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에 해당되는 글 131건

  1. 2016.12.07 피해자의 수치심 (1)
  2. 2016.06.21 하늘의 뿌리
  3. 2016.06.07 김소연의 [경험]
  4. 2016.01.13 걷는 듯 천천히 (2)
  5. 2016.01.09 몸의 일기, 마음의 시계
  6. 2015.12.14 어제의 세계 (2)
  7. 2015.11.14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8. 2015.09.13 신영복의 '담론' 중에서
  9. 2014.05.25 주의 깊은 눈 (2)
  10. 2013.11.05 안나와디의 아이들 (4)

(폭력적 외상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의심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무력감, 신체적 안녕의 침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반응이다...<중략>...외상 사건은 주도성에 훼방을 놓고, 개인의 능력을 제압한다....외상이 끝난 뒤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죄책감과 열등감은 실제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 (생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유사한 문제는 강간 생존자들의 치료에서도 표면화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온당한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

'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지음)를 읽기 시작한 것은 최근 우연찮게 어떤 폭력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난 직후였다. 사건의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고 결론이 나기 전까지, 스스로 위험하다 느낄 정도로 깊어지던 수치심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피해자가 분노뿐 아니라 수치심으로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느꼈'

비유하자면,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성적으로는 그날 입은 짧은 치마가 성폭력의 이유도, 면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둔감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었냐'는 폭력적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피해자는 그런 2차 가해와 싸우면서도 '왜 하필 내가 그날 짧은 치마를 입었을까'하는 수치심에 휩싸이는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랄까내가 겪은 일은 이처럼 개인에게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던 종류의 폭력이었고, 피해자가 겪는 모욕감과 수치심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나간 일은 덮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도 그런 수치스러운 감정을 후벼 파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자기검열이 강한 성향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증폭해서 겪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수치심은 외상 사건을 겪는 피해자들이 비켜가기 어려운 감정이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으려고 할 때,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가해자가 은폐, 침묵을 시도하다가 안 되어 피해자를 깎아 내리기 시작할 때, 외상 사건이 발생했음을 기꺼이 인정해주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선입견없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수치심은 피해자가 빠지기 쉬운 늪 같은 감정이다.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괴로웠지만, 폭력사건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알게 됐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공감과 노력 덕택에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한 '조치'가 표면적으로라도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매일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수치스러운 감정이 그 소식을 들은 뒤 싹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무력감은 그와 별개로 여전하지만......당사자들이 소속된 공동체가 사건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때 비로소 피해자의 트라우마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부분적이나마 겪어보았다.  

사회적으로 크나큰 비극적 사건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폭력 사건은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다. 이 사소한 사건을 통해 겪은 감정의 파고가 이럴진대, 대형 재난과 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얼마나 파괴적일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느낌을 재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동체의 두 가지 반응으로 인정과 배상을 꼽는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매일같이 드러나는 가해자와 권력자들의 뻔뻔한 놀음과 거짓말. 하루하루 더 세상은 무참해져만 간다.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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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하늘의 뿌리

나의 서재 2016.06.21 16:40

살아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중 하나는 내 ‘명예의 전당’에 모셔둔 몇몇 작가들의 전작(全作)을 다 읽는 일이다. 그 중의 한 명이 로맹 가리. 오래 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처음 만났고 자서전적 소설인 『새벽의 약속』에 매혹된 뒤 그의 소설들을 계속 찾아 읽는 중이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공쿠르상을 탄 『하늘의 뿌리』였다.

 

로맹 가리만큼 세상사의 아이러니, 사람의 표변과 이중성, 이념과 믿음의 무가치함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때론 냉소 또는 혐오를 드러내면서도 결국 사람에 대한 대책 없는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작가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려낸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혀 모든 것을 빼앗길지언정, 하다못해 땅바닥에서 뒤로 나자빠져 버둥거리는 풍뎅이를 뒤집어주는 행위라도 하면서, 그 어떤 폭력도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는 없음을 선포한다. 절망에 맞서 끝끝내 존엄을 지키는 개인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은 『하늘의 뿌리』에서도 역력하게 드러난다.

