 거였다. 내 눈엔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조지 클루니가 2시간 내내 나온다니, 절대 놓칠 수 없는 영화다. 극장에 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이 얼마만의 일이던가!


‘해고 전문가’라는 희한한 직업을 갖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라이언은 1년에 322일을 여행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기내 조명, 공항의 싸구려초밥에서 안정을 느끼는 남자다. 배낭을 무겁게 하는 온갖 관계, 소유물들을 다 태워버리고 매일 아침 빈손으로 일어난다고 상상하면 기분 좋지 않느냐고 설파하는 ‘빈 배낭’주의자다. “사람은 모두 혼자 죽는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아” 가족 꾸리기와 정착을 거부하는 바람둥이다. 그런 그가 소중한 사람을 놓칠 수 없다는 자각에 모든 걸 내던지고 달려가지만 그 결과는 참……. ㅠ.ㅠ


라이언은 너무 뻔해 보이는 미래가 두려워 결혼을 망설이는 매제 설득의 임무를 부여받고 “함께 하면 삶이 즐거워진다”면서 그를 달랜다. 소중한 순간에 혼자였던 적이 있었느냐며 매제를 설득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소중한 순간, 고대하던 천만 마일리지 달성의 소망이 이뤄졌을 때, 혼자였다. ‘빈 배낭’의 개똥철학을 설파하는 바람둥이로 그냥 남아있었더라면 슬플 일도 아니지만, 어쩌랴. 어떤 순간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을…….


라이언의 고독에 한숨을 쉬면서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은 이거였다.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라이언의 선택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관계에서 늘 도망치던 이전과 달리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최선의 호의를 베푼 뒤, 다시 혼자서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지상의 사람들이 하루 일을 마친 뒤 집에 돌아가 가족과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밤하늘의 별빛 중 좀 더 빛나는 게 내가 탄 비행기일 것”이라고 독백한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 주인공 크눌프처럼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느냐고 탄식하는 대신, 라이언은 그의 삶이 한 곳에 묶여 사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독의 몫을 잘 알았다. 남에게 절망을 주는 일을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던 라이언이 자신의 절망에 대해서도 끝까지 잃지 않던 쓸쓸한 품위에, 오래 마음이 저렸다. 

역시 조지 클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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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 영화 ‘박쥐’에서 -


영화 ‘박쥐’를 보기 직전에 읽어서 그런지, 영화관에 가면서 블로그 이웃인 inuit님이 쓴 한 줄짜리 촌평 의 앞머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우가 닭 먹는 게 죄야?”


음, 그러니까 ‘박쥐’는 닭 먹으면서 죄책감 느끼는 여우, 죄가 아니라고 우기며 마구 닭을 먹는 여우, (죄의식이 있든 없든) 닭 먹고 사는 여우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 아니 불쌍한 닭들, 뭐 그런 동물 농장이 무대인갑다…. 신부가 뱀파이어가 되어 친구의 아내를 탐한다는 설정 정도는 미리 알고 있었으니, 닭 먹으면서 죄책감 느낄 여우는 당근 이 신부이겠고, “여우가 닭 먹는 게 죄냐”고 우기는 자는 누구일지 궁금했다.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라~~~)


영화를 보는 내내 키득거렸다.
영화보고 밥 잘 먹고 돌아와서 포털사이트에서 ‘박쥐’를 다룬 어떤 기사 제목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


글쎄다......,
박찬욱 감독의 오래된 주제인 ‘죄의식’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불가항력으로 주어진 죄(원해서 뱀파이어가 된 것도 아닌데)도 내 죄인가 하는 질문도 그렇고, 깊은 죄의식과 새로 눈을 뜬 탐욕 사이에서 헤매던 인간의 말로도 그렇고, 보기에 따라선 ‘본질’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뭐, ‘깊은 고민’ 씩이나….-.-;;;


내 눈에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였다. 쫌 양심적인 흡혈귀도 어쨌건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차함, 뱀파이어와 70년대 분위기의 한복집, 뽕짝 음악과 마작, 보드카, 그런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부딪혀 생성되는 독특한 공기가 팽배하고, 연극적 무대 위에서는 ‘심오한 질문’ 대신 심각한 대목을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으로 비트는 엉뚱한 유머가 펼쳐진다.


