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랑탕 트레킹을 다녀온 지 6일째. 틈틈이 해온 여행의 뒷정리를 오늘에야 마쳤다. 내 스마트폰으로 찍은 다른 사람들 사진을 보내주고, 등산복과 옷가지들, 배낭, 신발을 재질의 속성에 맞게 세탁하고 발수제를 뿌려 정리해두고, 빌려온 침낭과 배낭을 탈탈 털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돌려줬다. 뒷정리는 내 몸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에선 아무렇지도 않던 허리와 다리가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아프고 당긴다. 매일 스트레칭을 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는 중이다.

마음의 뒷정리도 필요할까. 별 생각이 없는 상태로 걸어서 딱히 느낀 점도, 깨달은 점도 없다. 혼자 걸었던 시간도 많았지만 내 마음이 그리 수다스럽지 않아서 되레 홀가분하니 좋았다. 그래도 가기 전에 고민스러웠던 선택의 방향 하나를 정했고 돌아와서 결론을 상대에게도 전했으니, 마음이 저 혼자 분주히 일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1월 20~30일 네팔 여행. 그 중 6일을 히말라야에서 걸었다. 해발고도 1410m인 샤브루베시를 출발해 4200m의 초원지대인 랑시샤 카르카까지 다녀왔으니 2790m를 나흘간 올라갔다가 이틀 만에 내려왔다.  고산증은 겪지 않았고 추위도 예상만큼은 아니었다. 밤엔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갔지만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안고 핫팩 하나를 붙이고 겨울침낭에 들어가면 따뜻했다. 낮엔 쉴 때를 제외하곤 패딩을 거의 입지 않을 만큼 화창했다. 되레 트레킹을 며칠 더 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짧아서 아쉬웠던 여행이었다.

나이와 직업이 모두 다른 여성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함께 걸었다. ‘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 캠페인 진행자와 여성들끼리의 여행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 주최한 여행길이었다. 각자 알아서 카트만두에 모인 뒤 시작되는 여행. 2년 전 지진으로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린 랑탕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를 일부러 골랐다. ‘기억의 시간을 함께 걷다’라는 주제로,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이 땅 아래 묻혀 있는 곳이지만 다시 살아가기 위해 삶을 시작한 사람들 또한 있는 곳”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예상할 수 없었던 사고로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며,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리며 여행의 마지막 날엔 카트만두의 티벳사원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촛불을 켜기도 했다.

매일 오전 8시에 출발해 오후 5시 정도까지 걸었는데 얼음과 눈을 밟은 적은 거의 없고 거개가 흙먼지길이었다.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펼쳐진 초원지대가 나는 가장 좋았다. 숙소가 있던 걍진곰파 (해발 3830m)에서 랑시샤 카르카 (4200m)를 왕복하며 약 8시간 반 걸었다. 산의 정상을 오르는 등반 (mountaineering)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산길을 따라 걷는 트레킹 (trekking)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설산을 바라보며 대평원 같은 느낌의 대지를 하염없이 걸어갈 수 있어서, 때로 홀로 걸으며 한 점에 불과한 내 존재의 사소함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이 길이 좋았다. 큰 점프 대신 작은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듯 땅을 꾹꾹 찍어 밟으며, 돌아가서도 이렇게 한 발씩 천천히 옮기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고산지대보다 트레킹 출발 지점과 카트만두 사이 깎아지른 계곡 위의 비포장길을 지프를 타고 구불구불 오고 갈 때가 더 아찔했다. 안전벨트도 고장났고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길에서 차바퀴는 휙휙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일 텐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순전한 우연으로만 느껴지는 상황. 트레킹 도중 랑탕 마을을 지나면서도 그런 느낌이었다. 지진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마을.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산사태의 여파로 지금도 그 마을 앞쪽 산엔 나무들이 가로로 누워 있다. 당연한 삶을 살고 우연히 죽는 게 아니다. 삶이 우연이고 죽음이 필연이다.

낮에 설산을 바라보며 걷고 밤엔 쏟아지는 별들을 보았다. 단순한 생활. 그리고 여행 기획자가 같이 읽고 싶다고 나눠준 앨리스 메니엘의 ‘삶의 리듬’에 대한 글.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의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거리는 가늠되지 않고, 간격은 측량되지 않으며, 속도는 확실치 않고, 횟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되풀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 행복은 사건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밀물과 썰물에 달려 있다. (...) 기쁨은 우리에게 오는 길에 이미 우리를 떠난다. 우리의 삶도 차고 질 것이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삶의 리듬에 따라 깨고 쉴 것이다. 모든 것--태양의 공전과 출산의 주기적 진통까지--을 지배하는 법칙에 우리도 지배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 앨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중에서 -

피할 수 없는 삶의 주기성과 리듬을 이제는 나도 조금은 안다. 중단 없는 행동과 열망 같은 건 없다. 멈춤과 후퇴, 그리고 다시 나아가기, 다시 멈춤의 반복. 내가 들어선 경계와 중립지대를 얼른 벗어나는 것보다는 내 운율에 충실하게 머무르기를 더 바란다. 그 리듬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앞일을 아직 모른다는 것, 불확실성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도 얼마만의 일인가.

 

 

'내 인생의 Turning Point > In transi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1) 2017.02.06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4) 2017.01.04
Liminality  (2) 2016.12.31
성장  (2) 2016.12.13
Posted by sanna

직장을 그만둔 뒤 만나는 사람들이 "그래서 이제 뭐할 거야?" 라고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는 나날들. 가고 싶은 모호한 방향은 있고 그리로 가기 위해 뭘 할지 뜬구름 잡는 공상은 중구난방 피어나지만, 구체적인 '무엇'은 나도 모르겠다.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걸 조금씩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히말라야 트레킹 다녀온 뒤에 생각하자고 유보해둔 상태다.

