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Turning Point/In transition'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7.02.06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1)
  2. 2017.01.04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4)
  3. 2016.12.31 Liminality (2)
  4. 2016.12.13 성장 (2)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을 다녀온 지 6일째. 틈틈이 해온 여행의 뒷정리를 오늘에야 마쳤다. 내 스마트폰으로 찍은 다른 사람들 사진을 보내주고, 등산복과 옷가지들, 배낭, 신발을 재질의 속성에 맞게 세탁하고 발수제를 뿌려 정리해두고, 빌려온 침낭과 배낭을 탈탈 털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려줬다. 뒷정리는 내 몸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에선 아무렇지도 않던 허리와 다리가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아프고 당긴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는 중이다.

마음의 뒷정리도 필요할까. 별 생각이 없는 상태로 걸어서 딱히 느낀 점도, 깨달은 점도 없다. 혼자 걸었던 시간도 많았지만 내 마음이 그리 수다스럽지 않아서 되레 홀가분하니 좋았다. 그래도 가기 전에 고민스러웠던 선택의 방향 하나를 정했고 돌아와서 결론을 상대에게도 전했으니, 마음이 저 혼자 분주히 일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1월 20~30일 네팔 여행. 그 중 6일을 히말라야에서 걸었다. 해발고도 1410m인 샤브루베시를 출발해 4200m의 초원지대인 랑시샤 카르카까지 다녀왔으니 2790m를 나흘간 올라갔다가 이틀 만에 내려왔다.  고산증은 겪지 않았고 추위도 예상만큼은 아니었다. 밤엔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갔지만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안고 핫팩 하나를 붙이고 겨울침낭에 들어가면 따뜻했다. 낮엔 쉴 때를 제외하곤 패딩을 거의 입지 않을 만큼 화창했다. 되레 트레킹을 며칠 더 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짧아서 아쉬웠던 여행이었다.

나이와 직업이 모두 다른 여성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함께 걸었다. ‘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 캠페인 진행자와 여성들끼리의 여행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 주최한 여행길이었다. 각자 알아서 카트만두에 모인 뒤 시작되는 여행. 2년 전 지진으로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린 랑탕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를 일부러 골랐다. ‘기억의 시간을 함께 걷다’라는 주제로,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이 땅 아래 묻혀 있는 곳이지만 다시 살아가기 위해 삶을 시작한 사람들 또한 있는 곳”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로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며,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리며 여행의 마지막 날엔 카트만두의 티벳사원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촛불을 켜기도 했다.

매일 오전 8시에 출발해 오후 5시 정도까지 걸었는데 얼음과 눈을 밟은 적은 거의 없고 거개가 흙먼지길이었다.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펼쳐진 초원지대가 나는 가장 좋았다. 숙소가 있던 걍진곰파 (해발 3830m)에서 랑시샤 카르카 (4200m)를 왕복하며 약 8시간 반 걸었다. 산의 정상을 오르는 등반 (mountaineering)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산길을 따라 걷는 트레킹 (trekking)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설산을 바라보며 대평원 같은 느낌의 대지를 하염없이 걸어갈 수 있어서, 때로 홀로 걸으며 한 점에 불과한 내 존재의 사소함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이 길이 좋았다. 큰 점프 대신 작은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듯 땅을 꾹꾹 찍어 밟으며, 돌아가서도 이렇게 한 발씩 천천히 옮기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고산지대보다 트레킹 출발 지점과 카트만두 사이 깎아지른 계곡 위의 비포장길을 지프를 타고 구불구불 오고 갈 때가 더 아찔했다. 안전벨트도 고장났고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길에서 차바퀴는 휙휙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텐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순전한 우연으로만 느껴지는 상황. 트레킹 도중 랑탕 마을을 지나면서도 그런 느낌이었다. 지진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마을.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산사태의 여파로 지금도 그 마을 앞쪽 산엔 나무들이 가로로 누워 있다. 당연한 삶을 살고 우연히 죽는 게 아니다. 삶이 우연이고 죽음이 필연이다.

낮에 설산을 바라보며 걷고 밤엔 쏟아지는 별들을 보았다. 단순한 생활. 그리고 여행 기획자가 같이 읽고 싶다고 나눠준 앨리스 메니엘의 ‘삶의 리듬’에 대한 글.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의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거리는 가늠되지 않고, 간격은 측량되지 않으며, 속도는 확실치 않고, 횟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되풀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 행복은 사건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밀물과 썰물에 달려 있다. (...) 기쁨은 우리에게 오는 길에 이미 우리를 떠난다. 우리의 삶도 차고 질 것이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삶의 리듬에 따라 깨고 쉴 것이다. 모든 것--태양의 공전과 출산의 주기적 진통까지--을 지배하는 법칙에 우리도 지배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앨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중에서 -