시작할 때부터 죽어가는 환자의 말에 생뚱맞게 “당근이죠”라고 대답하는 신부, 자살하겠다는 수녀의 고해성사에 ‘거, 떠난 남자 잊어버리라’고 경박하게 충고하다가 면박이나 당하는 신부를 보면서 이 영화가 ‘심오한 질문’ 따위와 거리가 멀 것이라고 기대했고, 실제로 그랬고, 그래서 웃겼다.
어느 잡지에서 감수성 풍부한 어떤 리뷰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도 찔끔 났다던데, 나는 왜 뒤죽박죽 골 때리는 B급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떠오르던지….
불이 켜진 영화관을 걸어 나오며 화면을 바라보고 이런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다.

“즐거웠어요, 신부님!”

덧1. 영화 보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핏빛에 홀린 탓인지 저녁도 시뻘건 떡볶이를 먹었다능....


덧2. 박찬욱 감독은 여배우 발탁에 일가견이 있는 듯. ‘박쥐’ 최고의 발견은 김옥빈이다. 티 없이 맑은 표정과 요부의 관능을 동시에 갖춘 김옥빈의 얼굴을 보며 ‘올드 보이’의 강혜정이 떠오르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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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게 사는 게 미친 거라면 난 얼마든지 미칠 거예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에이프릴의 말)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안해보였다. 그녀에게 설득당한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이야기할 땐 들뜬 표정이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느닷없이 파리로 떠날 거라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을 거라고 말할 때 부부의 표정은 불안하고 군색했다.

친구들은 황당해하면서도 누구나 그렇듯 우정과 시샘이 뒤섞인 반응으로 약간은 부러워했고 약간은 멸시했다. 다 청산하고 떠나겠다는 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정신병원에서 휴가를 나온 미친 사람 밖에 없었다.


하지만 떠나야 할 이유를 들자고 치면 끝도 없듯,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끝이 없다. 아내의 임신, 승진, 거액 연봉의 제안, 여기서도 파리에서처럼 멋지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주저… 마음 설레던 계획의 포기를 목전에 두고 부부는 반목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이 뭔지를 잘 모른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 아내가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살지 말고 파리에 가서 당신의 본질을 찾자”고 설득할 때 남편은 이렇게 반문했다. “내 본질이 뭔데?”

파리에 가본들 여기나 똑같다는 옆집 남자의 위로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꼭 파리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방법은 몰라도 어쨌든 그 희망으로 살았어요. 약속되지도 않은 일에 모든 희망을 걸다니…. 하지만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어요. 말 그대로 무의미한 인생일 뿐….”
결국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 수도 없었던” 그녀의 선택은 끔찍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던 대로 떠났더라면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선택이 옳은 것과 그른 것 중 하나를 고르는 경우일 때는 아주 드물지 않을까. 대부분의 선택은 어떤 특정한 대안이 다른 것보다 특별히 낫다고 할 수 없는 경우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맞냐 틀리냐 이전에 의지와 상황의 문제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은 어리석었다. 그렇게까지 맞설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은 몰라도 어쨌든 포기할 수 없었던” 그 희망에 사람이 목숨을 걸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      *      *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본 다음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했던 곳은 용산이었다.

‘무망한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 하나로 목숨을 잃었던 사람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발길이 그렇게 쏠렸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합동분향소가 있다는 것은 어제 hojai 블로그를 통해 알았다. 

지나가는 사람인양 슬쩍 쳐다보기만 할 심산이었는데 상복을 입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 팬 아주머니가 다가와 구속 철거민 석방 촉구 서명에 참여하기를 권했다. 내 옆에서 서명을 하던 아주머니는 서명을 청하던 아주머니에게 “나도 이 근처 살고, 장사하는 사람예요.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는지…. 좌우간 뭔 일이 생겨도 밥은 굶지 마요”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 보니 지나는 행인 중 서명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요란하게 웃으며 지나던 여고생 3명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어 서명을 하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사라졌다.