대신 '무엇' 말고 '어떻게'는 자주 생각한다. 불확실함에 대처하고 내 삶의 틀을 다시 세우는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지금 당장 내게는 '무엇'보다 그 '어떻게'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정한 첫 번째 '어떻게'는 매일의 의례를 만든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무수한 사회에서 사람이 성년이 되는 전환의 시기에 겪는 위험들을 다스리려 통과의례를 마련하듯, 불확실한 전환의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불안을 다루는 몸과 마음의 ‘근력’ 높이기를 목적으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일의 시시한 일 두 개를 정했다. 새해 들어 오늘 나흘째니 작심삼일은 면했고 ㅋ.

더불어 생각하는 또 하나의 '어떻게'는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원하는 삶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그것 중 가능한 것들은 현재로 들여와서 지금 살아보기다.

독일의 젊은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 중 하나로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생각하기'를 권고한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를 상상하고, 그러고 나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곧장 실천해보자는 제안이다. 미래를 기분 좋게 현재로 들여와서 삶의 각 영역을 하나하나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탈바꿈시켜가자는 것.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동의 책임이 있으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저마다 자신의 전망을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능력으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희망은 벌써 오래전 부터 여기에 존재하는 미래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을 통해 현재를 비로소 제대로 향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엄기호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철학자 이종영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이야기할 때 혁명을 두 단계로 나눠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건으로서의 혁명. 그리고 두 번째는 혁명의 판타지가 붕괴하고 난 뒤 '혁명의 실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 즉 과정으로서의 혁명이다. 앞의 혁명을 혁명 1, 뒤의 혁명을 혁명 2라고 부른다면 시간 순서로 1은 2에 앞선다. 그러나 1이 혁명이기 위해서도, 그리고 뒤이어 혁명 2가 나타나기 위해서도 "혁명 2가 혁명 1에 앞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에 앞서는 2의 예로 이종영은 이스라엘의 키부츠,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 노동자 평의회 등을 거론한다. 혁명 1에 선행하는 혁명 2의 과정 속에서 보편적 개인들이 탄생한다. 이 보편적 개인들은 물론 '섬'과 같은 존재이지만 이 섬들에 기반을 두고 혁명 2가 지속되고 혁명 1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혁명 1이 일어난 뒤 잇따라 혁명 2를 맞이하고 일으키려면 그 전에 미리 부분적으로라도 혁명 2를 살아갈 주체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운동에서는 교회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선취'한 공간이자 관계라고 바라본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 이어지는 엄기호의 말.

"미리 경험해본 자만이 '이후'를 준비할 수도 있고, 맞이할 수도 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살아보지 않은 자는 살아갈 수 없다. 살아봄의 경험이 선순환을 만들 수도 있고, 살아보지 못함의 경험이 완전히 폐쇄적인 악순환의 고리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전환'의 가능성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이후'를 미리 살아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기. '이후'를 미리 살아보기. 두 책 모두 사회적 차원에서 고려해볼 과제를 말한 것이지만, 당장 불확실한 전환기를 통과하는 나는 개인의 삶 차원에서도 그런 '미래의 선취'가 있어야 정말로 삶의 틀을 바꿀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10년쯤 뒤에도 계속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근력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환경을 바꿔보고 싶거나 어떤 상황에 대한 내 반응을 바꿔보고 싶다면 스스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줄이고 실제 환경과 행동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그게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미래 선취의 방법이다.

그래서 한 일이..좀 생뚱맞을 진 몰라도, 차를 팔았다.

내가 살고 싶은 방식과 어울리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것들, 가끔씩 편리하긴 해도 꼭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 등을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자동차였다. 스물여섯에 운전면허를 딴 뒤로 차가 없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막히지 않는 도로를 고속주행하는 것은 즐기지만 시내의 정체와 자동차 소음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속도의 유혹이 올라오면 차를 빌리면 된다. 아무 미련도 없이, 내 차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속초 여행을 다녀온 뒤 차를 팔았다. 흥미로운 건 차를 팔았다고 했을 때 가까운 몇몇 사람들이 보인 반응. "아이고, 저런...." 하고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말 괜찮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일상에서 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에 잠깐 놀랐고, 농담으로 “차 팔아 그 돈으로 히말라야 갈란다” 하고 떠들고 다닌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 소소하지만 시작이다.

 

'내 인생의 Turning Point > In transi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1) 2017.02.06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4) 2017.01.04
Liminality  (2) 2016.12.31
성장  (2) 2016.12.13
Posted by sanna

올해 내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다가 오래 전 인류학 수업 때 들은 liminality 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의 지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기. 정해진 것 없이 모호하고 불투명한 시‧공간의 지대.

오래 전 수업시간에는 성년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의 하나로 배웠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고민을 하던 당시의 내겐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혀서 머릿속에 오래 남았나 보다. 다시 올해 약간 갑작스럽게 전환의 시기에 처하게 되면서, 삶의 어느 단계에서든 의도하지 않아도 경계의 지대를 지나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런 liminality의 상황에 처할 때만큼 삶은 ‘과정’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때가 없다.

더불어 오래 전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 읽고 마음에 새기던 책들을 떠올린다. 조셉 캠벨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캐고 탐구하여 보여주었던 영웅의 여정에서 문턱을 넘는 단계. 이 역시 liminality다.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는 없고, 앞은 세계의 온갖 신화들에서도 가장 많은 위험과 모험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유동적인 세계다. 그렇게 문턱을 넘어 기이한 괴물들이 출몰하며 어둡고 흔들리는 세계로, 고래의 뱃속으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 배우려 애쓰던 그 시간을 다른 결로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온전히 나로 살아야 하는 시간.