 

600쪽이 넘지만 소설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2차 대전 때 나치에 맞서 싸우다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프랑스인 모렐은 전쟁 후 아프리카 차드에서 코끼리 구명운동을 벌인다. 상아를 얻으려는 서구인들, 고기를 얻으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한 해 3만 마리씩 도살되는 코끼리를 구하려고 무장투쟁을 펼치는 모렐과 그를 둘러싼 각양각색의 사람들 이야기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왜 하필 코끼리일까. 소설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모렐의 코끼리 구명운동이 자연보호다, 아니다, 사람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퇴행적 행위다, 아니다, 아프리카 독립투쟁을 위장하는 연막에 불과하다 등등 해석이 구구하다. 왜 코끼리인지를 이해하려면 모렐의 강제수용소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수용소에서 모렐과 포로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가상의 여인이 같은 방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행동거지를 가다듬었다. “우리를 지탱해줄 어떤 위엄 있는 규율이 없다면, 허구나 신화에 매달리지 않으면, 되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 것에나 굴복하고 심지어 협력하게 되리라는 생각”때문이다. (‘여인’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과연 프랑스인답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책에서 아침에 반드시 세수를 하는 포로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는 증언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람에겐 지켜야 할 의례, 규율, 상상과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포로들은 가상의 여인을 내보내라는 나치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아 고문을 당한 뒤 다시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코끼리 떼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코끼리를 상상하면서 옹호하려고 했던 것은 “유용한 이익도, 손에 잡히는 효율성도 없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불멸의 필요로 남아 있는 것이 숨어 살만한 여백”이었다.

 

“속도와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겠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코끼리. 이 존재를 어쩌면 인권, 혹은 존엄성으로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끝까지 지켜야 할 기본적 권리, “성가시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경쟁에서 앞서가는 데에 방해가 되고, 그래서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없어져서는 안 될” 개인의 마지막 권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 무엇.

 

『하늘의 뿌리』가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계몽적 소설에 그치고 말았을 터. 그러나 모렐의 싸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며 때로 맞서고 때로 돕는 사람들의 다양한 세계관과 태도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어쩌면 외통수 같은 모렐의 싸움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모든 좋은 책들은 시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들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태도, 행로와 마음을 짚어 따라가면서 독자가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를 견주어볼 수 있게 만드는데, 『하늘의 뿌리』 역시 그렇다. 예컨대 이상주의자의 씁쓸한 타락, 사명감에 짓눌려 ‘자유’니 ‘정의’니 ‘진보’니 하는 말을 기치로 내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싸움터에 몰아넣는 사람의 사정, 발전이 우선인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우선인가, 그것이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등을 생각하게 만드는 논쟁들. 또 고상한 추구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파헤치는 대목에선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특정 집단의 인간혐오가 떠올랐고, 지독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피하는 사람의 심리를 묘사할 땐 우리 사회에서 지독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퍼붓는 세태가 떠올라 쉽게 책장이 넘겨지질 않았다.

 

결국 뚜렷한 승리 같은 것 없이 소설은 끝난다. 그럼 그렇지, 쉽게 말했다가 금방 잊히는 희망, 연대, 이상을 냉소하는 로맹 가리가 주인공에게 쉬운 승리 따위를 안겨줄 리가 없다. 대신 “거추장스럽고 성가셔서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는 존재, 발전에 방해가 되는 존재,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존재”인 코끼리, 다시 말해 인권, 존엄, 우애 같은 것들을 지키려면 어떤 태도를 질기고 집요하게 지녀야 할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아래 인용한 모렐의 주장처럼 말이다.