분향소의 방명록엔 울분이 가득했다. 부끄럽다는 글도 많았다. 나도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명복을 빕니다”이상으로 어떤 말도 더 적을 수 없었다.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한 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분향소 앞엔 드럼통에 불을 피운 채 나이든 철거민들이 지친 자세로 앉아 있었고, 이들을 큰 길로부터 격리시키듯 닭장차가 바리케이트처럼 그 앞에 줄 지어 서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나며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의 말은 얼마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으로 곧잘 매체에 인용되던 대목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분께서 인용하셨다던 성경의 한 대목.

“카인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이 질문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추기경님이 고문치사를 했던 안기부 요원만을 꾸짖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부끄러웠다. 그 때와 달리 지금 불감증이 만연한 이유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철수’를 명령받지 않아도 되는 안전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추방당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권리에, 주권의 박탈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가 권한을 위임한 국가기관이 야만을 일삼고 이를 우리가 묵과할 때, 힘없는 아벨의 피난처는 이 세상 어디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꿈쩍도 않고 너무나 완강한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이 무망해보이는 싸움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기껏 ‘대단히 아름다운’ 수사라는 것을 해놓고도 골자가 ‘우연히 떨어진 화염병’ 때문에 다 죽었다 밖에 없는 검찰의 발표가 참 개소리라는 것만 안다. 그리고 분향소에 붙어있던 말, “저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절규의 절실함 밖에는 모르겠다. 나의 글은 무력하다. 위선과 분열을 견딜 수가 없어 한동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요점 없이 옆길로 새버린 이 포스트를 굳이 올리는 이유는 마음이 있다면 힘을 보탤 방법이 아직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다. 사이버 조문이나 후원을 할 수도 있다. 한 달이 지났어도 여전히 고립무원의 처지인 그들에게 우리가 아직 잊지 않았다고 말해줄 방법은 여전히 있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해야 할 주제에 다 잊고 용서하자는 철면피한 소리를 추기경님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랍시고 읊어댔다는 어떤 높으신 분께 말해주고 싶다.


“저기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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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니잖아~ ㅠ.ㅜ”

- 영화 ‘데쓰 프루프’에서 커트 러셀이 울상이 되어 -

사이코 변태 마초 악당 커트 러셀이 징징대며 저 웃찾사스러운 대사를 내뱉을 때 어찌나 웃기던지!

소도시 심야영화관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를 봤습니다. 역시 타란티노!

별 생각 없으나 무지 재미있는 싸구려 펄프 픽션 한 권 읽은 기분입니다. 아, 당연히 성인용이구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루하다가 끔찍하다가 약간 긴장되다가 다시 지루해지려고 하는 찰나 심장박동이 치솟으면서 손에 땀을 쥐다가 점점 황당해지면서 통쾌하게 한 방을 날리는 영화'입니다. (음....무슨 한마디가 이렇담......-.-;)

허름한 동시상영관에서 킬킬대며 보면 딱일 영화이니 이 영화에 대한 글들은 가급적 읽지 말고 그냥 보세요. (저도 그만 쓸랍니다 ^^) 이 영화 관련 글들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읽어야 훨씬 재미있더군요.

영화의 절반이 넘는 언니들의 끝없는 수다는 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졸아도 됩니다. 차들이 부릉부릉 달리기 시작할 때만 깨어 있으면 됩니다.

‘트랜스포머’를 보고 난 뒤엔 극장 앞의 차들이 다 벌떡벌떡 일어날 것 같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 대기중인 차들의 엔진 소리가 죄다 전력질주를 준비하는 몸풀기 신호처럼 들려서 가벼운 흥분까지 느껴지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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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케이트: 이모가 모든 일을 다 엉망진창으로 하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무슨 일이 있든 언제나 네 곁에 있으리라는 건 약속할게.