뚜렷한 일도, 계획도 없이 그저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다 일단 매일 꼭 해야 할 일 두 개를 정했다. 하루키가 매일 달리기를 하며 되뇌었다던 말마나따나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하찮고 사소한 일들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던 단서가 보잘 것 없지만 더 없이 소중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듯, 매일의 시시한 과제가 내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워줄 것이라 믿는다.

새해엔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만나는 사람도, 어쩌면 사는 곳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결심보다는 그런 변화에 의지하여 살아가려 한다. 내게 허용된 시간이 얼마일지도 알 수 없고 점점 더 삶이 우연이 되어버리는 세계. 담담히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며 어쨌든 내 인생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Turning Point > In transi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1) 2017.02.06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4) 2017.01.04
Liminality  (2) 2016.12.31
성장  (2) 2016.12.13
Posted by sanna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있는 동안에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사건이 삶에 더해질 때마다 줄거리를 계속 수정할 뿐이다. 길을 바꾼 사람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여기는 대신 그렇게 이야기를 고쳐 쓰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길을 바꾼 우리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 내 책 ‘내 인생이다’ 에필로그에 쓴 마지막 문단.

# 지난달 말일자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기 이전과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고 눈앞을 어지럽히던 희뿌연 먼지가 이제 조금씩 가라앉으려 한다. 맨얼굴의 적나라한 대면이 두렵지만 그것대로 맞이하고자 한다.

먼지 가라앉히기에 도움이 될까 하여 블로그에 ‘성장’이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이 나이에 성장이라니...하지만 내 책 에필로그에 내가 쓴 말처럼,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나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이다. 회사를 의도치 않게 그만둔 것도 내가 쓰던 삶의 이야기에 새로운 사건이 더해진 것일 뿐. 이제 나는 줄거리를 어떻게 고쳐 쓸지 생각해야 하는 시간.

#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그만두었느냐고 누가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이기도 했고...무엇을 하려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 한동안 괴로웠다. 그런 내게 존경하는 어른이 들려준 성경의 한 구절.

(예수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대목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르코 복음 6장 10~13절)

그 고장에서 너희를 받아들이고 너희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머물러 끝까지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떠나도 된다...혼자 속을 끓이다 찾아가서 하소연하던 내게 그 어른이 "맞서고 버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며 들려준 말씀이다.

낯선 사건과 함께 찾아온 분노와 슬픔과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겨우 빠져나오고 발밑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스스로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 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거의 본능처럼 저절로 보이는 반응, 나라는 사람이 이끌려가듯 취한 선택. 그런 것들을 통해 확인하게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싫지는 않다. 그러면 되었다.

# 사무실 짐을 정리해 차에 실어둔 박스 3개를 옮겨야 하는데 박스를 차에 싣다가 허리를 살짝 삐끗하기도 했고, 짐 카트를 빌리러 갈 때마다 경비실 아저씨가 안 계셔서 여태 못했다. 오늘도 갔더니 안 계신다. 이를 어쩐다, 내일 할까 하다가,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지리산 종주도 하는 사람인데 그거 하나 못 옮기랴 싶어 튼튼한 가방 2개와 배낭 1개를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책과 수첩이 대다수인 짐이 꽤 많아 보였는데 웬걸, 두 번 왕복으로 짐 옮기기 끝. 

이렇게 하면 되는 걸. 난감한 큰 덩어리를 내가 들 수 있는 크기로 잘게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뭐가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지금 해볼 수 있겠다 싶은 몫으로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내 인생의 Turning Point > In transi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1) 2017.02.06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4) 2017.01.04
Liminality  (2) 2016.12.31
성장  (2) 2016.12.13
Posted by sanna

하나의 주제로 잡지 한 권을 꾸미는 독특한 계간지 [1/n]의 여름호 주제는 '환승'입니다.

비행기나 버스를 갈아타듯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을 주제로 한 권을 꾸몄는데요. 전체 책의 구성과 디자인이 재미있네요. 각 꼭지 글들도 좋습니다. 방금 전에 손에 든 잡지를 밑줄 그어가며 읽었어요. (위 그림을 클릭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목차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버스 터미널에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답니다.

       *        *        *        *        *

버스 터미널에서

얼마 전 나는 17년 넘게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렸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불안했다. 이 장거리 여행길에, 갈아 탈 버스가 있기나 할까……. 하지만 이대로 더는 가고 싶지 않아서 큰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탈 버스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 내리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 하고 어디로 갈지 궁리하며 터미널 근처를 서성이던 내가 한 일은 다른 환승객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18명의 환승객들을 만났다. 회계사가 요가학원 원장이 되고 광고회사 임원이 요리사가 됐으며 간호사가 소설가가 되고 음반가게 사장이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성공적인 환승의 결과보다 나는 이들 안에서 꿈틀대며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 마음의 씨앗이 궁금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전복하고 싶은 열망? 혹은 오래 묵은 꿈을 더 늦기 전에 실현하겠다는 의지? 


