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밑줄긋기'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16.12.07 피해자의 수치심 (1)
  2. 2016.06.07 김소연의 [경험]
  3. 2015.09.13 신영복의 '담론' 중에서
  4. 2014.05.25 주의 깊은 눈 (2)
  5. 2013.09.29 "네"라고 말하기...적당히 (2)
  6. 2013.08.29 인류와 '다른 여자' (6)
  7. 2013.05.13 초조함 (8)
  8. 2013.04.28 다시 읽는 욥기 (7)
  9. 2013.02.01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2)
  10. 2012.10.09 내 뒤에서 닫힌 문들

(폭력적 외상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의심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무력감, 신체적 안녕의 침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반응이다...<중략>...외상 사건은 주도성에 훼방을 놓고, 개인의 능력을 제압한다....외상이 끝난 뒤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죄책감과 열등감은 실제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 (생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유사한 문제는 강간 생존자들의 치료에서도 표면화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온당한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

'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지음)를 읽기 시작한 것은 최근 우연찮게 어떤 폭력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난 직후였다. 사건의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고 결론이 나기 전까지, 스스로 위험하다 느낄 정도로 깊어지던 수치심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피해자가 분노뿐 아니라 수치심으로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느꼈'

비유하자면,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성적으로는 그날 입은 짧은 치마가 성폭력의 이유도, 면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둔감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었냐'는 폭력적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피해자는 그런 2차 가해와 싸우면서도 '왜 하필 내가 그날 짧은 치마를 입었을까'하는 수치심에 휩싸이는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랄까내가 겪은 일은 이처럼 개인에게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던 종류의 폭력이었고, 피해자가 겪는 모욕감과 수치심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나간 일은 덮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도 그런 수치스러운 감정을 후벼 파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자기검열이 강한 성향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증폭해서 겪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수치심은 외상 사건을 겪는 피해자들이 비켜가기 어려운 감정이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으려고 할 때,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가해자가 은폐, 침묵을 시도하다가 안 되어 피해자를 깎아 내리기 시작할 때, 외상 사건이 발생했음을 기꺼이 인정해주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선입견없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수치심은 피해자가 빠지기 쉬운 늪 같은 감정이다.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괴로웠지만, 폭력사건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알게 됐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공감과 노력 덕택에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한 '조치'가 표면적으로라도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매일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수치스러운 감정이 그 소식을 들은 뒤 싹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무력감은 그와 별개로 여전하지만......당사자들이 소속된 공동체가 사건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때 비로소 피해자의 트라우마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부분적이나마 겪어보았다.  

사회적으로 크나큰 비극적 사건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폭력 사건은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다. 이 사소한 사건을 통해 겪은 감정의 파고가 이럴진대, 대형 재난과 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얼마나 파괴적일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느낌을 재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동체의 두 가지 반응으로 인정과 배상을 꼽는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매일같이 드러나는 가해자와 권력자들의 뻔뻔한 놀음과 거짓말. 하루하루 더 세상은 무참해져만 간다.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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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아침에 신문에서 본 시인 김소연의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자주자주 보려고 링크 걸어놓는다. 시행착오일 게 뻔한 인생이라 이 글에서 위로를 얻는 건가....아무튼 적어도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 그리고 시인의 말마따나 비루함과 지루함, 낭패감, 드물게 찾아오는 지극함 등이 골고루 섞인 경험은 열심히 겪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항상 일정 정도의 비루함과 지루함과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경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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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 (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일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 신영복의 담론에서

 

위의 인용문은 신영복 선생 (다른 저자와 달리 이 분은 꼭 '선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의 책 '담론'의 앞 부분 고전강의의 마지막 단락에서 따온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앞 부분의 고전 강의보다 뒷 부분의 인간학이 훨씬 더 좋다. 감옥에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며 체득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의 울림이 크다. 물론 앞 부분의 고전 강의도 그저 해설만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섞여 있지만, 고전 텍스트를 읽지 않고 강의를 듣는 격이어서 약간 몰입도가 떨어진다.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로 뜨끔한 대목들도 많았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태도라던가 뭐든 판단이 빠른 습성 때문에 망신살이 뻗쳤던 저자의 고백에 겹쳐 나 자신의 비슷한 실수들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도 나고.

