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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편집자들에게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시장조사를 하겠다고 서점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서점에야 신간을 포함하여 많은 책들이 구비되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내가 읽어온 책의 목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편집자가 평생 기획할 수 있는 책이 몇 권이나 될까. 극단적으로 한 달에 한 권을 만든다고 치자. 40년 동안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면 480권을 만들 수 있다. 480권의 목록을 어떻게 구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처음 50권은 편집자의 독서편력에서 비롯된 취향과 기질이 반영된 기획도서가 아닐까 싶다. 나머지 400여권은 그 50권이 가지치고 혹은 뿌리 나누기를 해서 스스로 숲을 이루어나갈 것이다. …편집자가 자신이 잘 아는 분야,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내다보면 그 책이 다른 책을 불러 온다. 책 한 권을 만들면서 그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편집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책 한 권을 출간하고 나면 몇 권의 기획 아이디어가 샘솟는다고 할 수 있다.

-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 중에서 -


얼마 전부터 고민하는 사소한 선택의 과제가 하나 있다. 그냥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이는 변덕 때문에 생각이 더 뻗어나가질 못하고 계속 제자리 맴돌기 중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편집자 분투기’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저자의 표현에 빗대어 말하자면 ‘내가 읽어온 책의 목록’을 살피지 않고 ‘서점의 신간’을 살피러 나돌아 다니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듯하고 중요해 보이는 대상을 선택하고 싶은 얄팍한 욕심에, 애초에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섰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내 삶 속에서 만들어진 질문, 내 문제에 근거하지 못하는 선택, 전문성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근거가 여전히 빈약하다면 두리번거리면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이곳까지 나를 이끌어온 내 질문을 먼저 들여다볼 것. 무엇보다, 홍상수 감독이 고현정의 입을 빌어 설파하신 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집적대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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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realfactory.net 이승환 왠지 죄송하다고 빌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글-_-; 2009.10.22 15:4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헐~제가 뭘 잘못해서 그런 마음이 들게했는지 죄송하다고 빌고 싶은 마음...-.-;;; 2009.10.22 17:54 신고
  • 프로필사진 사복 뜨끔합니다.. 죄송하다고 하기에도, 너무 부끄러워요; 2009.10.22 18:5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얼렐레~왜들 이러시는지....ㅠ.ㅠ
    제가 뭘 잘못 썼나봐요? 제목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나오는 대사인데,너무 쎈가요?
    2009.10.22 20:37 신고
  • 프로필사진 지아 아는만큼만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사람 의외로 적어요. 자신이 잘 모르는것을 인정하려면 내가 뭘 모르는지부터 알아야하는데 그걸 잘 모르다보니까니 ㅋㅋㅋ 2009.10.22 23:2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웅~근데 확실히 내가 제목을 선정적으로 단 것같긴 하네.^^
    '아는 데서부터 시작해보자' 뭐 이런 생각을 한 거고, 사실 제목이 이 내용과는 별 관계가 없는데
    댓글은 선정적 제목에 대해 달리는 추세~^^;
    2009.10.22 23:30 신고
  • 프로필사진 마음산 으왕....저야말로 왕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어요~~ 2009.10.23 11:5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힛~ 저자 사진까지 찾아서 올려놓을까봐요~~^^ 2009.10.25 21:2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happylion.co.kr 즐거운 사자 저도 제가 걸어온 경력(내가 읽어온 책의 목록)을 살피기 보다는
    자꾸만 전혀 다른 새직종(서점의 신간)을 살피러 돌아다니다 참 많이도 헤맸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제 자리에서 되돌아 보니
    제가 걸어온 길이 모두 이 길로 이어지기 위함이었구나 깨닫게 되더라구요.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2005년 스텐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 중 한 귀절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내다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미래에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이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능이든,운명이든,삶이든,인연이든,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마음을 따르는 일이 여러분을 탄탄대로에서 벗어나게 할 때 조차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2009.10.23 21:1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그 유명한 'connecting the dots'로군요.^^
    뒤돌아보아도 왜 내 점들은 연결이 안되나 답답할 때가 많은데..잡스의 말대로, 믿어볼까요?^^
    2009.10.25 21:25 신고
  • 프로필사진 현숙 홍상수 감독 영화를 즐겨보는 일인으로서, 언니 제목선택이 논지에서 영 벗어난건 아니라고 생각됨니다. ^^ 머...마음을 들여다보고 따르는게 모든 질문의 해답이라는건 두말하면 잔소리일 거고. 요는 고걸 못하게 방해하는 지식인적 자의식 과잉이 문제라는거 아니겠슴니까요. 저라는사람은 매우 뻔뻔하게도 그런 영화를 보면서 아하하 웃다가 어우야~하다가, 음...지식인은 역시 문제가 많아, 하면서 정리한다는. 2009.10.24 01:48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딱 홍상수 영화스러운 정리방식이로세 ^^ 2009.10.25 21:25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09.10.24 02:08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그렇지. 내공으로 따지면야 둘째가라면 서러울~ ^^ 2009.10.25 21:26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unny.com montreal florist 정말 정말 유식해야하는 직업이군여 2009.10.24 08:3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음...그보다는 유식하려고 애쓰지 말고, 네 관심사가 뭔지 먼저 파악해라,그런 취지로다가
    저는 읽었습니당~ ^^
    2009.10.25 21:28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falda.egloos.com 팔다 에헤헹....모르는 거 아는 척 하면서 쓰려다가 페이퍼가 안드로로 가는 중인 저입니다요...
    모르는 거는 우라까이도 잘 안된다는 진리....
    2009.10.25 00:1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마자마자...옛날에 나 꼼지락거리던 거 보다못한 모 선배가
    "야, 도장파지 말고 그냥 우라까이라도 해서 빨리 띄워!"하고 소리지를 때,
    '뭘 알아야 우라까이라도 하지요'하고 항변하고 싶었다는...ㅠ.ㅠ
    2009.10.25 21:30 신고
  • 프로필사진 저는, 제 기사를 스스로 복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허걱...역시 아는 건 우라까이가 잘 되더이다 2009.10.25 17:3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어인 자학을...완죤 '잘쓴 기사 하나, 열 취재원 안부럽다'로세~^^ 2009.10.25 21:34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생각의 안테나에 포착되는건 역시 내 취향의 것이더라구요. 그러니 산나님도 첨에 구상했던거를 다듬는 정도로 큰틀은 바귀지 않을거란 생각이드네요.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공부하시는거 말고도 여러 계획이 많으신 분주한 가을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그와중에도 블로거에참참이 글을 올리시니, 전 넘 좋아요.
    2009.10.27 00:3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문제는 '첨에 구상했던 거', 그것이 뭔지를 저도 잘 모른다는 거죠 ^^;
    모르거나 말거나, 그냥 뭐 눈에 띄는대로 재미있는 것 따라다녀볼라구요 ^^
    2009.10.30 00: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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