이전의 삶이 좋기만 하다면 누가 환승을 꿈꾸랴. 한 분야에서 오래 길을 닦아 어른이 되고 나면 젊은 날의 혼란 따위 말끔히 해결하고, 살아가는 일, 아니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만큼은 도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기대는 번번이 배신당하며 성인이 되어도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개 나이 마흔쯤 되면 발달심리학자 프레데릭 허드슨의 말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갖지 못했고, 현재 가진 것은 바라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각은 여러 계기로 찾아온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선 자각이 위기의식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았다. 일 중독자였던 회계사는 어느 날 아침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일시적 마비 증세를 겪은 뒤 “일과 돈 말고 내 인생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승진을 거듭했으나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이 궁했던 외국계 회사 사장에겐 “삶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는 자각이 깃들었고, 생계 때문에 음반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 어떤 이는 IMF 외환위기 때 한 팀이 몽땅 해고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단단해보였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겪었고, 10년 위 회사 선배들을 지켜보며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구석에 밀쳐두었던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올렸다. 위기가 자기 삶에서 비롯되었건 외부에서 왔건 이들의 마음속에 터 잡기 시작한 질문은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내 속도감으로 살아가고 있나” 하는 거였다.


그런 질문을 품는다고 누구나 ‘환승’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환승을 선택하는 이들이 상세한 지도와 시간표를 갖고 있을 거라 여기며 부러워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환승객들 중 정밀하게 짜인 계획표대로 움직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NGO 활동가가 된 전직 광고회사 임원은 “회복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었는데, ‘그 때가 그만둘 때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내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고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다. 반면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이건, 뭔가를 꿈꾸는 열망 때문이건, 언젠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지향이 ‘일시적 충동’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지속적으로 나를 부르면, 더 이상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때를 만나게 된다. 그 때에 내린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미친 짓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만난 삶은 그 후회까지 포함해 한 번은 살아야만 하는 삶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이들은 ‘내가 어느 때 가장 행복했던지’를 오래 생각했고, 자신의 강점과 연결되지 않는 판타지를 꿈으로 착각하지 않으려 주변의 도움을 청했으며, 온전히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하프타임을 갖고 미래의 꿈을 기록했다. 어디로 가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일단 이만큼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큰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러다보면 별개인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어 뒤돌아보면 어느새 하나의 길이 만들어져 있곤 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농부가 된 이는 내게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으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누군가 뭔가를 이루었다면 행동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단 뛰어들어 경험하고 성찰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내가 환승객들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어쩌면 환승을 선택할 때 필요한 필수품은 상세한 노선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서로 이어지고 통합되어 결국은 ‘내 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믿음뿐일지도 몰랐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나는 곧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힘』에서 들려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가자는 대로 그 부름을 따라 살면,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눈빛을 달라지게 하는 조그만 직관을 따라 가다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말.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부러 좇은 게 아닌데도 마치 계획이나 한 듯 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지거나 도움을 받는 경험을 겪었다.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보트 제작을 배우고 돌아오니 보트 쇼가 열리고 요트계류장이 속속 들어서는 식이다. 물론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반대로 악운이 겹치고 학비 대줄 돈이 없어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라던 캠벨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궤도였다.


손에 지도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환승을 선택하면서 남들 따라 ‘되는 쪽’에 걸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성배를 찾아서』의 오래된 프랑스판 문헌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신화에서 남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곧잘 길을 잃는다. 공연장 대표가 된 전직 변호사의 말마따나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대신 나만의 길을 고르고, 자신의 괴물과 싸우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환승객들에게 인생 전환은 지금의 자기로부터 멀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난 18명 중 이전보다 수입이 확실히 늘어난 사람은 4명뿐이다. 세속적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순 없겠지만 삶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들로부터 나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기쁨에 대해 들었고 먼 길을 돌아 미리 계획된 듯한 소명을 만났다는 충만함도 엿보았다. 반면 또 다시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자기반성, 가끔 환승을 후회한다는 고백도 들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가 어떻든 단 한 번의 전환으로 삶이 완성되리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승객들은 미래의 불투명함을 불안하게 여기는 대신 우연에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환승하는 우리들은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Posted by sanna
잔인했던 5월. 
벌써 1년....
지난해 이맘 때, 유난히 죽음의 소식이 잇따랐다. 모두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계속 생기냐"며 불안한 안부를 주고 받을 만큼....병마와 싸워 이겨주기를 바랐던 장영희 교수부터, 친구였던 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씨, 그리고 지난 해 오늘,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까지...

눈에 핏발이 선 채 밤을 꼬박 새운 날도 부지기수고,  
울음을 터뜨리며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꼬리뼈가 부러지는 황당한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인생의 방향을 트는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일련의 죽음들이 던진 질문의 영향도 컸다.
맥락은 모두 달랐지만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이들은,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던 질문과 대면하게 했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이것이 네가 원하던 삶이냐고. 
1년 뒤.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고 있는가.
......
부끄럽고 혼란스럽다.
...먼저 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노무현
정승혜
장영희


Posted by sanna

[중년의 터닝포인트]<13>  정유정 씨-간호사에서 소설가로

Before: 간호사

After: 소설가

Age at the turning point: 35


# 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들어오던 날이었다. 방 10개가 주르륵 붙어있던 한옥에서 하숙을 하던 대학생과 어른들은 출정식이라도 하듯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한 명 뿐이던 여고생에게 “집 잘 보라”고 당부하더니 모두 굳은 얼굴로 떠났다.

밤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던 여고생은 대학생이 묵던 옆방에 들어가 책을 하나 골랐다. 재미없는 책을 보면 잠이 올까 싶어 고른 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 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총소리가 그쳐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쳐둔 이불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새벽이었다. 깊은 정적에 휩싸인 새벽녘의 거리를 바라보던 여고생에게서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올해 제5회 세계문학상을 탄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의 작가 정유정 씨(43)는 자신이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를 여고 1학년이던 그날 알았다고 했다. 그 울음이 답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꿈결처럼 홀리고 울게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 후 한시도 소설가의 꿈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자신의 꿈과 마주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는 5년 6개월간 간호사로, 9년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일한 뒤 35살 때인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설가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물으니 그는 “생존 투쟁 때문”이라며 씩 웃었다.