 

요즘 나의 관심사와 겹쳐서인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대목은 개인과 관계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 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관계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라는 것이다.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이라고, “개인의 변화조차 개인을 단위로는 완성될 수 없다, 다른 글에서와 달리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사람이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좁은 분야에서나마 연대와 나눔의 가치를 현실로 만들려는 활동을 생업으로 삼은 최근 몇 년 간에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생각해왔다. 여러 계기가 겹쳐서일 텐데 아마 들끓던 젊은 시절에 통과해온 집단주의적 문화의 흔적이 지긋지긋해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도망친 면도 있을 테고, 또래의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포박되어 살아오지 않아서 더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제대로 숨쉬고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혼자만의 (심리적인) 공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야 하는 개인적 거리를 좀 크게 두며 살아왔다. 영화나 공연도 혼자 보고 여행도 혼자 해야 편안했다. 몇 년 전부터 사회운동의 유행처럼 회자되는 공동체라는 단어도 좀 깨림칙했다.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관계의 의무와 압박, 개인과 개인 사이의 비좁은 거리, 개인에 우선하는 집단의 존재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졌다. 신영복 선생은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듯”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이라던데, 나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그렇게까지 내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자기 변화는 주변의 영향과 무관하게 홀로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가깝고 소중했던 관계를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나이가 들어 완고해진 탓이라 생각하며 체념을 쌓아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흔들린다. 오랫동안 칼 융이 말한 자기’(self)의 실현을 중시해왔는데, 그렇게 생을 걸고 실현해야 할 진짜 나 자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점점 짙어진다.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면 단 하나의 참된 자기 (true self)가 아니라 때로 충돌하고 때로 조화로운 여러 개의 정체성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나들'을 통해 겪은 경험들을 의미 있는 실로 꿰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 서사 (autobiographical narrative)'가 있을 테고.

사회적 역할에 따라 쓰게 된 가면 (persona)을 자기 자신과 혼동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면들을 벗고 혼자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내가 더 진실한 스스로를 발견하리라 기대할 근거는 없다. 어쩌면 어떤 역할도 없고 어떤 관계와의 상호작용도 없이 혼자일 때 떠올리는 나 자신은 일정 부분 허영이 빚어낸 자아상의 일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영복 선생이 단언한 것처럼 "관계가 인간의 궁극적 존재성"이라고까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저항감이 있다. 흔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승복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상황과 관계에 실려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한편 (허상일 뿐이라 해도) 단단한 중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랄까.

'담론' 다음으로 읽는 책은 관계,공동체 대신 개인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지면 좋을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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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요즘 매일 읽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

성급히 뛰어내려 다가갔다가 화가 나서 떠나버리는 부인보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

 

(지적 장애를 지닌 42살 장남 히카리가 보행훈련을 하다가 넘어진 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아들을 안아 올리느라 애쓰던 상황을 설명한 뒤)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부인이 뛰어내리더니 "괜찮아요?"하고 말을 걸면서 히카리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히카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은, 낯선 사람이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과 개가 자기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자신이 에부수수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화가 난 채 가버린 후, 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시나 자전거를 세우고 저희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내보였습니다. 그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잠깐 저에게 보이기만 하고는 주의 깊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잠시 후 히카리가 일어나고 제가 그 옆에서 걸으며 돌아보자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뿐히 자전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저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구급차나 가족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으면 휴대전화로 협조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떠난 그 소녀의 미소띤 인사를 잊지 못합니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항독전선에 참여했다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말에 저는 끌렸습니다.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
불행한 인간에 대한 베유의 정의는 독특합니다만, 갑작스럽게 넘어진 것에 동요하는 저희도 그 자리에서는 불행한 인간입니다. 이쪽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의 적극적인 선의를 보여준 부인도 베유가 평가하는 인간다움의 소유자입니다. 오히려 이런 때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저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게다가 불행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 왕성한 사회에서 저는, 주의깊고 절도 있는 그 소녀의 행동에서 생활에 배어 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주의 깊은 눈이 그것을 순화하는 것입니다
."


-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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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내가 살면서 고수한 한 가지 원칙은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는 한 ‘네’라고 대답하는 거야. 내 삶에 ‘아니오’라는 대답은 없었다네.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흔쾌히 받아들였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하다 보면 흥미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어 ...(중략)...

‘새로운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지루해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망설여서는 안 된다네. 나 역시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받아들였던 일들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네. 누구든 새로운 일을 통해 또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상받을 수도 있어. ‘아뇨. 못하겠는데요.’ 혹은 ‘하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들을 놓치기 마련이지.

삶은 모험이야. 모험을 하려면 먼저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네."