 

“당신은 고생대 초기에 최초로 물 밑의 진흙에서 나와, 없는 허파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겨우 숨을 쉬면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서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의 파충류 동물을 기억하오? …<중략>… 그놈 역시 미쳤다오. 완전히 머리가 돌았지. 그 때문에 그렇게 애쓴 거지요. 그놈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오. 이걸 잊어선 안 되오. 그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있지도 못할 거요. 그놈은 아마 간이 부었을 거요. 우리도 시도를 해봐야 하오. 그게 진보라는 거요.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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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신문에서 본 시인 김소연의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자주자주 보려고 링크 걸어놓는다. 시행착오일 게 뻔한 인생이라 이 글에서 위로를 얻는 건가....아무튼 적어도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 그리고 시인의 말마따나 비루함과 지루함, 낭패감, 드물게 찾아오는 지극함 등이 골고루 섞인 경험은 열심히 겪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항상 일정 정도의 비루함과 지루함과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경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원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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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원더풀 라이프’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하루키의 에세이나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언뜻언뜻 연상시키는 대목들. 독특한 일본풍같은 게 있달까.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자분자분한 말투로, 심각해지지 않고 경쾌하면서도 그냥 휙 지나치지는 않는 찬찬한 시선 같은 것.

일테면 감독이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는 어느 책의 구절을 읽으며 떠올렸던 촬영의 경험. 나가노 현의 한 초등학교를 3년에 걸쳐 취재했는데, 한 학급의 아이들이 송아지를 키워 교배를 시키고 젖을 짠다는 목표를 세우고 3학년 때부터 계속 송아지를 돌봐왔더란다. 그러나 5학년 3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예정일보다 빨리 어미소가 조산해버렸다. 울면서 송아지의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일은, 아이들이 염원했던 젖 짜기 였다. 사산을 했어도 어미소의 젖은 매일 짜야만 했다. 학생들은 짠 젖을 급식 시간에 데워 마셨다. 즐거워야 할 이 젖 짜기와 급식은 본래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상(喪)‘중에 쓴 시는 이랬다고.


"쟈쟈쟈

기분 좋은 소릴 내며ᅠ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이어지는 감독의 말.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ᅠ내가 창작을 하며 죽음이 아니라 '상(喪)'에 집착하며 홀리게 된 출발점은 틀림없이 여기라 하겠다.”


또 영화 ‘공기인형’을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는 말.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려 한다. 그러한 노력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미덕으로 그려진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극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일까?

...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무책임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은 영화를 볼 때도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듯 인상적이었던 표현이었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막혀서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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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새해 읽은 첫 책은 몸의 일기’, 다음은 마음의 시계.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모아둔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 몸의 일기를 고른 건 그야말로 생존체력을 키우는 게 절실하단 걸 느끼던 때였고, 붕붕 뜨는 정신을 끌어내려 단단히 몸에 결박하고 싶단 생각을 하던 때라서 그랬는지도...

자꾸 변하기 마련인 정신을 관찰하는 내면 일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며, 오직 몸의 상태, 변화만을 관찰하여 기록하겠다는 다짐 하에 쓰여진 일기(를 가장한 소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일생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방귀 냄새, 성기 모양까지 자세히 기록한 몽테뉴의 에쎄를 떠올리게 하는 세밀한 기록. 한탄과 자기혐오, 느닷없는 반성과 후회 따위로 얼룩진 일기 (조차도 써본지 오래됐지만…) 말고 나도 몸의 일기를 써볼까나…. 인상적인 몇몇 구절.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우리의 모습보다도 우리의 습성이 많은 추억을 남길 거라는 생각을 하면 흐뭇해진다."

 

하지만 내겐 기억들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내가 그리워한 그들의 몸이었으니까! 앞에 마주하고 있어 손만 뻗치면 만질 있는 , 그거야말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아빠의 , 앙상한 , 각이 있던 , 그들에겐 원래 몸이 있었는데 이젠 없어졌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오로지 몸들을 간절하게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던 동안엔 거의 만져보지도 않았으면서! 그토록 스킨십에 인색하고 몸에 관심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으면서! 그러던 내가 지금 이렇게 그들의 몸을 필요로 하고 있다니!"

 

(86세에 일기) “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집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편안하고 좋다."