‘의사 딸’을 소망했던 그의 엄마는 2년 더 다니는 의대 교육과정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6살 난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전남 함평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학교 대표 글쓰기 선수였지만 어머니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희곡을 쓰다 속절없이 요절한 어머니의 오빠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반항도 못하고, 광주로 유학을 와서도 공부 안하고 어영부영하다 간호대에 들어갔어요. 그 때도 친구들 글쓰기 숙제를 대신 해주면서 언젠가는 내 글을 써야지, 하고 열병처럼 끙끙 앓았지요.”


간호사가 된 뒤 문학공부를 해볼 요량이었지만 이번엔 모진 운명이 그의 ‘삶을 침몰’시켰다.


“제가 22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암에 걸리시는 바람에 3년 반 동안 간병을 했어요. 제 직장인 병원 중환자실에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엔 동생 3명의 학비를 대야 하는 임무가 남았지요. 20대 땐 ‘살아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밤에 혼자 습작을 한답시고 끼적거리다가 '내 인생은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신이 나를 20대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절대로 안갈 겁니다.”


어린 나이에 버거웠을 부양의 임무를 모두 마친 뒤 29살 때 결혼을 하면서 그는 남편에게 “집을 사면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받아두었다고 한다. 35살 때 집을 산 지 두 달 만에 그는 사표를 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기대” 때문에 신이 났다.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글을 쓰고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나면 오후 늦게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다. 저녁이면 산에 가거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을 쳤다.


그러나 공모전에 잇따라 떨어지다 보니 “나는 너무 하찮은 개구리”라는 절망감이 기대의 자리를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과대망상이 아닐까’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며 온갖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떨어지고 몸져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쓰는 과정을 반복하기를 7년 째.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응모한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 문학상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당선됐다.


“벼랑 끝에서 드디어 구원받은 심정”이었다니 이제 편안하게 ‘꽃길’을 걸어도 되련만, 시상식장에서 만난 소설가 서영은의 충고는 그를 다시 가시밭길로 몰아냈다.


“저더러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하시더라고요. 안주하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성인 문학에 도전해보라는 격려이기도 했고요.”


그 말을 마음에 새긴 그는 쏟아지던 청소년 관련 원고 청탁을 모두 거절한 채 다시 작품에 매달렸다. 다 쓴 소설을 두 번이나 폐기하고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직접 들어가 취재를 하면서 맺은 결실이 이번에 상을 탄 ‘내 심장을 쏴라’다.

책의 ‘작가의 말’에서 그는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이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다고 썼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던 20대, 세상의 거절과 모욕을 견디면서 보낸 30대 초반, 운명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느꼈던 그 시절,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던 그를 바라보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됐다.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에 필사적으로 글에 매달리며 자신의 삶으로 답해온 저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Posted by sanna

[중년의 터닝포인트]<12> 이인식 씨- 대기업 상무에서 과학칼럼니스트로

Before: 대성그룹 상무이사
After: 과학칼럼니스트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지금이야 ‘평생직장’이 낡은 개념이 되었지만 18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평생직장 시대’에 42살에 큰 기업체 상무가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칼럼니스트인 이인식 씨(64)를 이 시리즈의 인터뷰 대상으로 떠올린 이유는 그래서였다. 금성반도체(현 LG 정보통신)에서 최연소 부장이 되었고 대성그룹 상무이사를 지낸 그는 중년의 절정인 46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다. 인생 2모작, 3모작이 낯설지 않은 요즘에도 쉽지 않을 결단이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지난 주말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두 번 놀랐다. 크고 멋진 아파트는 ‘글쟁이’의 삶은 곤궁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렸다. 그의 서재에 들어서면서 다시 놀랐다. 널찍한 책상과 빽빽한 서가를 기대했으나 너무 낡아 무늬목이 너덜거릴 지경이 되어버린 작은 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의 아내가 옆에서 “총각 때부터 쓰던 책상”이라고 들려주었다.

이 작은 책상에서 그는 원고지에 글을 쓴다. 매체에 칼럼을 쓸 땐 그의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컴퓨터에 글을 입력해주고, 책을 쓸 땐 A4 용지에 깨알같이 글을 써서 넘긴다.

‘왜 컴퓨터를 안 쓰느냐’고 묻자 그는 “컴퓨터를 안 쓰는 게 아니라 워드 프로그램을 안 쓰는 것”이라고 정정해줬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메일도 쓰지만, 펜으로 글을 쓰는 게 너무 익숙해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작인 472페이지짜리 책 ‘지식의 대융합’도 그렇게 썼다. 워드로 이리저리 문장을 옮기고 조합하는 편집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겐 거의 ‘미션 임파서블’의 경지다.


● “결국은 사람이 재산이에요”


그는 중년이 될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늘 ‘생존’이 목표였다. 대학 4년 내리 입주가정교사를 했고 졸업할 때도 취직이 급했다. 금성반도체에 입사한 뒤 정신없이 달려 8년 만에 부장이 되고 이후 일진금속을 거쳐 대성그룹에서 87년 상무이사가 되고 보니 42살이었다.

“돈은 남 못지않게 벌었지만 참 허망했어요. 내 인생이 회사원으로 끝나나…, 한숨만 나왔지요.”


