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복수 같은 인간적 감정으로는 안되지이~. 식칼로 배를 쑤시든, 망치로 머리를 찍든, 고기값을 번다는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해야지”

- 영화 ‘타짜’에서 죽은 두목의 복수를 해달라는 부하에게 아귀가 던진 말 -


재미있다고 입소문 자자한 영화 ‘타짜’를 보다. 재미있다. 러닝타임이 꽤 긴데도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잘개 쪼갠 컷을 자주 교체하는 최동훈 감독의 스피디한 연출 덕분이었을 것이다. 화려하고 만화적이다. 배우들의 스타일과 연기도 좋다. 조승우와 김혜수는 그들이 출연한 모든 영화 중 ‘타짜’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타짜’의 캐릭터들은 모두 ‘폼생폼사’에다 강렬하지만, 내 눈에 가장 인상적인 배역은 아귀(김윤석)였다.

상대 타짜가 ‘구라’를 치는 걸 발견하는 즉시 손목을 잘라버리고, 한번 더 걸리면 귀를 잘라버리는 악당, 아귀.
어느 기사에선가 영화에서 아귀가 등장하는 장면이 다섯 씬 밖에 안된다는 최동훈 감독의 설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귀라는 성격 자체가 워낙 세기도 하지만, 아귀를 연기한 배우 김윤석처럼 얼마 안되는 출연시간동안 그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귀는 그냥 ‘악당’이라고만 말하기엔 좀 부족하다. 김윤석의 말대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같다. 정장 차림이 제법 멋진 큰 키와 선글라스, 얼굴의 칼자국과 능청스러운 전라도 사투리, 이런 이질적 요소들이 아귀라는 사람 안에서 단단하게 조합되어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악의 화신’이 됐다. 누가 뭐라고 도발해도 싱글싱글 웃으며 더 잔인한 말을 던지는 아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말그대로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칠 정도다.


게다가 그 사투리! 김윤석은 부산 태생이라는데 어쩌면 그렇게 징글맞을 정도로 전라도 사투리를 잘 구사할 수 있는지!!

아귀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화장실에서 손가락 잘라버리겠다고 낑낑 대는 고니(조승우)에게 “너 노름혔냐?”하고 툭 던지듯 물어보더니 아귀는 실실 웃으면서 조롱을 던진다.

“아따이, 너 그 손가락 절대 못자른다이. 뭐할라고 그래쌓냐. 그냥 놔둬라잉. 니가 안짤라도 쫌 있으믄 남들이 짤라줄 거인디~”


형님 복수를 하겠다고 펄펄 뛰는 졸개들에게 “인간적 감정 말고 자본주의적 생각”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아귀답게, 절대 악당 아귀의 무기는 ‘감정이입 절대 불가’원칙이다.

사람이 잔인해지지 않도록 돕는 가장 근원적 필터는 감정이입이 아닐까. 감정이입은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남의 고통, 기쁨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다.

타짜답게 아귀는 남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은 탁월하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고 망설이는 정마담의 뒤통수에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져”와 같은 촌철살인성 멘트를 날릴 줄도 안다.

그러나 남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감정이입은 할 줄 모른다. 아귀가 그토록 냉혹할 수 있는 힘은 '무감정'에서 나온다.
실내에서도 늘 쓰고 있는 선글라스로 남들이 자신의 감정을 읽을 기회도 차단한다. 그같은 '무감정' 때문에 손목이 잘릴 상황에서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두려움이 없고, 아무리 긴장된 상태에서도 극도의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귀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았다.
고니는 돈에 불을 지르고, 정마담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정마담 졸개는 도끼를 든 아귀 부하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빨리 책상 위에 묶인 아귀의 손목을 내려치라고 협박하는, 완전 아수라장인 상황.
그 상황에서도 아귀는 손목을 풀라고 별로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아수라장에서 탈출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도대체 왜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패가 나왔는지, 자신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복기하며 혼자 중얼중얼할 뿐이다. 쟤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지만 아귀로서는 도무지 고니가 하려는 '복수', 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 그로 인한 결과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입 불능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데에 딱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나는 사람이라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 페이스'가 오래 부러웠다.
그런데 아귀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포커 페이스' 부러워할 게 아니다. 무서워하고 울고불고하며 감정 다 드러나는 얼굴, 그 얼굴이 보여주는 '감정이입'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심지어 증오조차, 무감정보다는 낫다.

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