-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필레머 지음)에서

인생을 오래 산 노인들이 들려주는 지혜는 성경이나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할 때가 많다. 성경엔 "누가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어라"라는 말이 있고, 불교엔 수처작주(隨處作主)란 말이 있다. 두 종교가 전하는 비슷한 지혜에 대해 법륜스님이 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인상 깊어서 메모를 해두었더랬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보면요,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줘라,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리 가자는 거는 이렇게 좀 소극적이고 종속적이지요. 누가 가자니까 끌려가는데, 내가 마음을 적극적으로 내서 10리를 가주겠다, 마음을 내버리면 그 순간에 내가 주인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항상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라, 이런 것과 굉장히 일맥상통하거든요. 그렇게 삶을 조금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면 이 세상이 훨씬 살기가 쉽지요

- 법륜스님 2011.5.11 CBS 인터뷰에서 

난 좀 비관적인데다 투덜이 기질까지 있어서 사사건건 토를 달고 안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던 짜증스러운 유형의 인간이었던지라, 다르게 살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바꾸려 노력해야 할 태도로 이걸 꼽았다. 투덜대지 말 것. 가능하면 매사에 "네"라고 말할 것. 

일과 관련해서도 내가 기획하거나 계획을 세운 게 아니더라도 새로운 제안, 요청이 오면 가급적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써왔다. (음....'웃기고 있네. 네가 언제 '네'라고 말했다고 큰 소리냐?'하고 버럭 화를 낼만한 몇 분의 얼굴이 떠오르는군. 땀 삐질....-.-;;)

잘 모르는 주제여도 이번 기회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되니 차라리 잘 됐군, 하는 초긍정 마인드를 유지하려 나름 노력해온 편인데......이제 거의 내 용량 대비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이러다 여기저기 얼굴 안 내미는 데가 없는 오지라퍼 되기 십상이지 싶다.

아무리 취지가 좋고 내 일과 관련이 있는 요청들에 응한다 해도, 지금처럼 살다간 내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상태,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누워 신음소리만 흉내내는" 따라쟁이, 지 마음 안엔 별반 절박함이 담겨 있질 않으면서 절박한 사람들 옆을 얼쩡거리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나 하는 양 착각하는 허세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지금도 월욜에 있을 행사 준비를 위해 공부하는 중인데, 이젠 정말 이런 건 마지막이라고 혼자 되뇐다. 아무리 취지가 좋고 중요한 일이어도 내가 집중해야 할 분야인지 잘 생각하고, 거들어준다는 명목으로 안 끼는 데가 없는 오지라퍼는 되지 말자고 두 주먹 불끈 쥔 밤.

......게다가 일욜 밤에 이게 뭐냔 말이지.....ㅠ.ㅠ (결국 일욜 야근이 억울해서 휘갈겨 쓴 낙서라는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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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나는 가난한 수백 가구를 먹여 살렸죠. 그러나 언제나 먼저 내가 돕는 가난한 이들이 내 마음에 드는 얼굴들인지 보러 갔죠. 선의를 가진 남자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절대적인 것을 찾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척하며 잡아먹는 다른 여자, 그러니까 이름도 없고 얼굴도 온기도 없는 추상적인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정말이지 여성형이 맞을 거예요. 이 사치에는 견유주의가 아니라 꽤 많은 양의 허무주의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 로맹 가리의 '레이디L'에서 -

 레이디L이 연적으로 삼은 '다른 여자'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 인류애 넘치는 아나키스트 연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 데에 실패한 레이디L은 인류를 '다른 여자'라고 불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다른 여자'에 대한 혐오는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루 종일 세탁통에 고개 처박고 일해야 했던 아내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은 레이디L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도 뿌리가 같다.

 

그 혐오를 감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를 '다른 여자'라고 구체화해야 할 만큼, 땅에 내려오지 않은 추상적 대상에 대한 사랑 또는 혐오를 할 줄 모르는 여자. 그런 레이디L을 보며 20대 초반의 나를 지배했던 구절 두 개가 단박에 떠올랐다. 하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 (이름이 맞나 모르겠지만)이 한 말. 

"추상적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구체적 한 인간을 사랑하기 어렵다."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이 없지만 대강 이렇다)

또 하나는 문학평론가 채광석씨의 시집에서 읽은 한 구절이다.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소리만 흉내 내었나 보다."

신음소리만 흉내 내는 듯한 스스로를 더 참을 수 없어, 어줍잖게 주변에서 얼쩡대기만 하던 노동운동을 포기했다. 추상적 이념 대신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 보고 싶다는 애매한 기대를 품고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20대 때의 번민을 잊었다.