글쓰기는 그의 은밀한 꿈이다. 그의 첫 책은 금성 반도체에 다닐 때인 75년 사보에 연재한 꽁트 12개를 묶어 펴낸 소설집 ‘환상 귀향’이었다. 생활에 치여 꿈이 시들해질 무렵, 어쩌다 연이 닿아 잡지 ‘컴퓨터 월드’의 기획을 알음알음 돕기 시작했다. 미국 과학 잡지를 매달 10여권씩 받아 읽으며 기사 기획을 돕다 보니 직접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 ‘하이테크 혁명’과 ‘사람과 컴퓨터’다.


잡지 일을 돕고 글을 쓰다보니 제대로 된 과학 잡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91년 가을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까지 쏟아 넣어 잡지를 만들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잡지를 두 번이나 만들었어요. 결국 94년 여름에 완전히 망했는데, 월급 줄 돈이 없어 직원들이 컴퓨터를 들고 가는 걸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했어요. 하는 수 없이 아들은 군대에 보내고…, 그야말로 밑바닥이었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제 드라마틱한 반전이 시작될 차례’라고 기대했다. 웬걸, 극적 반전은 없었다. 미련하다 싶을 만큼 우직한 전진만 있었을 뿐이다.

92년 2월 ‘사람과 컴퓨터’가 발간되고 두 달 뒤 시사월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면서부터 그의 책과 칼럼을 본 출판사, 매체의 글 요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학칼럼니스트가 드문 시절이라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월간지->주간지->일간지로 글이 실리는 매체 폭이 확대됐고 잡지와 출판사의 기획을 도와주며 돈을 벌었다. 외환위기가 닥친 97년엔 연재도 다 끊겨 자다가 가위에 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절망감 역시 그는 글로 달랬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인간관계 덕분이에요. 인생 전환도 인간관계가 좋아야만 가능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싸가지 없는 사람’은 전환도 어려워요.”


그가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까치 출판사 박종만 사장의 소개 덕분이었다. 김영사 박은주 사장으로부터는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그가 ‘바닥에 처한’ 94년 추석 무렵, 박 사장은 ‘사람과 컴퓨터’ 책만 보고 그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하더니 추석 직전 직원을 보내 “선생님은 국보”라면서 100만원을 건네기도 했다.


“결국은 사람이 재산입니다. 돈보다 사람예요. 일감이 들어오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요. 저 역시 판단착오로 몇 번 신뢰를 그르치고 뼈아프게 반성한 적도 있지만, 일단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제가 만나는 사람의 인간적 삶에 동참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한 분야 10년 파면 길이 트입니다”

 

어떤 이는 그를 ‘잡학의 대가’라고 부른다. 과학지식의 온갖 분야를 섭렵하지만 관련 분야 석, 박사 학위는 없다. 칼럼을 쓸 때 간판이 필요하다고들 해서 95년에 ‘과학문화연구소’ 간판을 달았을 뿐이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으나, 엄청난 공부로 이뤄낸 글쓰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른쪽 사진은 이인식씨가 펴낸 책들)


96년 월간지  ‘과학동아’에 성에 대한 연재를 시작할 때도 그는 2년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고시원에 출퇴근하면서 공부하고 글을 썼다. 다음엔 어디로 갈지 모호할 때에도 그는 늘 책 속에서 길을 발견했다.


“컴퓨터 인공지능을 공부하다보니 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뇌를 공부하다보니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죠. 억지로 분야를 넓힌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책 속에 답이 있고, 한 분야를 10년 파면 길이 열립니다.”


18년 전, 회사를 그만둘 때 그도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큰 조직의 소모품 대신 작아도 ‘내 것’을 생산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컸다. “별로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별로 없다”는 배짱도 한몫했다.


18년 후인 지금, ‘내 것’을 만들고 싶다던 그의 꿈은 실현된 셈이다. 자기 이름 석자로 브랜드가 되었다. 요즘 그의 수입은 인세 원고료 강연료 기획료 등 4가지 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점점 강연의 비중이 늘어난다. 14일에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서 특강이 예정돼 있다. 


“조직 안과 밖의 가장 큰 차이는 안정적인 수입인데, 때론 과감한 포기도 필요해요. 돈도 안정적으로 벌고, ‘내 것’ 생산도 하고 그렇게 너무 욕심내면 안돼요. 친구들이 연봉 1억 받을 때 나는 쪼들렸지만, 지금 나는 일하는데, 연봉 1억 받던 친구들은 은퇴하고 다 놉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듯 결국은 세상이 공평한 거거든요. 그러니 좋아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내공을 쌓으면 언젠가 한번은 찬스가 옵니다.”

Posted by sanna

[중년의 터닝포인트]<11> 김용규씨-벤처기업CEO에서 숲생태 전문가로

Before: 벤처기업 CEO
After: 숲생태 전문가, 행복숲 공동체 대표, 농부
Age at the turning point: 39


그의 숲에 가는 길은 멀고 깊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충북 괴산 행 버스를 타고 내려간 뒤 다시 택시를 타고 숲으로 향했다. 산길에 접어들자 택시 기사는 계속 “어제 세차했는데…”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비포장 길 앞에서 딱 멈추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이런 차로는 못 가요.”