 

마음의 시계는 그냥 눈에 띄어서 읽기 시작. 아닌 척해도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꽤 있는데, 정면으로 그걸 다루는 책이라서 마저 읽음. ‘몸의 일기’엔 몸의 상태도 정신 자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 (역시 프랑스!)이 나오는데, 이 책은 신체적 건강도 마음가짐, 집중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역설 (역시 미국!)한다

저자는 70~80대 노인들을 1주일간 시골집에서 보내며 모든 소품과 장식, 옷차림, 말투를 1959년으로 되돌렸더니 청력 기억력, , 몸무게 등 모든 방면에서 건강이 향상되고 심지어 외모까지 젊어졌다는 실험을 진행했던 심리학자다. 나 같으면 아무리 젊어진다 해도 30년전인 척 입고 말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이런 실험엔 참여하지 않겠다만.

삐딱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고개 끄덕인 대목도 많다. 모든 걸 퉁치지 말고 구체적 변화에 주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엔 매우 동의. 인상적인 몇몇 구절.

 

경험이 보잘 없는 스승인 경우도 있을 있다....우리는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경험이 수많은 방식으로 이해될 있고 다른 수많은 관계가 형성될 있음에도 경험과 배움 사이에 가지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일단 관계를 염두에 두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려 들면서 다른 이해 가능성은 제거해 버린다. 때문에 경험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가르치는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우리가 수행하는 여러 실험이 시사하듯 의식을 집중하는 일이 삶을 낳는다면, 어쩌면 과도하게 예정된 인생은 때 이른 죽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의식을 집중하여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별을 늘림으로써 편견과 고정관념을 줄일 있다. 특정 개개인을 적극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얻을 있는 의식의 집중은 한가지 특징 만으로 상대를 정의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준다. ‘톰과 조앤은 늙었다 같이 포괄적 특징이 아니라톰은 백발이고 휘파람을 분다. 조앤은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고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같이 차별화되어 사람이 어디에 속해있는지가 아니라 개인의 개성으로서 인식될 있다. 같은 차별화가 없다면 겉보기 나이와 실제 나이의 상관관계는 가공의 상관관계 떄문에 과장될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하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일단 전반적 규칙을 갖추고 나면 규칙의 예시들이 중요해지는 것일까?”

나쁜 일들을잊어버리면우리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있다. 망각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책이 다루는 연구는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알아차리는 행동이 상징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생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했을 느끼는 방식이다. 우리가 건강을 더욱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한 노력에도 이제 의식을 집중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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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어제의 세계

나의 서재 2015.12.14 20:57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파리의 식당과 공연장에서 동시다발테러가 일어나고 서울 한복판에서 농민의 몸 위에 물대포가 쏟아지던 날 즈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차별 총기난사 테러로 미국이 들끓고 있다. ‘어제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작가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묘사한 이성의 패배와 야만성의 승리는 그저 ‘어제’의 일로만 읽히지 않았다. 인류가 숱한 문명을 거듭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며 쌓아올린 자유와 공존, 존엄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격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전기와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은 (사후의 편집과정에서 덧붙여졌겠지만)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라고 쓴 그의 유서로 시작한다. 책을 다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 유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어떤 이념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 속수무책의 폭력으로 무너져 내리는 세계 앞에서 얼마나 아득한 절망을 느꼈을지 그 깊이를 다 짐작할 길이 없다.


츠바이크는 “역사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의 세대를 규정하는 커다란 움직임에 대해 그 첫 단계에서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논박할 수 없는 철칙”이라고 썼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은 그야말로 ‘황금시대’였고 심지어 당대의 저명한 학자는 세계가 너무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전쟁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고 예견했지만, 불과 1년 뒤 유럽은 전쟁의 수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지 불과 10년 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세계의 풍성함과 상호연결은 폭력에 대한 안전망이 되지 못한다. 참상의 경험은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역사는 발전하지 않았다. 21세기의 우리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큰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츠바이크의 책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희망의 단서를 얻으리란 기대도 애초에 없었다. 다만 품위 있고 신중했던 코즈모폴리턴인 츠바이크의 삶, 그가 묘사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며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생각할 따름이다. 예컨대 유럽문화의 융성을 찬양하던 지식인들은 전쟁이 터지자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전쟁을 선동하며 독일 무대에서 셰익스피어를 추방하고 영국 음악당에서 모차르트와 바그너를 추방한다. 이런 광기가 누군가의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촉발된 열광”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다. 츠바이크 말마따나 “자기들이 하는 일이 일방적으로 옳다는 변함없는 신념”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광기와 증오, 망상의 소용돌이 안으로 몰아넣는다.


