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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31 Liminality (2)
  2. 2016.12.22 지리산 일출
  3. 2016.12.13 성장 (2)
  4. 2016.12.07 피해자의 수치심 (1)

올해 내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다가 오래 전 인류학 수업 때 들은 liminality 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의 지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기. 정해진 것 없이 모호하고 불투명한 시‧공간의 지대.

오래 전 수업시간에는 성년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의 하나로 배웠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고민을 하던 당시의 내겐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혀서 머릿속에 오래 남았나 보다. 다시 올해 약간 갑작스럽게 전환의 시기에 처하게 되면서, 삶의 어느 단계에서든 의도하지 않아도 경계의 지대를 지나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런 liminality의 상황에 처할 때만큼 삶은 ‘과정’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때가 없다.

더불어 오래 전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 읽고 마음에 새기던 책들을 떠올린다. 조셉 캠벨이 신화적 상징의 의미를 캐고 탐구하여 보여주었던 영웅의 여정에서 문턱을 넘는 단계. 이 역시 liminality다.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는 없고, 앞은 세계의 온갖 신화들에서도 가장 많은 위험과 모험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유동적인 세계다. 그렇게 문턱을 넘어 기이한 괴물들이 출몰하며 어둡고 흔들리는 세계로, 고래의 뱃속으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 배우려 애쓰던 그 시간을 다른 결로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온전히 나로 살아야 하는 시간.

뚜렷한 일도, 계획도 없이 그저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다 일단 매일 꼭 해야 할 일 두 개를 정했다. 하루키가 매일 달리기를 하며 되뇌었다던 말마나따나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하찮고 사소한 일들이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미궁을 탈출할 수 있었던 단서가 보잘 것 없지만 더 없이 소중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였듯, 매일의 시시한 과제가 내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워줄 것이라 믿는다.

새해엔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만나는 사람도, 어쩌면 사는 곳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결심보다는 그런 변화에 의지하여 살아가려 한다. 내게 허용된 시간이 얼마일지도 알 수 없고 점점 더 삶이 우연이 되어버리는 세계. 담담히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며 어쨌든 내 인생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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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지리산 일출

세상구경 2016.12.22 23:59

12월 15, 16일 지리산 종주.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선명하게 보았다. 자꾸 보면 좋은 기운이 생기지 않을까 하여 블로그에 걸어놓는다.

15일 백무동행 심야버스를 타고 출발. 16일 새벽 4시40분쯤 산행 시작.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 -> 세석 (1박) -> 촛대봉 일출 -> 세석 -> 벽소령 -> 음정의 코스.

일출 사진보다 나는 이게 더 좋다. 수채화로 그린 듯한 이 자연의 색감이란! 날씨가 추운 걸 제외하면 워낙 쨍하니 맑아서 시야가 더 넓어져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지리산 종주는 이번이 두 번째. 첫 번째도 그렇고 이번에도,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에 지리산에 가는구나. 우연치고는 참…7년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지리산의 영기가 앞으로의 나를 이끌어주겠지.

첫 번째 종주 후 블로그에 끼적인 메모를 보니 그 후 7년간 나는 당시 계획했던 대로 살지 않았다. 불과 6,7년도 예측할 수 없는데 계획따위 다 무슨 소용이람. 방향만 잊어버리지 말고 지금 당장 가장 최선인 것에 몰두하면 된다. 친구 L모씨 말마따나 인생 전체로는 되는대로. 

 

지리산에 함께 간 친구들의 배려를 잊지 말 것. 한 친구는 지리산 종주를 스무 번 가까이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스틱도 없이 심지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험한 길을 휙휙 다닐 정도로 '산신령'급들인데, 늘 한 사람은 내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며 내 상태를 살피고, 내가 힘이 들어 멈춰서면 같이 서서 기다려주고, 어려운 길을 만나면 건너는 방법을 알려줬다. 식사 시간 전 구간을 걸을 때면 다른 두 명은 먼저 내려가서 식사 준비를 시작, 늦게 오는 사람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해줬다. 내 음식을 자기 배낭으로 가져가 짊어져 준 친구는 마지막 내리막길 임도에서 발톱이 아파 고생하던 나와 보조를 맞춰 걸어주기도 했다. 천천히 걷느라 따분했을 텐데... 착한 친구들. 같이 산에 다니며 늙어갈 착한 친구들이 있다니,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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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있는 동안에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사건이 삶에 더해질 때마다 줄거리를 계속 수정할 뿐이다. 길을 바꾼 사람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여기는 대신 그렇게 이야기를 고쳐 쓰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길을 바꾼 우리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 내 책 ‘내 인생이다’ 에필로그에 쓴 마지막 문단.