별 수 없이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산 속으로 한참 걷자 산 위쪽 꽤 높은 지대에 나무 집이 보였다. 저런 곳에서 살면 세상 소음이야 들리지 않겠지만…, 그 적요가 부럽다기보다 ‘무섭지 않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웬걸, 갑자기 개 두 마리가 컹컹 짖으며 적막을 깨뜨렸고 그 뒤로 여자 아이가 웃으며 달려 나왔다. 김용규 씨(42)가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늦은 아침 식사를 방금 마친 듯 그의 아내는 달그락 달그락 접시를 씻고 있었다. 산 속에서 막 기지개를 켠 가족의 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이 들어선 곳은 말 그대로 그의 숲이다. 그는 벤처회사 CEO를 하다 3년 전 그만 둔 뒤 뜻을 같이 하는 사람 5명과 함께 이곳 숲 7만5000평을 샀다. 앞으로 이 숲을 공동체, 생태 교육의 장소, 창작의 산실로 쓸 계획이며 그가 먼저 지난해 숲 속에 집을 지어 자리를 잡았다. 그는 숲에서 배운 것들을 최근 ‘숲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대도시에서 시골로, 사무실에서 숲 속으로. 간단치 않은 전환이다. 그 씨앗이 뿌려진 건 언제였을까. 변화는 곧잘 낯선 손님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도 5년 전쯤 한창 회사를 운영할 때 우연히 ‘메신저’를 만났다고 했다.


“한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였어요. 인터뷰 도중 기자가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는 거예요. 한 3분가량 멍하니 있었어요. 내 꿈이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아, 내가 꿈을 잃어버렸구나’하고 자각하는 계기가 됐지요.”


당시는 그가 다니던 이동통신회사가 1999년 벤처 붐을 타고 설립한 벤처 회사에서 그가 CEO로 일하던 때였다. 가족도 미국에 보내놓고 회사를 키우려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사람 만나는 게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도 그러려니 하던 그에게 갑자기 던져진 질문, “꿈이 뭐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주말만 되면 MTB를 타고 남산 오르내리고 산에 다니면서 ‘내 꿈이 어디 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때 유학을 다녀와 학자가 되겠노라 꿈꾸던 그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당장의 답은 구해지지 않았지만, 이전에 잘 몰랐던 숲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 소나무는 어떻게 바위를 뚫고 자랄 수 있었는지, 질경이 풀은 왜 하필 하고많은 땅 중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혼자 숲과 관련한 책을 찾아 읽을 때만 해도 그게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꿈을 고민하다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나를 찾아 떠나는 꿈 여행’에도 참여했다. 그를 눈여겨본 구 소장이 이메일 뉴스레터인 ‘마음을 나누는 편지’ 필진으로 참여하라고 제안했고, 그는 산에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식물 자연을 주제로 칼럼을 썼다. 내친 김에 숲 연구소 전문가 과정도 수료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숲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며 그에게도 꿈 하나가 생겼다. “지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숲을 만들고 싶다”는 꿈.


“상상해보세요. 이 숲에서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무를 하나씩 심는 거예요. 자신만의 소망나무를 심고 거기에 자기의 꿈을 적은 메모를 붙여요. 이게 쌓이면 이곳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스토리텔링 포레스트 (Storytelling Forest)’가 되는 거예요. 제가 계속 나무를 보살피고 ‘당신 나무에 꽃이 피었어요’ 이런 소식을 홈페이지에서 업데이트해주는 거죠. 멋지지 않아요?”


반대하는 아내를 수목원을 함께 다니며 설득한 끝에 2006년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팔아 괴산에 내려왔다. 농사도 짓고 지난해 여름엔 넉 달간 집을 직접 지었다. 집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재료는 일체 쓰지 말자는 원칙을 정하고 시멘트를 쓰지 않은 채 밭 흙을 다져 기둥을 세우고 목재로  작은 집을 지었다.


직접 집을 짓다니. 그것도 마흔이 될 때까지 사무실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져 “집을 어떻게 지어요?”하고 묻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머리로만 생각하니까 그게 엄청 어려워 보이는 거예요. 집을 어떻게 짓긴요. 그냥 짓는 거죠. 집 잘 짓는 사람 모셔서 자문도 구하고요.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어가면서 배우는 거잖아요.”


숲에 들어온 뒤 그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과잉친절 베풀기를 그만두었고 거침이 없이 당당해졌다. 세상 흐름에 휘둘리지 않으며 혼자 있으면 “우주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어 충만해진다고 했다.


아직 다 현실화되지 않은 그의 계획을 듣다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봤는데 결국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공포는 없을까?


“왜 없겠어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계속 있어요. 그걸 끌어안고 가는 거죠. 되레 두려움은 죽을 때까지 동행하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쉬워지죠. 또 이 길이 내 길인지 아닌지는 길을 잃어보기 전엔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가 밖에 나가 숲을 보여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지난해까지 양평에서 생애설계를 돕는 교육 프로그램인 ‘씨앗에서 숲으로’라는 프로그램을 3회 운영했는데 올해부터는 괴산의 숲으로 옮겨와 진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20여명이 거쳐 간 ‘씨앗에서 숲으로’는 내 안의 씨앗을 발견해 숲의 일원인 나무로 성장하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심리학자와 함께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 저는 숲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숲에 가면 사람들에게 당신을 닮은 나무를 찾아 그 아래 서보라고 해요. 전부 제각각이에요. 어떤 사람은 뒤틀린 나무, 어떤 사람은 가시 많은 나무를 택하죠.”


그는 자기자신을 닮은 나무로 흔히들 ‘엄나무’라고 부르는 음나무를 꼽았다. 잔가지에 억센 가시가 잔뜩 들어찬 음나무처럼 그도 20~30대엔 가시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숲을 만난 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이 가시를 버리는 것”을 보았고, 변화의 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여전히 그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의 가족은 숲에서 가까운 증평 군에 산다. 당장 초등학교 5학년인 딸 아이 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저축해둔 돈을 다 쓰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낯선 이의 무례한 질문에도 범상하게 “계속 노력할 것이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던 그가 “여기는 제가 숙연해지는 장소”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저 높은 곳 바위 위에 심하게 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의 성장배경을 들려주던 그의 말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들렸다.