장황하고 지루한 모든 것을 혐오했던 츠바이크의 작품답게 밀도가 높은 이 책에는 전쟁 전후 세태의 풍속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당대 문화의 다양한 측면이 담겼다.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교류에 대한 묘사도 그들의 박제된 이름에 온기를 불어넣어 피가 돌게 하듯 생생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어디에 있든 고요함이 그의 주위에서 자라는 듯했던” 사람이었다는데, 그가 전쟁이 터진 뒤 어색한 군복을 입고 나타난 상황을 읽고서는 탄식이 절로 났다. (릴케에게 군복을 입히다니!) 누가 옆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조각에 몰입했던 로댕의 ‘무아지경’을 지켜본 뒤 츠바이크는 이렇게 썼다.

“그때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아니 지상의 모든 성취의 영원한 비밀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즉 집중, 모든 힘과 모든 감각의 응집, 그 무아지경, 모든 예술가가 행하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위한 그 무엇을 배웠던 것이다.”


위대한 시인 철학자 음악가의 육필 원고를 열성적으로 수집하고 베토벤의 책상과 저금통, 괴테의 깃털 펜을 갖고 있던 츠바이크. 이 탐미적이며 우아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며 국가주의에 단호히 반대했던 세계인인 작가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단언컨대 우리가 지금 누리는 문화의 결도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한 세계의 종말에 대한 가장 서글프고 아름다운 헌사라 할 이 책을 읽고 여운이 오래 남는다면 웨스 앤더슨 감독이 츠바이크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같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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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송곳’의 방영이 끝나는 날마다 소셜미디어에는 노동상담소장으로 나오는 구고신의 명대사를 옮긴 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구고신의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무서운(?!) 제목의 책을 쓴 미국의 노동운동가 사울 알린스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해서 널리 알려졌던 이 운동가도 21세기 한국에 있었다면 구고신처럼 말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옳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따를 거라는 기대는 얼마나 순진한가. 누구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본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위만 주장할 게 아니라 상대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상대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이게 알린스키의 주장이다. 나는 ‘송곳’의 구고신이 말한 ‘좋은 사람’도 이런 사람을 뜻하는 말일 거라고 이해했다.


알린스키는 40여 년 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러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하는 활동가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세상에 대한 낭만적 기대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 즉, 영원히 행복한 결말도, 영원히 슬픈 결말도 없고, 흑백으로 나뉠 수 없는 세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상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세상에 난무하는 거친 구호, 누구의 마음도 두드리지 못한 채 자위에 그치고 마는 뻔한 주장들을 한번 둘러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 전술 등을 설명하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알린스키는 부패하고 유혈이 낭자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냉정하고 신랄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훈훈하게 덥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간 놀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대한 통찰, 냉엄한 현실감각이 뛰어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알린스키가 그토록 인상적이진 않았을 거 같다. 내가 알린스키를 각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려 투신한 사람이면서 어떤 종류의 ‘확신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대한 희망 대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간의 희미한 전망”만 있으면 우리는 세상의 한 구석을 바꿔보려는 꿈을 품을 수 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스스로 발견한 사실을 의심하고 시험”하려는 노력을 거듭한다면 어쨌든 한 발짝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 자기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덧없는 순간 동안만 타오르는 조그마한 티끌”임을 알아차리려면 유머감각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실험하고 웃으며 걷기. 알린스키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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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실린 퍼블리 뉴스레터 바로가기