그 고민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선명하게 다시 떠오를 줄이야... 역시 인생의 어떤 문제든 끝났다고 완료 시제로 선언하고 밀쳐둘 수 있는 건 없다. 언제고 되돌아온다.

 

내가 지금 일하는 NGO '아동' '국제개발'이 정체성의 중요한 두 축이다. 정책, 제도와 관련된 일을 주로 하는 탓에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내게서 '아동'은 많은 권리에서 배제된 소수자 집단, 즉 추상적 개념으로 머물러 있을 때가 태반이다. '국제개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게 이 개념은 '세계 평화' 만큼이나 거대하게 들려서 생경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일이 몸에 잘 안맞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주로 내가 거대한 개념들의 주변을 얼쩡거리며, 더군다나 '당사자'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추상어로 일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 때이다. 그럴 땐 다시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소리만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되돌아온 20대 때의 질문에 이번엔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요즘의 내 화두다. 정책과 제도의 개선, 물론 중요하다. 거시적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애시당초 이 일이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 앞에서 추상적인 아동, 국제개발은 나의 답이 아니다. '인류' 를 '다른 여자'라고 바라보았던 레이디L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낙서 끝. 글을 하도 안쓰다 보니 스스로 놀랄 정도로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힘들다. 예전엔 어떻게 글을 쓰고 살았나 몰라....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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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카프카,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 (바로가기)에서 재인용)

이틀 내내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을 맘껏 즐기다 밤에 읽은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에서 눈에 띈 대목. 어제 빈둥거리다 되는대로 손에 잡힌 소포클레스 전집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도 겹친다

'오이디푸스 왕'을 오래 전에 읽을 땐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비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제 다시 읽으니 다른 점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저주를 받았다고 그 즉시 왜 아이를 갖다 버렸나. 아이에게 아버지를 죽일만한 힘이 생기기 전까지 좀 기다려볼 것이지...'안티고네'도 마찬가지다. 그 똑똑하고 위엄있는 안티고네는 왜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자고 맘 먹었을까. 지하도 지상도 아닌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조금 더 생각해볼 수는 없었을까... 우리가 운명이라 여기는 비극도 어쩌면 좌절과 고통이 지나가도록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약함,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동시에, 끔찍한 불행에도 "꼿꼿이 머리 세우고" 할 말을 하는 주인공들의 의지도 눈에 띄었다. 오이디푸스는 비극의 전모가 드러나 제 눈을 찌르고 추방 당하기 직전에도 처남에게 딸들을 돌봐달라고 집요하게 말한다. 안티고네는 통치자의 법을 어기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의 신념을 좇아 통치자의 법을 기꺼이 위반한다. 예전에는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운명의 거대함으로 읽었던 이야기들이 이번엔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운명도 사람의 어리석음과 서로 다른 계획이 충돌하여 빚어지며, 그렇게 어떤 운명이 빚어지건 사람은 여전히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오늘은 여기저기 들락거리다 고병권의 글을 발견하게 됐는데, 위의 글에서 고병권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

"신탁이나 예언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딱 한 가지 일만을 했다. 그것은 주인공들을 초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파국에 대한 초조감이 상황을 파국으로 이끌어간다."

그는 철학이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이끌어낸다.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라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 파국을 막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요즘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특정 주제는 질릴 정도로 곱씹느라 결정을 잘 못하지만 대체로는 반응이 너무 빨라서 후회하는 일이 잦다. 기질적으로 성격이 급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불편한 것을 견디는 능력, 정신과의사 하지현씨가 '내공'이라고 불렀던 그 힘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싶다.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기다리고, 둘러보고, 멈춰 서고, 찬찬히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몇 달 사이 내 삶이 별 말을 걸지 않고 휙휙 지나가버렸던 이유는들으려 기다리는 자세, 애매한 것을 견디는 '내공', 살펴보고 반추하려는 의지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간만에 이틀 내리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탕진했더니 충만한 기분. 이런 여백, 너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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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네가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욥의 부르짖음에 대한 야훼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한다.

 

몇 년 전 욥기를 읽으며 놀랐던 건, 성당을 한참 다녔던 중학생 때의 어렴풋한 기억과 달리 단 한 번도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욥의 태도였다.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 야훼에게 따진다. 왜 이러는지 대답 좀 해보라고 끈질기게 묻는다.

왜 악한 자가 복을 누리고, 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죄 없는 한 사람이 치르는 끔찍한 고통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욥은 집요하게 묻고 따진다.