피할 수 없는 삶의 주기성과 리듬을 이제는 나도 조금은 안다. 중단 없는 행동과 열망 같은 건 없다. 멈춤과 후퇴, 그리고 다시 나아가기, 다시 멈춤의 반복. 내가 들어선 경계와 중립지대를 얼른 벗어나는 것보다는 내 운율에 충실하게 머무르기를 더 바란다. 그 리듬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앞일을 아직 모른다는 것, 불확실성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도 얼마만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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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직장을 그만둔 뒤 만나는 사람들이 "그래서 이제 뭐할 거야?" 라고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는 나날들. 가고 싶은 모호한 방향은 있고 그리로 가기 위해 뭘 할지 뜬구름 잡는 공상은 중구난방 피어나지만, 구체적인 '무엇'은 나도 모르겠다.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걸 조금씩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히말라야 트레킹 다녀온 뒤에 생각하자고 유보해둔 상태다.

대신 '무엇' 말고 '어떻게'는 자주 생각한다. 불확실함에 대처하고 내 삶의 틀을 다시 세우는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지금 당장 내게는 '무엇'보다 그 '어떻게'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정한 첫 번째 '어떻게'는 매일의 의례를 만든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무수한 사회에서 사람이 성년이 되는 전환의 시기에 겪는 위험들을 다스리려 통과의례를 마련하듯, 불확실한 전환의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불안을 다루는 몸과 마음의 ‘근력’ 높이기를 목적으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일의 시시한 일 두 개를 정했다. 새해 들어 오늘 나흘째니 작심삼일은 면했고 ㅋ.

더불어 생각하는 또 하나의 '어떻게'는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원하는 삶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그것 중 가능한 것들은 현재로 들여와서 지금 살아보기다.

독일의 젊은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 중 하나로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생각하기'를 권고한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를 상상하고, 그러고 나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곧장 실천해보자는 제안이다. 미래를 기분 좋게 현재로 들여와서 삶의 각 영역을 하나하나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탈바꿈시켜가자는 것.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동의 책임이 있으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저마다 자신의 전망을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능력으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희망은 벌써 오래전 부터 여기에 존재하는 미래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을 통해 현재를 비로소 제대로 향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엄기호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철학자 이종영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이야기할 때 혁명을 두 단계로 나눠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건으로서의 혁명. 그리고 두 번째는 혁명의 판타지가 붕괴하고 난 뒤 '혁명의 실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 즉 과정으로서의 혁명이다. 앞의 혁명을 혁명 1, 뒤의 혁명을 혁명 2라고 부른다면 시간 순서로 1은 2에 앞선다. 그러나 1이 혁명이기 위해서도, 그리고 뒤이어 혁명 2가 나타나기 위해서도 "혁명 2가 혁명 1에 앞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에 앞서는 2의 예로 이종영은 이스라엘의 키부츠,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 노동자 평의회 등을 거론한다. 혁명 1에 선행하는 혁명 2의 과정 속에서 보편적 개인들이 탄생한다. 이 보편적 개인들은 물론 '섬'과 같은 존재이지만 이 섬들에 기반을 두고 혁명 2가 지속되고 혁명 1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혁명 1이 일어난 뒤 잇따라 혁명 2를 맞이하고 일으키려면 그 전에 미리 부분적으로라도 혁명 2를 살아갈 주체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운동에서는 교회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선취'한 공간이자 관계라고 바라본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 이어지는 엄기호의 말.

"미리 경험해본 자만이 '이후'를 준비할 수도 있고, 맞이할 수도 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살아보지 않은 자는 살아갈 수 없다. 살아봄의 경험이 선순환을 만들 수도 있고, 살아보지 못함의 경험이 완전히 폐쇄적인 악순환의 고리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전환'의 가능성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이후'를 미리 살아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기. '이후'를 미리 살아보기. 두 책 모두 사회적 차원에서 고려해볼 과제를 말한 것이지만, 당장 불확실한 전환기를 통과하는 나는 개인의 삶 차원에서도 그런 '미래의 선취'가 있어야 정말로 삶의 틀을 바꿀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10년쯤 뒤에도 계속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근력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환경을 바꿔보고 싶거나 어떤 상황에 대한 내 반응을 바꿔보고 싶다면 스스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줄이고 실제 환경과 행동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그게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미래 선취의 방법이다.

그래서 한 일이..좀 생뚱맞을 진 몰라도, 차를 팔았다.