'퍼블리'라는 스타트업이 펴내는  What We're Reading  뉴스레터에 한 달에 한 번씩 독후감(?)을 쓰기로 함. 신문에 한 달에 한 번 쓰던 칼럼도 바빠서 쓸 시간 없다고 그만뒀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인상깊은 책은 메모를 해두는 오랜 습관 때문에 그냥 어렵지 않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손 번쩍 들고 시작. 콘텐츠를 새로운 방식으로 가공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이 예뻐보여 (이거 완죤 할머니 마인드 ㅠ) 주변에 얼쩡거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많은 선택이 그랬듯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글을 쓰다보니 나는 일과 아무 상관없는 글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읽거나 써야 숨통이 트이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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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 (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일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 신영복의 담론에서

 

위의 인용문은 신영복 선생 (다른 저자와 달리 이 분은 꼭 '선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의 책 '담론'의 앞 부분 고전강의의 마지막 단락에서 따온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앞 부분의 고전 강의보다 뒷 부분의 인간학이 훨씬 더 좋다. 감옥에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며 체득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의 울림이 크다. 물론 앞 부분의 고전 강의도 그저 해설만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섞여 있지만, 고전 텍스트를 읽지 않고 강의를 듣는 격이어서 약간 몰입도가 떨어진다.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로 뜨끔한 대목들도 많았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태도라던가 뭐든 판단이 빠른 습성 때문에 망신살이 뻗쳤던 저자의 고백에 겹쳐 나 자신의 비슷한 실수들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도 나고.

 

요즘 나의 관심사와 겹쳐서인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대목은 개인과 관계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 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관계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라는 것이다.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이라고, “개인의 변화조차 개인을 단위로는 완성될 수 없다, 다른 글에서와 달리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사람이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좁은 분야에서나마 연대와 나눔의 가치를 현실로 만들려는 활동을 생업으로 삼은 최근 몇 년 간에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생각해왔다. 여러 계기가 겹쳐서일 텐데 아마 들끓던 젊은 시절에 통과해온 집단주의적 문화의 흔적이 지긋지긋해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도망친 면도 있을 테고, 또래의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포박되어 살아오지 않아서 더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제대로 숨쉬고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혼자만의 (심리적인) 공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야 하는 개인적 거리를 좀 크게 두며 살아왔다. 영화나 공연도 혼자 보고 여행도 혼자 해야 편안했다. 몇 년 전부터 사회운동의 유행처럼 회자되는 공동체라는 단어도 좀 깨림칙했다.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관계의 의무와 압박, 개인과 개인 사이의 비좁은 거리, 개인에 우선하는 집단의 존재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졌다. 신영복 선생은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듯”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이라던데, 나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그렇게까지 내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자기 변화는 주변의 영향과 무관하게 홀로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가깝고 소중했던 관계를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나이가 들어 완고해진 탓이라 생각하며 체념을 쌓아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흔들린다. 오랫동안 칼 융이 말한 자기’(self)의 실현을 중시해왔는데, 그렇게 생을 걸고 실현해야 할 진짜 나 자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점점 짙어진다.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면 단 하나의 참된 자기 (true self)가 아니라 때로 충돌하고 때로 조화로운 여러 개의 정체성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나들'을 통해 겪은 경험들을 의미 있는 실로 꿰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 서사 (autobiographical narrative)'가 있을 테고.

사회적 역할에 따라 쓰게 된 가면 (persona)을 자기 자신과 혼동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면들을 벗고 혼자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내가 더 진실한 스스로를 발견하리라 기대할 근거는 없다. 어쩌면 어떤 역할도 없고 어떤 관계와의 상호작용도 없이 혼자일 때 떠올리는 나 자신은 일정 부분 허영이 빚어낸 자아상의 일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영복 선생이 단언한 것처럼 "관계가 인간의 궁극적 존재성"이라고까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저항감이 있다. 흔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승복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상황과 관계에 실려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한편 (허상일 뿐이라 해도) 단단한 중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랄까.