 

반면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야훼 앞에 욥의 무릎을 꿇리려 애를 쓴다. 여섯 번에 걸쳐 욥에게 "무슨 이유가 있으니 이런 벌을 받겠지"하고 설득한다. 굽히지 않는 욥에게 급기야는 "네가 언제 그렇게 선량했느냐"고도 나무라고, "고통 속에서도 배울 게 있다"라고 달래기도 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타이른다.

 

그러나 욥은 끝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이 모든 끔찍한 고통이 내 탓이라고 움츠려 들지도 않았다. 욥은 끝까지 집요하게 야훼에게 묻는다. 죄 없는 나에게 내리는 이 고통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침묵하던 야훼는 드디어 천둥처럼 입을 열어 욥에게 묻는다.

"내가 세상을 만들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느냐.

네가 분노를 폭발시켜 건방진 자를 짓뭉개고 불의한 자를 짓밟을 수 있느냐."

......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그제야, 스스로가 흙의 먼지로 빚어져 야훼와 논쟁해서는 안 되는 인간임을, 인간 밖에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은 뒤에야, 자신의 고통이 스스로 불러들인 벌이 아니라 야훼에게 맡길 수 밖에 없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일 뿐이라고 이해한 뒤에야, 욥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인다.

 

친구들의 그 어떤 설득에도 자신의 뜻을 접지 않던 욥은, "네 고통을 헤아릴 힘이, 고통에서 헤어나올 힘이 너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야훼의 꾸짖음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다"....

 

야훼의 대답 어디를 읽어도 고통의 이유를 묻는 욥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저 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돌려서 말할 뿐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추측할만한 대목은 하나밖에 없다. 야훼는 욥을 위로하고 타이르던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고 분노한다. 친구들은 욥에게 "고통이 야훼의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위로하려 들었지만, 야훼는 그들이 가짜라고 화를 낸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느냐고, 고통에 대해 왜냐고 묻는 욥의 태도가 인간적이고 솔직한 것이라는 대답. 욥기에서 고통에 대해 야훼가 직접적으로 대답한 것은 이것 뿐이다.

 

....욥기의 끝에서 욥이 고통에 대해 "왜"냐고 묻는 대신 "예"라고 대답한 이후에도, 나는 그가 고통에 동의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상상한다. 끝까지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지만, 답을 구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욥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려면이해할 수 없는 일의 그 不可解性 자체를 받아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 욥기가 들려주는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다. 지상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그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욥처럼 "도대체 왜"라는 질문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가.

 

대답하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질문이 되돌아오고, 다시 답을 몰라 헤매인다. 참혹한 고통 속에 놓인 내 절친한 벗을 생각하며, 그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의 모든 위대한 힘들 앞에 기도하며, 욥기를 다시 읽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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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요즘 자기 전에 매일 읽는 시.

야근하고 밤 늦게 기어 들어와 뻑뻑하게 흐려진 눈으로 다시 읽는다.

뭐라 콕 짚어 말할 수 없지만 매번 울컥하게 느껴지는 묘한 위로... 시 때문인지 내 마음 때문인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엔 원제인 '기러기'는 잊어버리고 소설가 김연수가 소설 제목으로 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시.

 

내가 아닌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고, 절망이 절망을 만나 사랑이 되는 순간을 향한 그리움을 구태여 감출 필요 없고, 그 마음이 누추하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고, 언제든 달아나기 좋게 가장자리로 슬쩍 물러나려고 눈치보며 우물쭈물할 필요도 없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 가운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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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사람들은 계속 길이 열릴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고요 속에 앉아서 기도도 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어요. 그래도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소명을 찾으려고 애써왔지만, 아직도 내게 정해진 길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길이 열릴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거예요."

루스의 대답은 솔직했다.

"나는 모태 신앙인이라네. 그리고 60년이 넘게 살아왔지. 그러나 내 앞에서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우울하게 말하던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나는 절망으로 빠져들고 있었다....[중략]...잠시 후 그녀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갔다.

"반면에 내 뒤에서는 수많은 길이 닫히고 있었다네. 이 역시 삶이 나를 준비된 길로 이끌어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

나는 그녀와 함께 웃었다. 큰 소리로 오랫동안 웃었다. 쓸데 없이 신경을 곤두세웠던 문제가 아주 단순한 진리로 마음에 와 닿았을 때 나오는 그런 웃음을.

...[중략]... 이후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 날의 교훈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일, 그리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일, 일어난 일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파커 J. 파머 "삶에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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