내가 살고 싶은 방식과 어울리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것들, 가끔씩 편리하긴 해도 꼭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 등을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자동차였다. 스물여섯에 운전면허를 딴 뒤로 차가 없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막히지 않는 도로를 고속주행하는 것은 즐기지만 시내의 정체와 자동차 소음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속도의 유혹이 올라오면 차를 빌리면 된다. 아무 미련도 없이, 내 차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속초 여행을 다녀온 뒤 차를 팔았다. 흥미로운 건 차를 팔았다고 했을 때 가까운 몇몇 사람들이 보인 반응. "아이고, 저런...." 하고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말 괜찮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일상에서 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에 잠깐 놀랐고, 농담으로 “차 팔아 그 돈으로 히말라야 갈란다” 하고 떠들고 다닌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 소소하지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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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올해 내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다가 오래 전 인류학 수업 때 들은 liminality 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의 지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기. 정해진 것 없이 모호하고 불투명한 시‧공간의 지대.

오래 전 수업시간에는 성년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의 하나로 배웠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고민을 하던 당시의 내겐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혀서 머릿속에 오래 남았나 보다. 다시 올해 약간 갑작스럽게 전환의 시기에 처하게 되면서, 삶의 어느 단계에서든 의도하지 않아도 경계의 지대를 지나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런 liminality의 상황에 처할 때만큼 삶은 ‘과정’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때가 없다.

더불어 오래 전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 읽고 마음에 새기던 책들을 떠올린다. 조셉 캠벨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캐고 탐구하여 보여주었던 영웅의 여정에서 문턱을 넘는 단계. 이 역시 liminality다.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는 없고, 앞은 세계의 온갖 신화들에서도 가장 많은 위험과 모험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유동적인 세계다. 그렇게 문턱을 넘어 기이한 괴물들이 출몰하며 어둡고 흔들리는 세계로, 고래의 뱃속으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 배우려 애쓰던 그 시간을 다른 결로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온전히 나로 살아야 하는 시간.

뚜렷한 일도, 계획도 없이 그저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다 일단 매일 꼭 해야 할 일 두 개를 정했다. 하루키가 매일 달리기를 하며 되뇌었다던 말마나따나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하찮고 사소한 일들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던 단서가 보잘 것 없지만 더 없이 소중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듯, 매일의 시시한 과제가 내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워줄 것이라 믿는다.

새해엔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만나는 사람도, 어쩌면 사는 곳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결심보다는 그런 변화에 의지하여 살아가려 한다. 내게 허용된 시간이 얼마일지도 알 수 없고 점점 더 삶이 우연이 되어버리는 세계. 담담히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며 어쨌든 내 인생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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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있는 동안에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사건이 삶에 더해질 때마다 줄거리를 계속 수정할 뿐이다. 길을 바꾼 사람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여기는 대신 그렇게 이야기를 고쳐 쓰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길을 바꾼 우리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 내 책 ‘내 인생이다’ 에필로그에 쓴 마지막 문단.

# 지난달 말일자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기 이전과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고 눈앞을 어지럽히던 희뿌연 먼지가 이제 조금씩 가라앉으려 한다. 맨얼굴의 적나라한 대면이 두렵지만 그것대로 맞이하고자 한다.

먼지 가라앉히기에 도움이 될까 하여 블로그에 ‘성장’이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이 나이에 성장이라니...하지만 내 책 에필로그에 내가 쓴 말처럼,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나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이다. 회사를 의도치 않게 그만둔 것도 내가 쓰던 삶의 이야기에 새로운 사건이 더해진 것일 뿐. 이제 나는 줄거리를 어떻게 고쳐 쓸지 생각해야 하는 시간.

#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그만두었느냐고 누가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이기도 했고...무엇을 하려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 한동안 괴로웠다. 그런 내게 존경하는 어른이 들려준 성경의 한 구절.

(예수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대목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르코 복음 6장 10~13절)

그 고장에서 너희를 받아들이고 너희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머물러 끝까지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떠나도 된다...혼자 속을 끓이다 찾아가서 하소연하던 내게 그 어른이 "맞서고 버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며 들려준 말씀이다.

낯선 사건과 함께 찾아온 분노와 슬픔과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겨우 빠져나오고 발밑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스스로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 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거의 본능처럼 저절로 보이는 반응, 나라는 사람이 이끌려가듯 취한 선택. 그런 것들을 통해 확인하게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싫지는 않다. 그러면 되었다.

# 사무실 짐을 정리해 차에 실어둔 박스 3개를 옮겨야 하는데 박스를 차에 싣다가 허리를 살짝 삐끗하기도 했고, 짐 카트를 빌리러 갈 때마다 경비실 아저씨가 안 계셔서 여태 못했다. 오늘도 갔더니 안 계신다. 이를 어쩐다, 내일 할까 하다가,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지리산 종주도 하는 사람인데 그거 하나 못 옮기랴 싶어 튼튼한 가방 2개와 배낭 1개를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책과 수첩이 대다수인 짐이 꽤 많아 보였는데 웬걸, 두 번 왕복으로 짐 옮기기 끝. 

이렇게 하면 되는 걸. 난감한 큰 덩어리를 내가 들 수 있는 크기로 잘게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뭐가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지금 해볼 수 있겠다 싶은 몫으로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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