# 지난달 말일자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기 이전과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고 눈앞을 어지럽히던 희뿌연 먼지가 이제 조금씩 가라앉으려 한다. 맨얼굴의 적나라한 대면이 두렵지만 그것대로 맞이하고자 한다.

먼지 가라앉히기에 도움이 될까 하여 블로그에 ‘성장’이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이 나이에 성장이라니...하지만 내 책 에필로그에 내가 쓴 말처럼,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나는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이다. 회사를 의도치 않게 그만둔 것도 내가 쓰던 삶의 이야기에 새로운 사건이 더해진 것일 뿐. 이제 나는 줄거리를 어떻게 고쳐 쓸지 생각해야 하는 시간.

#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그만두었느냐고 누가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이기도 했고...무엇을 하려고 그만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 한동안 괴로웠다. 그런 내게 존경하는 어른이 들려준 성경의 한 구절.

(예수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는 대목에서)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르코 복음 6장 10~13절)

그 고장에서 너희를 받아들이고 너희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 머물러 끝까지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떠나도 된다...혼자 속을 끓이다 찾아가서 하소연하던 내게 그 어른이 "맞서고 버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며 들려준 말씀이다.

낯선 사건과 함께 찾아온 분노와 슬픔과 부끄러움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겨우 빠져나오고 발밑의 먼지를 털고 떠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스스로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 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거의 본능처럼 저절로 보이는 반응, 나라는 사람이 이끌려가듯 취한 선택. 그런 것들을 통해 확인하게 된 나 자신이 그다지 싫지는 않다. 그러면 되었다.

# 사무실 짐을 정리해 차에 실어둔 박스 3개를 옮겨야 하는데 박스를 차에 싣다가 허리를 살짝 삐끗하기도 했고, 짐 카트를 빌리러 갈 때마다 경비실 아저씨가 안 계셔서 여태 못했다. 오늘도 갔더니 안 계신다. 이를 어쩐다, 내일 할까 하다가, 내가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지리산 종주도 하는 사람인데 그거 하나 못 옮기랴 싶어 튼튼한 가방 2개와 배낭 1개를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책과 수첩이 대다수인 짐이 꽤 많아 보였는데 웬걸, 두 번 왕복으로 짐 옮기기 끝. 

이렇게 하면 되는 걸. 난감한 큰 덩어리를 내가 들 수 있는 크기로 잘게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뭐가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지금 해볼 수 있겠다 싶은 몫으로 쪼개어 하나씩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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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폭력적 외상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의심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무력감, 신체적 안녕의 침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반응이다...<중략>...외상 사건은 주도성에 훼방을 놓고, 개인의 능력을 제압한다....외상이 끝난 뒤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죄책감과 열등감은 실제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 (생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유사한 문제는 강간 생존자들의 치료에서도 표면화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온당한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

'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지음)를 읽기 시작한 것은 최근 우연찮게 어떤 폭력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난 직후였다. 사건의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고 결론이 나기 전까지, 스스로 위험하다 느낄 정도로 깊어지던 수치심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피해자가 분노뿐 아니라 수치심으로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느꼈'

비유하자면,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성적으로는 그날 입은 짧은 치마가 성폭력의 이유도, 면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둔감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었냐'는 폭력적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피해자는 그런 2차 가해와 싸우면서도 '왜 하필 내가 그날 짧은 치마를 입었을까'하는 수치심에 휩싸이는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랄까내가 겪은 일은 이처럼 개인에게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던 종류의 폭력이었고, 피해자가 겪는 모욕감과 수치심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나간 일은 덮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도 그런 수치스러운 감정을 후벼 파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자기검열이 강한 성향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증폭해서 겪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수치심은 외상 사건을 겪는 피해자들이 비켜가기 어려운 감정이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으려고 할 때,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가해자가 은폐, 침묵을 시도하다가 안 되어 피해자를 깎아 내리기 시작할 때, 외상 사건이 발생했음을 기꺼이 인정해주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선입견없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수치심은 피해자가 빠지기 쉬운 늪 같은 감정이다.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괴로웠지만, 폭력사건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알게 됐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공감과 노력 덕택에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한 '조치'가 표면적으로라도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매일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수치스러운 감정이 그 소식을 들은 뒤 싹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무력감은 그와 별개로 여전하지만......당사자들이 소속된 공동체가 사건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때 비로소 피해자의 트라우마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부분적이나마 겪어보았다.  

사회적으로 크나큰 비극적 사건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폭력 사건은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다. 이 사소한 사건을 통해 겪은 감정의 파고가 이럴진대, 대형 재난과 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얼마나 파괴적일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느낌을 재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동체의 두 가지 반응으로 인정과 배상을 꼽는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매일같이 드러나는 가해자와 권력자들의 뻔뻔한 놀음과 거짓말. 하루하루 더 세상은 무참해져만 간다.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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