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저자 아버지트 배너지 외)의 핵심 내용을 이해한대로 정리한 글. 내 일과 관련하여 참고용으로 정리한 것이라 책의 중심 주제와 동떨어질 수 있음. 예컨대 책에서는 마이크로 파이낸싱에 긴 분량을 할애했지만 내 일과 그닥 연관이 없어서 정리 글에선 제외. 파란 색 표시는 책에 있는 내용 그대로를 옮긴 대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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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감당해야 할 문제가 거대할수록 압박감을 느끼고 금새 좌절한다. 헤봤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구호개발NGO에서 종종 느끼는 무력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루는 주제의 내용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붕붕 떠다니는 이야기일 경우가 종종 있다. 

아쉽게도 전문가들의 논의도 이런 형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의 모든 사회적 논의들이 그렇듯 좌파와 우파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몇 개의 예를 표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 원조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

 

 이슈

<좌파>

원조 낙관론자 (제프리 삭스, 유엔, 세계기구, 개발NGO)

<우파>

원조 무용론자 (윌리엄 이스털리, 담비사 모요, 미국 자유기업협회)

원조의 유용성

가난한 나라가 빈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국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빈곤의 덫은 존재하지 않으며 원조는 독자적 해결책 마련을 가로막는다.

물품 무상지급 (말라리아 모기장 등)

무상 지급 지지. 말라리아는 전염성이 있어 한 마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기장을 치고 자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말라리아 걸릴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무상 지급 반대. 사람들이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무상에 길들여지면 앞으로 다른 필수품에서도 보조금 혜택을 바라게 될 것이다.

물품/현금 무상지급을 통해 가난한 사람이 자신에게 유익한 행동을 하도록 유인해야 한다.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인책을 제공해도 소용이 없다

 

각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보기 나름이다. 각 입장마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갖다 붙일 수 있는 사례는 세상에 널렸다. 모기장이 말라리아 퇴치에 도움이 된 사례도 있는 반면 무상 지급한 모기장이 면사포로 쓰였단 사례도 있다. 또한 하나의 사례도 양쪽 모두의 입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예컨대 르완다는 대량학살 후 몇 년에 걸쳐 대규모 원조를 받고 경제가 성장하자 원조 의존을 줄였는데, 이는 원조의 성과일까, 아니면 자유시장의 성과일까? 둘 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의의 거대함 자체가 적어도 내게는 국제개발이라는 주제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거대한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질문을 거대하게 하기 때문, 다시 말해 질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의 입장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으려면 '빈곤 탈출'이라는 거대한 질문에서 시작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의 일상과 그들이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원조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일반적 논의 대신 "모든 문제에는 저마다 고유한 해답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저마다의 고유한 해답 찾기.' 


예를 들어보자. 가난한 사람들은 왜 예방접종을 해줘도 받지 않을까? 잠비아의 일반 가정이 식용유 구입에 쓰는 평균 비용은 1.1달러. 반면 물 정화를 위한 염소 소독제는 10센트에 불과한데도 이들은 사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난한 사람은 건강에 별 관심이 없어서?

저자들의 분석결과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되레 건강관리에 돈을 많이 쓴다. 문제는 그릇된 확신을 갖고, 비용이 적게 드는 예방보다 많이 드는 치료에 쓰는 것이다. 이조차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는 아니다. 예컨대 마을에 무료 진료소가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알고 보면 돌팔이이고 치료비가 비싸며 약을 남용하는 사설 개업의를 찾아간다. ? 보건소에 가면 있어야 할 의료진이 늘 없기 때문이다. 보건소는 왜 그럴까? 의료진이 결근해도 급여를 받기 때문이다. , 사람들이 보건소에 가지 않는 이유는 보건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대로 된 의료진이 있어서 예방접종을 받을 기회가 있어도 잘 받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기엔 건강에 대한 잘못된 신념이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는 저개발국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홍역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예방접종을 받지 않는다고 전부 홍역에 걸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방의 필요를 자기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는 측면도 있다.