조이: …이모? 이모가 모든 일을 다 엉망으로 하진 않아요.

- 영화 ‘사랑의 레시피’에서-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아마도) 30대 싱글여성이 언니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어린 조카를 키우게 됐다. 성질이 불같고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은 완벽주의자이지만, 선량한 사람이며 조카에게 정말 잘 해주고 싶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질 않고, 때론 조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 같은 걸 깜빡 잊어버리기도 한다. 버릇이 되지 않아서다.

너무나 잘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으니 자신이 모든 걸 망치고 있다고 자책하는 이모에게 조카는 이모가 ‘모든 일’을 다 잘못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준다.

...어린 조카 말이 맞다. ‘모든 일’을 다 잘하고 ‘모든 일’을 다 잘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든 통제해 뜻대로 하려는 강박이 심한 사람일수록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싶어 하고, 조금만 삐끗하면 ‘모든 일’이 다 글러먹었다고 자책하곤 한다.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는 없고, 무엇이 자신에게 이로운지를 스스로가 항상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꽤 오랜만에 본 영화 ‘사랑의 레시피’는 별 (5개 만점에서) 3개쯤을 주고 싶은 로맨틱 드라마다. 러브 스토리의 전개과정에 뻔한 면이 많아 흠잡기도 쉬운 영화이지만, 배려가 뭔지 생각하게 만든 몇 장면들 덕분에 (그리고 예쁘고 기품있는 캐서린 제타 존스,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론 에크하트 때문에^^)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뉴욕 맨해튼의 일류 요리사인 케이트(캐서린 제타 존스)가 조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차려준 아침 밥상은 일류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완벽한 농어구이였다. 내가 봐도 아이가 먹기엔 좀 거시기했다. ^^; 초등학생에게 복 지리 한상 차려준 꼴이다. 접시 위에 입을 벌린 생선을 보는 순간 질려버린 아이의 얼굴이라니. ^^ 케이트가 생각하기엔 최상이었겠지만 아이는 음식을 보고 질려 손도 안대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반면 레스토랑의 부주방장 닉 (아론 에크하트)은 어떤가.

케이트를 따라와 주방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조이를 보더니 그냥 옆으로 쓱 다가가서 야채를 다듬는 척 하며 “이건 바질이야” 하고 말을 건넨다. 심심한 아이에게 이파리를 하나씩 따는 일을 하도록 유도한다.

조금 있다가 스파게티 한 접시를 들고 온 그는 바질 잎 다진 것을 뿌려 아이 옆에 서서 그냥 맛있게 먹는다. 한두입 먹다가 저쪽에서 새로운 주문을 외치자 바쁜 척 하며 아이에게 그릇을 안겨주고 “잠깐 들고 있어”하고 사라진다. 잠시후 스파게티 그릇에 코를 박고 먹고 있는 아이를 먼 곳에서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일에 엄격한 케이트의 배려는 농어구이처럼, 자기가 할 줄 아는 최고의 것을 해주는 것이었다.

반면 자유분방한 닉의 배려는 스파게티처럼, 상대방이 부담 없이 받도록 해주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순 없다. 케이트의 방식은 고수의 도움이 필요할 땐 최고일 것이고, 닉의 방식은 배짱 좋은 지지자가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내가 해본 몇 번의 배려(?)가 상대방 입장에선 어떠했을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면서 그에 상응하는 보답 또는 고맙다는 인사를 듣지 못해 안달복달하지는 않았나? 내가 ‘대단한 희생’을 감수하며 100을 주었는데 상대방은 내 기대의 50에도 미치지 못할 때 분개하지 않았나?
그런 태도의 베풂은 배려라기보다 고작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증인’으로 끌어들이려는 행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배려의 핵심은 어쩌면 ‘내가 이렇게 너를 생각한다’고 하는 그 마음의 크기보다, 받는 상대방이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좌우를 살피고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태도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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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디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살지예”

- 영화 ‘밀양’에서 종찬의 대사 -

  (스포일러 없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고통이라니요.

