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져라 좋아져라….”

그녀가 미니홈피 대문에 마지막으로 걸어둔 문구였습니다.

내 친구 정승혜.
오늘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외운 주문대로, 더 좋아지려고, 고통없는 세상을 향해 서둘러 떠난 것인지...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처럼 볕이 좋았던 날 배웅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요….


해질 무렵 그녀를 내려놓으며 긴 작별의 의식이 끝나던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놀랐습니다. 만사를 제치고 그녀를 배웅하러 먼 길을 온 사람이 100명도 넘었습니다. 저처럼 휴가를 내고 따라온 사람이야 둘째 치고, 출장을 갔던 칸 영화제에서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달려온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 공항에서 장지로 직행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녀와 20년 지기인 이준익 감독님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목이 메어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정승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십니다”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아직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물기 없는 눈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지만, 정돈된 글을 쓸 자신이 없어 그녀의 추모특집을 싣는 매체의 원고 요청도 사양했지만, 돌아오고나니 횡설수설로라도 그녀에 대해 말하고 싶어지는군요.....  

10여 년 전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만났지만, 그녀는 제 친구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녀를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수평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신기한 능력을 그녀는 지녔습니다. 

그녀는 제가 직접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2006년 병을 발견할 때부터 의사가 길어야 1년 남짓이라고 했다던 삶을 그녀는 3년 넘게 살아냈습니다. 역시 그녀와 20년 지기로 이 감독님과 함께 상주 역할을 하셨던 조철현 대표님은 그저께 빈소에서 "승혜는 일에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심지어 병을 맞서서건, 단 한번도 비겁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그녀가 장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녀가 나를 친구로 대해 주었다는 것을 내 삶에 드문 영광으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숱한 관계의 흔적이 쌓여 '나'를 만든다는 제 생각이 영 엉터리가 아니라면, 지금의 제 안에도 정승혜의 흔적은 또렷합니다. 정승혜, 이준익 감독, 조철현 대표를 포함한 씨네월드 3인방 이 아니었다면 4년 전 저는 감히 책을 써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이고, 지금의 저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무모하게 첫 책 쓴 것도 이 3인방의 강렬한 '펌프질' 때문이었고, 정승혜는 한술 더 떠 책의 삽화와 표지를 그려주고 제목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첫 책이 나오자마자 제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도 이들 3인방에게였습니다.
그녀 자신이 책 3권 저자이자 글쓰기에 대한 매혹이 누구보다 강했던 사람인 터라, 우리는 만나면 서로 쓰고 싶은 책 이야기를 곧잘 주고받곤 했습니다. 그녀는 영화 카피라이터가 되는 법도 쓰고 싶어했고, 중편소설도 쓰고 싶어했고, 가장 최근엔 병상일기를 써서 인세를 어린이 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도 싶어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쯤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제가 보낸 엽서를 보고 그녀는 자기도 건강이 회복되면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여행기가 4월에 나온다고 뻥을 쳐놓은 탓에, 한달여전 전화로 "얼른 싸인해서 갖구 와!"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좀 서두를 것을....그녀에게 받은 것에 비해 뭐 하나 해준 게 없는 쓸데없는 친구인 저는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칩니다. 눈물범벅이 된 미련한 저를 가만 지켜보던 조철현 대표님은 오늘 제 허접한 책 한 권을 그녀의 발치께에 얹어 함께 하늘나라로 보내주셨습니다. 먼 길 가는 그녀와 잠깐이라도 함께해줄 길동무가 된다면 그 책은 세상에 태어난 제 사명을 다하는 게 될 것입니다.
내 친구 정승혜. 부디 고통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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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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