“잘 보세요. 저기 느티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끌어안은 모양새로 뻗어 있잖아요. 어느 날 바위 위에 떨어진 느티나무 씨앗이 점점 자라면서 제 살 길을 저렇게 찾은 거예요. 소나무처럼 바위를 뚫을 힘이 없는 느티나무 뿌리가 선택한 방법은 바위를 옆으로 끌어안는 것이었어요. 저렇게 바위를 안으면서 자신의 뒤로 신갈나무가 자랄 공간까지 만들어줬잖아요. 어려운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내는 삶처럼 보이지 않나요?”



Posted by sanna

[중년의 터닝포인트]<10> 윤학 씨- 변호사에서 공연장 대표 겸 잡지 발행인으로


그는 예전에 돈을 많이 벌었던 변호사다.
변호사 일을 접었지만 면허를 반납한 것은 아니니 여전히 변호사인 건 마찬가지다. 그런 그의 인생 전환도 절박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화이트홀 윤학 대표(52)를 만나러 가던 날도  ‘돈이 많은데 뭔들 못하겠나’하는 삐딱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물어보았다. “여전히 변호사인데, 인생을 걸고 방향을 바꾸셨다고 할 순 없지요?”

그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인생을 걸고? 아, 너무 비장하시네! 하하하~, 전 여전히 그대로예요. 예전엔 한 사람만 변호했을 뿐이고, 지금은 문화를 통해 다수를 변호하니 그게 좀 달라진 점이랄까.”


커다랗게 웃느라 금세 실눈이 되는 그의 웃음엔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강조했다. “고향 뒷산에서 내려다본 바다 수면 위에 부서지던 햇볕”을 묘사하면서 금세 그리운 표정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처음에 삐딱했던 마음도 스르르 풀렸다. 열정은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다.


그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공연장 화이트홀, 갤러리 화이트의 대표이자 월간 ‘가톨릭 다이제스트’와 ‘월간 독자’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너무 힘들고 바빠 도저히 병행할 수가 없어” 지난해 여름 변호사 업무를 완전히 정리한 뒤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12년 전 그가 인수하기 전, 고작 500부 발행되던 ‘가톨릭 다이제스트’는 지금 정기구독 독자만 6만여 명이다. 종교를 뛰어넘은 교양지를 표방하면서 2007년 창간한 ‘월간 독자’는 매달 3만부 가량 나온다. 아직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손해 보는 짓”이다. 화이트홀, 갤러리 화이트가 들어선 5층짜리 빌딩이 그의 소유라서 임대료로 적자를 메우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발행규모를 축소하기는커녕 ‘월간 독자’ 영문판 발행을 궁리 중이다.


“법률문서를 쓸 때는 ‘내가 이것 잘 써서 뭐하나’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어요. 내가 글을 쓰면 판사 한 명만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훨씬 재미있어요.”


그는 갑자기 일어나면서 “1000만 원짜리 카드 한번 보실래요?” 하더니 한 수녀님이 ‘월간 독자’를 읽고난 소감을 적어 보낸 감사 카드를 들고 와 보여주었다.

“제가 ‘월간 독자’ 만들면서 한 달에 2000만 원 넘게 써서 없애는 형편이지만 이런 카드 한 장 받으면 아, 정말 가슴이 뛰어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도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품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오랜 세월 그에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외면할 수 없던 가치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너무 밝은 달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보니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밝더라고요. 하필 그날 새 사건을 수임하면서 받은 수표가 주머니 여기저기에 가득 들어있었어요. 달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내가 지금 뭐하면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사무치는 거예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결국 내가 찾는 세계는 돈이나 권력, 명예가 지배하는 이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 때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속해 있던 세계에서 그도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전남 신안 흑산도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대도시 명문 고등학교 입시를 쳤다가 떨어졌다. 대학입시에도 떨어져 두 번 재수를 했고 사법시험에는 세 번 연거푸 떨어졌다. 변호사를 할 땐 ‘네가 꼭 필요하다’는 말에 넘어가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후기 모집으로 들어간 고등학교에 다닐 때, 5월 어느 날 교정에 성모성월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때의 기분을 그는 “전 우주가 내게로 달려오는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클래식의 세계, 그때까지 몰랐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 때 처음 알았다.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겪은 공개적인 실패도 그를 키워주었다. 그동안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허무맹랑하게 들렸고, ‘내 길’을 생각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속해있던 세계에서 최상위의 명분은 ‘정의’였지만 그것 역시 나의 잘못은 덮어둔 채 남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는 불공정 게임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마흔 넘기며 칭찬도 하루아침에 비난으로 변한다는 것도 체득했지요.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겁니까.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수는 없지요. 그래서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사람이 서로 진심으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내고 싶고요.”


임대료 추가 수입이 꽤 나올만한 공간에 공연장과 갤러리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에서라고 했다. “좋은 글과 음악, 미술만큼 사람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많은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정말로 뜬금없이 물어봤다. “그런데, 돈을 그렇게 다 써버리면 자녀들에겐 뭘 물려주시려고요?”


“돈요? 자기가 직접 벌지 않은 돈은 쥐약이에요. 그걸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까? 그보다는 좋은 생각을 심어주는 게 더 중요하지요. 나는 아이들에게도 뭐가 됐든 글을 쓰라고 늘 이야기해요. 글을 쓰면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남이 좋다는 것에 휩쓸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가슴속 언어를 알아듣는 귀를 키우라고 말이죠. 그렇게만 할 줄 알면 자기 꿈은 스스로 실현할 수 있지 않겠어요?” 

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