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끝자락에 오른 겨울 한라산.

원래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려던 계획은 무산됐고, 히말라야 몫으로 아껴둔 휴가를 한라산행에 썼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 오르지는 않았고 윗세오름까지. 영실-> 윗세오름 -> 어리목의 코스

국립공원 홈페이지와 여러 사이트들 검색해보니 4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코스인데 나는 6시간이 걸렸다. 두리번 거리며 구경하고 느릿느릿 걸었는데 몸에 무리가 없고 적당하다.

한라산의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해서 영실에서 올라갈 때만 해도 자욱한 구름 때문에 백록담이 있는 봉우리도 못볼 줄 알았다. 그런데 구상나무 숲을 빠져나오니 두둥~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

 


운무가 몰려오고 휘몰아 사라지는 변화의 속도가 장난 아니다. 영실에서 올라갈 땐 구름(운무인지, 가스인지, 눈보라인지…)이 몰려들어 500장군봉이고 뭐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의 길만 희미하게 보일 뿐인 구름바다. 바람 속에 잠깐 앉아 쳐다보는 동안,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사이 봉우리 하나가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도 거세 고개를 숙이고 오르던 길에선 뜬금없이 계속 황지우의 시 눈보라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큰 잘못은 없지만 자잘한 실수가 많은 한 해였다. 그리고 연말 대통령선거의 결과. 정치가 내 일상적 감정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칠 줄 몰랐는데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까.


 

한라산 윗세오름 부근의 구상나무 숲엔 눈이 쌓이질 않아 기대했던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은 볼 수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멀리서 본, 몇 그루의 눈 덮인 구상나무. 백석은 갈매나무를 노래했지만 그 이미지엔 갈매나무보다 구상나무가 더 잘 맞는 듯

산에서 내려와 비가 내리던 제주의 밤. 초가집의 아랫목에 앉아 창호문 밖의 파도소리,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 그리고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다시 읽다. 4년 전에 끼적인 낙서까지.

매번 실망하면서도 같은 시도를 반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내 미련한 심성이 지겨워진 요즈음. 그래도 기운을 차려 다시 처음부터 걸어보겠다는, 애매한 기대가 스물스물 생겨나는 걸 보면.....맞다. 완전히 절망하기란, 희망을 품는 것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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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