'담론' 다음으로 읽는 책은 관계,공동체 대신 개인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지면 좋을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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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요즘 매일 읽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

성급히 뛰어내려 다가갔다가 화가 나서 떠나버리는 부인보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

 

(지적 장애를 지닌 42살 장남 히카리가 보행훈련을 하다가 넘어진 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아들을 안아 올리느라 애쓰던 상황을 설명한 뒤)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부인이 뛰어내리더니 "괜찮아요?"하고 말을 걸면서 히카리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히카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은, 낯선 사람이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과 개가 자기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자신이 에부수수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화가 난 채 가버린 후, 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시나 자전거를 세우고 저희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내보였습니다. 그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잠깐 저에게 보이기만 하고는 주의 깊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잠시 후 히카리가 일어나고 제가 그 옆에서 걸으며 돌아보자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뿐히 자전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저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구급차나 가족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으면 휴대전화로 협조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떠난 그 소녀의 미소띤 인사를 잊지 못합니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항독전선에 참여했다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말에 저는 끌렸습니다.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
불행한 인간에 대한 베유의 정의는 독특합니다만, 갑작스럽게 넘어진 것에 동요하는 저희도 그 자리에서는 불행한 인간입니다. 이쪽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의 적극적인 선의를 보여준 부인도 베유가 평가하는 인간다움의 소유자입니다. 오히려 이런 때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저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게다가 불행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 왕성한 사회에서 저는, 주의깊고 절도 있는 그 소녀의 행동에서 생활에 배어 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주의 깊은 눈이 그것을 순화하는 것입니다
."


-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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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백만년만에 쓴 서평. (프레시안에 실린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 우리는 그 사이의 오물" 바로가기)

북콘서트도 했었고 재미있게 읽은 "안나와디의 아이들"에 대해 썼다.

쓰면서 느낀 점.

글 쓰고 사는 사람들, 대다나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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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의 기록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전언자(傳言者)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의 서약을 곰곰이 생각해볼만하다. 쓰는 사람은 사실의 낯섦을 유지하되 이를 익숙한 형태로 바꾸어 읽는 이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쓴다는 행위에는 특정한 사실을 버리거나 강조하는 취사선택이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진실’도 배제와 레토릭이라는 강력한 ‘거짓말’에 의해 구축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논픽션을 순전히 사실의 기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되레 부분적 진실들을 재료로 쓴 픽션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인도 뭄바이 공항 근처 슬럼가의 삶을 그린 논픽션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질문이었다. 책 앞뒤표지 소개 문구를 통해 독자는 이 책이 논픽션임을 미리 알고 읽을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스포일러를 미리 알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처럼 놀라움 하나를 싱겁게 잃어버리는 것이다. 논픽션임을 모른 채 읽는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이 책을 소설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묘사와 절묘한 비유를 읽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 전지적 작가 시점의 수려한 글.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가장 불평등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인도 뭄바이의 슬럼가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 다투던 중 한 여성이 숨진 사건을 소재로 했다. 어찌 보면 토막 뉴스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사건의 관련자들과 숨은 맥락을 무려 4년간 꼼꼼히 취재해 성장의 그늘에서 깊어가는 가난에 대해 쓴 책이다.