사소한 손실을 뒤로 미루는 심리적 경향도 한 몫을 한다. 예방접종의 효과는 미래의 일이고 당장은 예방접종을 받으러 가는 것은 (시간의) 손실이다. 미래를 위해 모기장을 사는 것보다 당장 고등어튀김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실현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가능성을 의심하기 때문에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에 의해 돈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 잔치에 돈을 많이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집마다 TV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난의 나쁜 점인 생활의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해서라도 TV는 무엇보다 중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정보 부족과 박약한 신념, 자꾸만 뒤로 미루는 버릇은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겪는 문제인데 사람들은 흔히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수돗물이 저절로 나오고 공중보건 시스템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스스로 결심해서 선택할 필요가없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늘 자신의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존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행동을 유도하는 넛지 (nudge) 효과가 선진국의 부유한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런 넛지 효과가 없다. 


저자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품이나 현금을 무상지급하는 것이 그들을 더 게으르고 의존적으로 만드는 온정주의라는 비난에 단호히 반대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부자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이야말로 시스템 속에 완전히 녹아있어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온정주의의 수혜자들"이다. 우리가 개인적 선택권을 행사해 누릴 수 있는 혜택보다 더 많은 해결책을 누리는 것은 모두 온정주의 정책 덕분이다. 우리가 예방 접종, 상하수도 시설에 신경 써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다른 영역에 집중할 정신적 여유를 누리는 것 또한 온정주의 덕분이다. 이걸 저개발국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사회를 바꾸는 일이 전면적 개혁 없이 가능할까? 저자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래로부터의 관점', 즉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문제를 본다면 전면적 개혁 없이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말한다.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은 가능하다.


1.     가난한 사람의 정보 부족을 해결하면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알려주거나 간단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을 통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전통규범을 바꾸려면 TV드라마 등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전파하는 방식도 효율적이다. 

2.     가난한 사람은 사소한 부분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고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자주 한다. 따라서 디폴트 옵션을 만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넛지를 이용해 쉽게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 철분과 요오드가 강화된 소금을 누구나 사도록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도 하나의 예다.

3.     일부 시장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과한다. 대안적 시장을 창출하거나 정부가 개입해 시장을 지원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상품 및 서비스를 무상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상 제공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우려는 대부분 기우에 불과하다

4.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혹은 불행한 역사 때문에 실패하리라 단언할 수 없다. 실패는 대개 권력자의 음모보다 세부적 정책 설계 과정의 실수와 이데올로기, 무지, 타성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정부 운영방식과 정책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 마을 주민총회를 통해 주민 참여를 늘리고 정부 공무원을 감시하고 공공서비스 제공자에게 서비스 내용을 명확히 인식시키고 무거운 의무로 부과하기 등을 들 수 있다.

5.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없다는 예상은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흔히 전환된다. 노점상이 빚을 갚아도 또 빚지게 된다고 생각하면 빚 갚으려 애쓰지 않듯. 이를 바꿔야 한다. 마을에서 여성지도자가 활동하는 모습을 본 주민은 자기 딸도 여성정치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어느 하나의 상황이 개선되면 그 사실 자체가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이 같은 선순환에 발동을 걸기 위해 필요한 경우 물품이나 현금을 무료로 나눠주는 일을 꺼릴 이유가 없다.

 

저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구체적인 낙관주의자들" 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단순한 원칙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지 않고 낮은 곳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선택 논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에 영향을 끼칠 아주 작은 답을 찾기. 그리고 그와 같은 답을 축적해감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닮고 싶은 태도이다. 다음은 구체적 낙관주의자들인 저자들이 이 책에 쓴 마지막 문장.

"우리에게는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다. 우리가 기댈 것은 시간뿐이다.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좋은 의도를 가진 전 세계 수백만 명과 함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무궁무진 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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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