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NGO에서 일하면서 난감할 때는, 잘 알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다. 정책, 옹호, 뭐 그런 걸 맡다 보니, 억지로 공부해서라도 그런 '큰 이야기'를 종종 해야 한다. 그럴 때 기분은 꼭 두메산골에서 고추아가씨로 뽑혀놓고 수상 소감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겠어요라고 말하는 듯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다 

 

 

지난 주 목요일 열린 글로벌 식량위기와 영양실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G20 정상회의에 즈음한 시민사회의 제안포럼을 준비할 때도 그랬다. 내키진 않지만 해야 하는 '큰 이야기'를 위한 자리라고 여겼고 탈없이 치러내기만 바랐다. 발표할 토론문부터 보도자료, 포럼 결과에 근거한 대정부 제안서 초안 등을 전부 맡아 쓰면서도, 내가 고른 말들을 왜 하는지에 나 스스로 별로 마음 두지 않았다.

 

내가 쓰고 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던 둔감한 나를 (다행히도 포럼 시작 전에) 두드려 깨운 사람은 세이브더칠드런 네팔의 영양 담당 코디네이터인 니라 샤르마였다. 우리가 포럼에 초청한 그녀의 발표문을 미리 읽고 포럼 전날 단체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그녀의 프리젠테이션을 들으면서, 국제개발이 하나마나한 큰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구체적인 '사람'의 이야기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즉, 빈곤 극복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하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일상의 문제다. 포럼의 주제였던 식량 안보와 영양실조의 위기 극복도 마찬가지다. 식량의 직접 지원 뿐 아니라 위생적인 환경, 소농에 대한 지원, 사회안전망 확충 등이 종합적으로 작동해야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그 핵심에는 영양실조로 비쩍 마른 아이들의 팔 둘레를 굵어지게 만들려면 매일 먹는 음식,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일상의 문제가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자주 잊고 산다. 네팔에서 온 니라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하던 '사람'을 보도록 이끌어주었다.

 

영양실조의 근본 해결책? 물론 빈곤 퇴치다. 하지만 이 큰 목표는 당장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극빈층 아이의 일상을 바꾸어내진 못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니라와 동료들은 자원도 없고 열악한 네팔의 오지 마을에서 '긍정적 예외 가정 (Positive Deviance Hearth) 찾기' 프로젝트라 불리는 걸 했다. 말은 어렵지만 내용은 쉽다. 보건 요원으로 교육 받은 마을 주민이 집집마다 다니며 아이들의 몸무게를 달고 영양 상태를 체크한다. 똑같은 극빈층이어도 아이를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잘 돌보는 집이 있다. 니라는 어떤 경우든 남다른 점이 한두가지씩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 집 부모는 뭐가 다른지를 심층 인터뷰하고 관찰한다. 이 남다른 점이 대단할 필요도 없다. 모유수유를 철저하게 한다던가, 공용 접시에 밥을 담아 여러 아이들이 경쟁하면서 먹도록 하는 대신 각자의 몫을 챙겨준다던가 등등 사소한 방법들이다. 이런 긍정적인 행동이 발견되면 마을 모임을 열어 이 방법을 전파한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책 '스위치'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이 베트남에서 실시한 비슷한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를 읽은 기억이 난다. ('스위치'에 소개된 사례를 인용한 칼럼을 여기 링크 ) 베트남에서도 아이가 잘 자라는 집은 뭐가 다른지를 관찰해보니, 어른들용 음식으로 여겨지던 새우와 게를 아이들 밥에 섞어 먹였고 형편없는 음식이라 생각하던 고구마잎을 요리해 단백질과 비타민을 공급했다. 이런 요령을 전파하는 것을 통해 영양실조를 개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네팔에서 니라 역시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아이들 음식에 쓰지 않는 작물을 활용해서 만든 영양식 (위의 사진들) 메뉴를 개발해 주민들을 교육했다. 곡물, 콩과 식물, 견과류, 유지작물, 야채, 뿌리 식물, 과일 등 종류별로 지역에서 자라는 작물 중에서 영양가가 있는데 잘 쓰이지 않는 곡물을 찾아내 아이들 음식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네팔 반케 지역의 한 마을에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뒤 지난해 11월 아이들의 몸무게를 측정했을 때 102명의 아이 중 93%의 몸무게가 늘어났다고 한다. 누구보다 영양실조는 나쁜 주술의 영향이라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주민들이 크게 놀랐고, 이후엔 이 프로젝트를 확대 실시하는 데 촌장부터 마을의 남자들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지역에서 만들어내는 이런 구체적인 변화 없이 실현 가능한 '큰 목표'가 있을까. 혹은 이런 구체적인 삶의 변화에서 출발하지 않거나, 이런 구체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 거시적 대안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니라, 그리고 함께 일하는 영민한 후배에게 자극받은 덕분에 이번 포럼의 토론 세션에 나가서 현장의 구체적인 사례와 국제무대의 식량안보 이슈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할 땐 살짝 재미있었다. 포럼 참가자 설문 조사에서 서로 동떨어진 듯한 주제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소감을 읽을 땐 은근 뿌듯했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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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