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만의 잡담 포스팅.

 

# 2월말에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는 공사를 했는데, 젤 맘에 드는 건 이 액자를 제자리에 걸어둘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34일간 걸어간 끝에 산티아고에서 받은 순례자 증서. 졸업사진이고 상장이고 예전 결혼사진이고 뭐고 오로지 나하고만 관련된 걸 내 손으로 액자에 넣어 벽에 붙여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아파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저 액자를 본다. 4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액자를 볼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구불구불한 길. 사방을 둘러봐도 풀과 나무 뿐인 평원에서부터 자궁처럼 깊은 숲길까지. 언제 다시 갈 수 있게 될까. 잊지 못할 길. 지금도 늘 걷고 있는 길.

 

이번에 공사 하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20권씩 포장한 책 11박스를 팔았다. 한 권에 2천원 이상 쳐주는 책만 알라딘에 팔고, 그 미만이거나 몹시 낡았거나 누구에게 읽으라 권할만하지 않은 책들은 kg 단위로 고물상에 팔고 버리기도 했으니, 이번에 처분한 책만 500권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너무 많다.

읽지 않은 책들도 꽤 된다. 공사만 끝나면, 번역만 끝나면, 저 책들을 다 읽어주리라 다짐했는데...... 공사도 끝내고, 번역도 끝낸 내 손에 어제까지 들려있던 책은 엉뚱하게도 도서관에서 빌린 루이스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였다.
왜 읽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 읽고 나니 그 황량한 땅에 몹시 가고 싶어졌다아무 곳도 아닌 곳을 향해 가는 여행. 지구상에서 행복한 존재가 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절대 속임수에는 속지 않는 뻥쟁이들의 땅, 아름답고 불가능한 무정부주의 혁명을 위해 은행을 털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최후를 맞은 곳. 어젯밤에 트위터에 파타고니아에 대한 낙서를 올렸더니 파타고니아에 세 번 다녀왔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트위터 말고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분이지만, 성미 급한 나답게 이달 안에 만나서 파타고니아 이야기를 듣기로 약속을 잡아버렸다. 적어도 2주 동안은 마음 설렐 일이 생겼다. ^___^

 

# 말과 글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말과 글에 대해 갖는 불신이 깊다. '전업' 글쟁이를 하겠노라 맘 먹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다. 아주 사소한 변화라도 직접 만들어내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잘 알지 못하던 비영리단체에 들어가 1년 반 째 일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이 온통 '사회적'인 이슈, 공익과 관련된 읽을 거리, 쓸 거리, 그 이유로 만날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잘 견디질 못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므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나, MBTI 검사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혼자 있어야 충전되는 극단적 내향형이다. (파타고니아 다녀온 사람과 만날 약속을 서둘러 잡아버렸다는 위의 낙서 읽고 나면, 소가 풀 뜯는 소리 하고 있네, 하겠지만...) 입장을 갖고 주장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어떨 땐 기자를 할 때보다 에너지 소모가 더 심하다.
엊그제 만난 예전 후배들은 내게 "맞지 않는 일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갑자기 기분이 아득해졌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도 자주 듣는 질문이다. 지금의 일을 언제까지 할지 정해두지 않았고, 꼭 지금 일이 아니라도 뭐가 되었든 '언제까지 할거냐?'라는 질문엔 '하고 싶을 때까지만'이라는 게 내 대답이었지만, 뭉뚱그리지 말고 한번쯤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에서 할아버지가 위대한 여행으로의 초대장이라며 손자에게 건네준 책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다. 대학 2학년 시작될 무렵쯤 분명 읽었는데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대신, 나 역시 어떤 여행으로의 초대장처럼 받았던 책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밑줄을 잔뜩 그은 그 책을 건네주던 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동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땐 몰랐지만 어떤 운명의 문 하나가 내게 열렸다. 그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없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의 주인공이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여행한 뒤 커다란 원의 출발점에 다시 섰듯, 나도 결국은 먼 길을 돌아 그 출발점에 다시 선 것일까. 때로 자연스러운 순환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어쨌거나, 손자를 고난으로 점철된 여행으로 이끈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잡담은 여기서 끝.  

"누가 되었든 행복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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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