‘밀양’을 보고나면, ‘밀양’에 대해 말하려면, 난감해집니다. 화창한 날, 구질구질한 내 삶도 화사해질 수 있다는 어이없는 기대를 품어보기도 하는 날, 이렇게 피 흘리는 상처라니요.


예고없이 덮쳐온 고통 앞에서 ‘나한테 왜?’라는 질문을 떠올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밀양’은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각자가 겪은 고통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지요. 비교할 수도 없는 거구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은 사람의 고통을 가스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텅 빈 공간에 가스를 주입하면 가스는 공간이 크든 작든 그 공간을 구석까지 균일하게 채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통도 크건 작건 간에 사람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마는 것이다.'...


‘밀양’에서 종찬(송강호)은 ‘뜻으로 사나요. 그냥 살지요’ 했지만, 정반대로 신애(전도연)는 ‘뜻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여자입니다.

뜻을 찾기 위한 신애의 안간힘이 지독하고 무모해 입이 떡 벌어지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그 싸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냥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뜻이 필요하니까요. 무의미함을 견뎌내기 위해서라도 의미가 필요하지요. 누구든 사람은 그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겠지요.


얼마 전까지 다니던 스포츠센터 화장실의 휴지걸이엔 슈바이처의 말이 조잡하게 인쇄돼 있었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절실하게 다가와 입속말로 가만가만 따라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모든 걸 다 잃어도, 살아가기 위한 어떤 ‘뜻’도 찾아내지 못했다 해도,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더군요.
암 투병중인 친한 선배가 “내 몸 안의 암세포도 알고 보면 살려고 기를 쓰는 ‘생명’이 아니냐”며 웃던, 쓸쓸한 표정도 떠오르구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밀양’을 보면서 그 말을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탁월한 배우 전도연의 그 어떤 광기어린 연기보다, 저는 그 처절하고 안스러운 장면이 못내 잊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밀양’이 보여주는 그 모든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를, 신애라는 여자를,  ‘살려고 하는 생명’으로 기억하렵니다.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힘, ‘은밀한 햇볕(密陽)’으로요.


※ ‘밀양’을 한번 썼다가 지워버렸는데 다시 올립니다. 이 영화 때문에 몹시 우울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회복되는군요. 저 역시 ‘살려고 하는 생명’인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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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밀양, 영화

“날 크레타로 데려가 주시겠소?”(조르바)

“왜요?”(배즐)

“그놈의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거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됩니까?”(조르바)

-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말인 어제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에서 상영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러갔습니다. 꼭 보고 싶은 옛날영화이지만 국내에 DVD도 출시되지 않아 안타까웠던 참에, 이게 웬 떡이랍니까. 게다가 무료 상영! 공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판에 이걸 놓칠 리가 없죠~.

막상 가보니 ‘그리스 걸작 영화제’라는 행사 명칭에 걸맞지 않게 작은 세미나실 같은 곳에서 앞사람들 머리 사이로 몸을 기울이고 보느라 허리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


원작이 있는 영화는 대개 원작보다 못하거나 낫거나 이지만 이 영화와 책은 서로를 잘 받쳐주는 드문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실존인물이었다던 조르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저는 앤서니 퀸 말고 조르바를 연기할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열린책들에서 2000년에 새로 출간된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표지에도 앤서니 퀸이 연기한 조르바가 실렸죠.


같은 대상을 반복해 보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나 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책 제목이 ‘희랍인 조르바’였던 듯…), 그 땐 제 눈에 조르바가 제멋대로인 마초의 표본으로밖에 안보였어요. 뭐 이런 재수없는 남자가 다 있나…. 조금 읽다 말고 책을 휙 던져버렸지요.


두 번째 만난 건 서른이 넘었을 때쯤입니다. 조르바의 자유분방함과 그 원시적 배짱에, 작중 화자처럼 저도 놀랐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니요.

