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부터 프랭클린 플래너 수첩을 속지만 바꿔 끼워 써왔는데, 지난 해를 끝으로 결별했다.
대신 작은
메모용 수첩을 샀는데, 수첩 하나 바꿨다고 어깨에 맨 가방이 한결 가볍다. 그 정도의 무게도 감지할 만큼 내 어깨도 늙었나 보다.

스마트폰을 써보니 일정 관리로는 구글 캘린더만한 게 없다. 물론 이것 말고 다른 캘린더는 써본 적이 없지만. 여하튼 구글 캘린더 때문에 점점 일정을 수첩에 적어두는 회수가 적어지고, 결국 올해 가을부터는 수첩을 아예 안 쓰게 됐다. 그래도 가방이라는 건 수첩을 넣어야 완성되는 물건이라고 정해놓기라도 한 양, 가방 안에서 수첩을 빼놓은 적은 없었다.

일정 관리 용으로는 스마트폰을 애용하지만, 메모 기능은 거의 쓰지 않는다. 글자를 입력하는 게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글자 입력이 성가셔서 누가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나는 곧잘 전화로 답하는 편이다), 뭔가 메모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기억해두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차라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둘지언정 메모는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과도한 디지털화에 저항하고 싶어하는 마음인지, 손 글씨가 쓰고 싶어졌다. 펜을 잡고 뭔가를 길게 써본 적이 예전엔 많았는데, 요즘은 회의 시간의 짧은 메모 말고 펜을 잡고 글씨를 쓰려면 펜을 잡는 모양새부터가 어색하다. 회의 시간의 메모조차 회의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노트북을 들고 간다. 기억력이 급속히 줄어드는 제 주인처럼, 내 손도 점점 글씨를 쓰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내게도 필체라는 게 있었을 텐데.

 

손으로 메모해보자는 생각으로 어제 작은 수첩을 사들고 왔는데 막상 쓸 말이 없어서 난감했다. 새해의 첫 페이지에 '내일 회의때 ~ 공지', 뭐 그런 걸 쓰기도 좀 그렇고 말이다.
예전엔 새해가 될 때마다 올해의 말 같은 걸 생각해보던 때가 있었다. 2007년의 말, 2008년의 말

더 이상 이런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올해의 말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지난해 나의 말은 '내 밖으로 걸어 나오기' 였고, 그럭저럭 그 숙제를 해냈다.

올해의 말은......한 달 전쯤이었을 텐데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다. 철학자 김상봉 교수의 책에서 발췌한 구절인데, 발췌가 정확한지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오래 남은 말, 올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말이라서, 새로 산 작은 수첩의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씨앗을 뿌리기,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기,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의무를 다 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비극적인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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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