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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자 한겨레 신문 '문화칼럼'에 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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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이 꽂힌 책장이 있다. 『내 몸 사용 설명서』 『우먼 바디 포 라이프』 『기적의 휘트니스 30분』 『달리기와 부상의 비밀, 발』…. 혹시 ‘몸짱 아줌마’의 책꽂이?  또 이런 책장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 『죽음 앞의 인간』『죽음과 죽어감』『떠남 혹은 없어짐』…. 이건 우울증 환자의 책장?


둘 다 내 책장의 이웃 칸에 나란히 꽂힌 책들이다. 나는 몸짱 아줌마도, 우울증 환자도 아니다. 몸 쓰는 일, 죽음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에 몰두했던 한때의 관심사, 변덕스러운 취향의 흔적이 책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이다. 누군가 둘 중 하나의 리스트만 갖고 내 취향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려 든다면 몹시 억울할 것이다. 소지품이나 생활공간의 특성으로 사람 성향을 판별하는 심리 기법인 ‘스누핑(snooping)’에서도 특정 단서가 늘 특정 성격을 가리킨다는 따위의 완벽한 답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기본 전제다.


    사진출처=한겨레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씨 서재의 책들이 요즘 구설에 올랐다. 그가 문화방송 ‘피디수첩’과 인터뷰할 때 배경에 비친 책들이 『한국 민중사』『현대 북한의 이해』『혁명의 사회이론』등 평범하지 않아 문제라는 거다. 글쎄다. 스누핑 기법을 설명한 베스트셀러 『스눕』을 읽고 난 뒤 내 눈엔 그 책장이 이렇게 보였다.
‘서재 전체의 10분의 1도 안될 분량의 책 제목만으론 현재 정치 성향은 알 수 없고, 출간된 지 죄다 10년이 넘는 책들을 주제별로 꽂아놓은 걸 보면 꼼꼼한 장서가인데 그 사이에 주제와 관련 없는 『슬픈 열대』가 뜬금없이 끼어있는 걸로 봐선 자주 이용하지 않는 책장이 아닐까….’ 

엉터리 스누핑은 이쯤에서 접고, 의사가 경제평론가가 되고 공무원이 소설가가 되는 멀티태스킹의 시대에 기업인이 합법적으로 출판된 역사, 사회과학 책 좀 읽었기로서니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공들여 화면 흐림 처리를 한 ‘피디수첩’도 괜한 짓을 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제목이 확인된 책 10권 남짓을 갖고 한나라당 대변인처럼 그가 “특정 이념에 깊이 빠진 편향된 사고의 소유자”라고 단정 짓는 판단의 신속함이다.


면밀한 관찰과 이해의 수고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비합리적 신념의 형성 과정은 사소한 단서가 발견되면 이를 근거로 전체가 참이라고 판단하는 비약 논법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도 마녀사냥이 흔한 남태평양의 파푸아뉴기니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 인류학자 브루스 노프트(Bruce Knauft)가 80년대에 연구한 게부시(Gebusi)족의 마녀 조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마녀는 나뭇가지 뭉치로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조사 대상자의 거주지 근처에서 나뭇가지 뭉치가 발견된다. 그럼 그 사람은 마녀다. 나뭇가지 뭉치야 숲속 공터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데도 이 허술한 증거를 들어 게부시 족은 숱한 사람을 처형했다. 어리석다고? 이들의 믿음과 “좌편향인 사람은 ‘혁명’ ‘북한’ 관련 책을 읽는데, 김 씨의 책장에서 그런 책들이 발견됐으니 그는 좌편향”이라는 논리에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설령 김 씨가 서재 전체를 혁명, 북한에 대한 책으로 다 채웠다고 해도 그가 관심 분야가 협소하고 지루한 사람이라는 인상은 줄지언정 불법사찰을 받아 마땅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취향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건 야한 옷차림의 여자는 성추행을 당할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해자에게 범죄 발생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법사찰만큼이나 비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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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log.naver.com/tobeortohave 지아 진정한 언론 사상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몇군데나 있을까요.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아직도 끝없이 통제 감시 당하고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시간이 불순한 책 몇권 소지한 제목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했던 20여년전보다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형식적으로나마 사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있긴 있나. 노르웨이? 핀랜드? 독일? maybe or maybe not. 2010.07.10 14:3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나는 권리의식이 높질 못해서 "진정한" 언론사상의 자유까진 바라지도 않지만(통제 없는 권력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당하고 탄압받는 수준은 넘어섰으면 좋겠어.안그러면, 너무 후지잖아!
    2010.07.10 20:46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kwang.info 광서방 잘 읽었습니다. 조리있게 쓰신 말씀 딱 공감 갑니다. 저도 저 기사 딱 보고 '이런 것도 기사라고 썼나..'라면서 좀 많이 답답했습니다. 더불어 '스눕'도 읽어봐야겠네요.
    좋은 주말 되시구요~
    2010.07.10 15:3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들 다 아는 이야기인데 괜히 혼자 열올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좀 신경쓰였거든요.^^
    2010.07.10 20:4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blog.naver.com/inheek22 nabi 산나님 책(산티아고) 읽고, 이렇게 가끔 블로그에 들어와 보고 하다가
    오늘 아침 신문에서 얼굴까지 보니까, 산나님이 정말 '아는 사람' 같아...^^
    나 혼자 친근히 느끼고 있답니다. (그 시초는 inuit님 블로그에서부터^^)
    2010.07.10 22:4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하하~반가워요. 블로그에 가보니 자전거를 배우시는군요.
    예전에 저랑 친한 기자가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가고 싶은 단 하나의 기억"을 묻는
    인터뷰 시리즈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어떤 분이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의 기억을 가져가겠다고 답하셨어요.
    (아마 소설가 김영하씨였던 듯...정확하진 않습니다)
    나비님 자전거 배우신 모험을 읽다보니 처음 자전거 배울 때의 설렘, 불안,
    그리고 드디어 누가 잡아주지 않아도 직선상의 두 바퀴를 나 혼자 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생각나네요.^^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날, 처음 가는 길' 생각하면서,저도 뭘 새로해볼까 궁리중이랍니다 ^^
    감사드려요.
    2010.07.10 23:49 신고
  • 프로필사진 Ocean1021 1980년대 30대가 지금은 60대이니 이들이 지금이 은퇴러시이니 이런 개인의 자유인권침해같은것은 없어지지 않을까? 얼마나 40대이하를 무시했으면 그럴까? 블로그에 글 남긴건 처음이네 정보가 많고 좋네^~^ 2010.07.12 13:1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음...말투로 보아 저랑 아시는 분 같은데 아이디만 갖고선 도무지 모르겠고...자수하시지요? ^^ 2010.07.13 13:21 신고
  • 프로필사진 Ocean1021 일발장전이여^~^ 2010.07.16 13:4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참,나~^^ 왜 실명을 썼다가 아뒤를 썼다가 오락가락이얌. 헷갈리게 ^^ 2010.07.16 15:02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0.07.14 01:09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나도 오래된 책들을 갖고 있던 이사오기 전 책장을 뚝 짤라 사진을 찍는다면 남들은 기함했을 것..
    정말 네 말대로 때론 생각의 찌꺼기, 허물에 불과할때도 많은데 말이다.
    2010.07.16 13: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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