논픽션으로서는 드물게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한 건 저자의 치밀한 취재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웃집 여인인 파티마의 분신자살 사건은 저자가 168명을 반복적으로 인터뷰하고 경찰, 병원의 자료를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누군가의 생각으로 묘사된 부분은 당사자가 자기 심정을 저자와 통역자, 또는 동행인에게 토로한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쓰기 방식이 당혹스러워 처음엔 책 읽는 진도도 잘 나갈 수 없었다는 걸 고백해야 하겠다. 저자가 슬럼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전지적 시점의 글쓰기 방식이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권위적 태도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가난한 가족을 오래 관찰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쓴 조은 교수의 <사당동 더하기 25>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저절로 떠올랐다. 연구자가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니 상대방이 “장점이 뭐예요?”하고 되묻던 장면. 살면서 장점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가난한 이에게 장점이란 단어는 뜻 모를 외국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가난한 사람과의 인터뷰 녹취를 풀던 대학생이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간 놀아야 한다”는 말에서 사흘을 석 달로 고쳐 적었다고 한다. 사흘간 노는 건 대수롭지 않으므로 아마 석 달을 잘못 말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그러나 실제로 가난한 이에게 사흘간 놀아서 수입이 없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불평등의 골이 깊어가면서 모국어로 말을 주고받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써도 이럴진대 <안나와디의 아이들>에서 미국의 백인 중산층 지식인인 저자는 통역을 거쳐 이해한 말들의 뜻과 맥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을까. 나는 책에서 말해주지 않는 그런 점들이 궁금하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어림짐작하느라 처음엔 애를 먹었다. 오스카 루이스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한 <산체스네 아이들>도 사실의 왜곡과 허구 논란에 휘말렸던 점을 생각하면,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매우 과감한 서술 방식을 택한 셈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의 글을 ‘관찰기록’이라 부르고 모든 게 사실임을 강조했지만, 어찌 보면 <산체스네 아이들>같은 관찰기라기보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처럼 논픽션 소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서술방식에 불편함을 느낄 때조차도 그러한 글쓰기에 감탄하게 만드는 책이다. 글쓴이와 서술방식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독자라면, 슬럼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민낯을 묘사한 치밀함에 놀라게 될 것이다. 나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비로소 저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저자가 논픽션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객관적인 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객관적 글쓰기가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모자이크 퍼즐을 맞추듯 부분적인 사실들의 끊임없는 조합을 통해 전체의 상을 그려나가는 시도,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숨은 의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시도밖에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가난의 어제, 오늘,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탁월한 시도이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서나 가난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농촌을 떠난 이주민들이 도시 빈민이 되는 흐름은 한국의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주인공인 압둘은 고물을 분류해 살아가는 소년인데 서구 발 불황의 여파가 끼치자 고물 값이 급락하고 식비가 치솟아 어려움을 겪는다. 세계 어디서든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가장 먼저 세계화의 직격탄을 맞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누추한 풍경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개발의 양상 역시 용산참사를 이미 목격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저자의 눈에 비친 슬럼가의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자기 삶을 자기 방식으로 책임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어른들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본 대로 증언하며, 피해자연하는 이웃의 아이와 가해자로 지목받은 집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세심한 관찰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이들이 선택하는 삶의 전략, 발랄함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책에서 압둘은 “안나와디에서의 행운은 뭘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사고나 재앙을 얼마나 잘 피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불평등을 그렇게 체감한다. 압둘의 부모는 고철로 돈을 벌어 빈민촌을 벗어나기를 꿈꾸었으나 사소한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져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가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를 가로막는 고질적 장벽은 욕지기가 치밀 정도로 지독한 부정부패다. 더 이상 교육과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 탈출의 사다리를 오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안나와디의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시도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급기야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남 탓으로 돌리고 책의 중심 소재가 된 사건처럼 서로를 무너뜨리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길가에 넝마주이가 죽어가도, 화상 입은 여자가 몸부림쳐도 외면하고, 앞길이 창창한 십대 소녀가 쥐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왜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지 않으며 공통된 고통에 둔감한가. 저자가 깊은 충격을 받은 대목도 그 지점이었고, 왜 그런지를 묻고 또 묻다가 저자는 스스로에게 답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의 정책 순위와 시장의 막강한 권위가 세상을 너무 변덕스럽게 만든 나머지, 이웃을 도우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능력이 위협받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위태로워지는 세상이 될 경우, 가난한 공동체의 상부상조 개념은 무너진다. 정부와 시장의 선택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고, 중산층도 가난한 사람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멀리서 보면 잊기 쉬운 사실인데 알량한 이익과 한정된 터전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부패의 지배를 받는 하류 도시의 지친 주민들이 선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놀라운 점은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선량하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게 무너져버린 7월의 어느 오후에 압둘이 부엌 시렁을 놓다가 직면한 것과 비슷한 사태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많은 사람들. 집이 기울어져서 무너진다면, 그 집이 놓인 땅 자체가 비스듬하다면, 모든 걸 곧게 세우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스듬한 땅이 그대로 굳어버린다면 굳은 살 같은 둔감함, 타인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도 만성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안나와디는 점점 더 뻔뻔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다른 얼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책을 신흥대국 인도의 그늘을 다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읽기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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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