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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말, 앙코르와트로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무엇을 봤는지 벌써 가물가물하다. 사실 ‘구경’한 게 없어서 더 그럴 것이다.

관광 비수기에 우기라서 앙코르의 거대한 폐허는 가끔 적막했다. 무너진 사원의 고요한 그늘에 오래 앉아 있었고 이런 순간들이 좋았다. 앙코르톰 연못가 고목나무 아래 앉아 수첩에 잡생각을 끼적이던 오후, 텅 빈 사원의 반질반질한 돌 위에 앉아 졸던 기억, 폭우가 퍼붓는 광경, 툭툭을 타고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사이의 오래된 길을 달릴 때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던 바람의 느낌, 나를 만나러 6시간 버스를 타고 그곳까지 온 후배와 나눈 잡담, 함께 바라본 빗줄기, 함께 들은 리히터의 음악, 함께 마신 레몬 맛 칵테일. 뭐 그런 것들. 참 좋았던 순간들,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순간들. ‘행복’이란 건 일정하게 지속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이런 순간들이 아닐는지.

 


# 앙코르 유적지의 폐허 사이를 혼자 하릴 없이 거닐던 첫 날엔, 당혹스러웠다. 아무 할 일 없고, 산을 오른다던가 하는 집중해야 할 일도 없을 때 맨 먼저 저절로 둥실 떠오른 생각은 스트레스 받게 하고, 거슬리는 사람들에 대한 거였다. 앙코르와트에 와서 미운 사람을 떠올리다니, 황당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게 미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데에도 놀랐다. 평소 억눌러둔 감정이라 그런 걸까? 사람 일반에 대한 관용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지만, 구체적인 사람을 참아내는 관용은 갈수록 줄어든다. 그러니 스스로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

감정을 맞붙들고 분석하려던 마음을 밀쳐 내고, 법륜 스님이 늘 강조하던 대로 따라 해봤다. 마음이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고, 가만히 지켜보기. 나중에 돌이켜보니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새, 잊었다.

 


# 영화 ‘툼 레이더’의 무대였다던 타 프롬 사원의 나무들은 기괴했다.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뿌리로 사원을 딛고 일어서는 바람에 사원이 무너져간다. 정글을 헤치고 들어가 앙코르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기분이 이랬을까. 사원과 나무가 겨루다 갑자기 정지한 듯한 장면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면 다시 싸움이 시작될 듯한 장면. 나오는 길에 표를 검사하던 관리인에게 나무 이름을 물어보니 Kapok tree (판야나무) 라고 가르쳐준다.

나무의 생명력을 넘어 약간 오싹한 광경. 생명력은 맑고 아름답고, 뭐 그렇다기보다 기괴하도록 끈질기고, 무섭고, 정면으로 마주치면 달아나고 싶어지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그렇다. 생에 대한 허기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읽으면 감탄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만 달아나고 싶어진다.

 

 

# 사진을 찍다보니 어딘가로 건너가는 문의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끌리는 듯하다. 문지방을 건너가기, 신발, 길, 이런 상징들이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아 있고 나를 살게 하는 신화적 이미지들이다. 난 의식하지 못했는데, 친구가 ‘내 인생이다’의 자기소개에도, ‘푸른 눈 갈색 눈’의 옮긴이 해설에도 신발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더라고 알려주었다. 듣고 보니 한때 신발이 나오는 꿈도 자주 꾸었다. 누군가가 이거 신고 가라고 신발을 건네주던 꿈, 헤어진 사람을 마주쳤는데 내가 젖은 신발을 신고 있어서 수치스러웠던 꿈 등등. 요즘은 크게 괴로운 일이 없어서인지, 더 이상 신발 꿈을 꾸지 않는다.

 


# 여행이 끝나고 휴가 마지막 날, 성당 주보에서 소설가 최인호 씨가 쓴 글을 읽었다. 3만5천 년 전 다람쥐가 물어다 숨겨놓은 씨앗에서 꽃이 피었더라는 이야기. 꽃 이름은 실레네 스테노필라다. 최인호 씨는 묻는다. 이 꽃이 보기에, 우리의 삶은 얼마나 찰나이겠느냐고. 따라 읽어본다. 실레네 스테노필라, 그리고 타 프롬의 거대한 판야나무들. 그들이 보기에 하찮고 찰나인 삶. 그걸 잊지 않아야 ‘지금, 여기’에 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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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다녀오셨네요...
    언제고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입니다.
    저도 #을 쓸게요^^

    #1. 여행을 비수기 혹은 평일 다닐 수 있다면 사람에 치어 불편겪는일은 없을 텐데요.
    단점이 있어도 되레 더 좋지 않을까요. 꽃 이야긴 참 신기합니다. 무슨일인지 더 들여다봐야겠어요.
    #2. 쓰기는 글에는 곧잘 슬퍼보이는 부분이 꼭 한대목씩 들어있어서, 읽을적마다 찡합니다. 이번엔 신발이야기가 그랬어요.
    #3. 마음이 일어나는 걸 자신이 잘 살핀다는게 어디쉬워야죠. 잊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 훌륭한 생각을 졸렬한 경험을 어느 순간 잊고마는 겁니다. 그래서 전 팔지를 씁니다. 문구가 기록된 암시팔지죠. 늘 의식합니다. 바라봅니다. 팔지가 만성이 되어 의식하지 못하면 팔을 바꿔 다른 팔에 옮겨 끼우기도 합니다.
    2012.07.08 02:3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ㅎㅎ 비수기 여행,좋아요.
    우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비가 한바탕 쓸고 지나가니 그것도 좋더군요.
    팔찌...전 예전에 손목에 고무줄 끼고 다녔더랬어요.
    자멸적인 생각이 일어나면 한번씩 퉁기는.만성이 되어버려 금방 없앴지만요.^^
    2012.07.08 11:06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2.07.08 10:58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내가 빈 건....사실 생각이 잘 안나^^;
    네 기원 덕택에 맘이 평온한 모양이다.고맙다 ^^
    2012.07.08 15:12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고요한 휴가' 읽으면서 제 마음도 덩달아 고요해지네요, 산나님처럼,무너진 사원의 고요한 그늘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놓아 평온한 맘이 될거 같아요.모처럼만에 의미있는 상념에 푹 잠겼다가 갑니다. 2012.07.10 16:5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근데 휴가를 일찍 다녀오니, 7,8월이 아주 길~게 느껴지는 단점도 있더군요...;;; 2012.07.10 23: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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