20대의 저를 지배했던 말은 “자네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네”라고 말하던, 프랑스 소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에 나오는 충고였습니다.
들뜬 대학 신입생에게 던져진 이 충고는 개인 이전에 전체를 보게 했지만, 그만큼 개인에겐 억압적인 명령이기도 했지요.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선언하고, 체중을 실어 온 몸으로 삶을 음미하는 조르바를 다시 만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니?’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 시작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게 30대 초반이었으니…. 한참 덜 떨어진 거죠. ^^;


나이가 더 들어 이번에 영화를 볼 땐,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주 단순화해 말한다면 크레타 섬에 광산을 개발하러 떠난 두 남자의 실패담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가진 돈을 다 털어 조르바가 산에서 목재를 아래로 굴리는 장비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대재앙이었지요. 이 재난은 책에서보다 영화에서 가속도를 타고 내려와 행사장을 엉망진창을 만드는 통나무로 실감나게 묘사되더군요.

그러나 주인공이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건, 이처럼 모든 것이 어긋나고 끝나버린 순간이었습니다. 방에서 혼자 어색하게 스탭을 밟아볼지언정 한번도 춤을 춰보지 못했던 그는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참패했지만 그로 인해 영혼이 부서지지 않았으니, 그는 스스로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춥니다.
영화는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나지만. 책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집에 돌아와 다시 소설을 뒤적이다 보니, 아래와 같은 대목도 눈에 띄는 군요.

나는 어느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주었다. 열심히 데워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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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 이런 모습 안어울려요.”(비즐리)

“(힘없이 피식 웃으며) 이 꼴이 진짜예요….”(크리스타)

“그래도 난 당신의 관객입니다. …당신은 멋진 배우인데 그걸 몰랐어요?”(비즐리)

- 영화 ‘타인의 삶’에서 술집에서 마주친 비즐리와 크리스타의 대화 -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언젠가 사는 의욕이 안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중이 없으니까 흥이 안나.”

그는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었는데, 뭘 잘 해도, 잘못 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뭘 열심히 하려는 마음도 먹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사람에겐 몇이 됐든 관중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말하는 관중이란 ‘친밀한 타인’일 터…. 그의 말이 외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난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관중이 꼭 가까운 사람이어야 해? 낯선 이의 친절로 살아간다는 말도 있다구.”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탄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은 낯선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관객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낯선 이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이 서로에게 서서히 침투해 서로를 변화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이 영화는 그게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몰래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스스로 변화하고, 상대의 삶을 변화시킨다.


배경은 통일 전 동독. 감시가 일상화되고 표현의 자유가 억눌렸던 그곳에서 비밀경찰인 비즐리는 사찰 대상인 극작가 드라이만, 그의 연인인 여배우 크리스타가 함께 사는 집을 도청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비즐리는 비밀경찰 양성학교에서 잠도 재우지 않고 고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냉혹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좀처럼 사람을 믿지 않는 그가, 도청 대상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육체를 탐하는 문화부장관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져가는 크리스타를 안타까워 하던 비즐리는 급기야 술집에서 마주친 크리스타에게 다가가 “나는 당신의 관객”이라며 제발 망가지지 말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도청 대상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비즐리의 감시는 어느덧 보호로 바뀌고 비즐리는 이들을 몰래 돕기 시작한다.


스릴러적 특성이 가미되고 반전이 거듭되는 영화라서, 혹시 보실 분이 있을까봐 줄거리를 더 자세히 쓸 수가 없다. ㅠ.ㅜ 밑줄을 긋고 싶은 더 멋진 대사가 있지만, 그것도 반전에 속하는 것이라 쓸 수가 없다.OTL

좌우간 강추!!!
연출이나 연기 모두 요란하지 않고 잔잔한 영화이지만, 참 좋다. 뒤로 갈수록 더 좋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눈빛을 지금도 난 잊지 못하겠다. 이렇게 딱딱한(?!) 소재로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인간말종으로 나오는 동독 문화부장관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일어서면서 나는 사람의 선의에 대한 이 영화의 믿음에 주저하지 않고 동의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그것도 ‘낯선 이의 친절’에 의해 변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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