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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 -

몇 번씩 반복해 읽은 시구를 따라 먼 산 바위 옆에 서 있을 갈매나무를 그려본다. 아내도 없고, 집도 없어지고, 부모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낯선 거리를 헤매던 한 사내가, 어느 목수네 집 추운 곁방을 얻어 옹색한 불에 손을 쬐며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되새김질하다 그 괴로움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던 사내가,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고개를 들어 그려봤을 갈매나무. 마른 잎새가 쌀랑쌀랑 눈을 맞을, 쌓인 눈에 잔가지가 뚝뚝 부러져도 굳게 버티어 서 있을 갈매나무. 

그렇다. 이 쓸쓸한 사내처럼, 누구나 마음 안에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하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엔 버리고 또 버려도 희미하게 미소짓는 어떤 것이 끈질기게 남아 있어서, 희망을 품기보다 '완전히 절망'하기가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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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songkang.tistory.com 구월산 삶이 항상 싸움이 되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씀하셨는데,희망이란 싸움의 동격이죠.
    완전한 절망(비움)이 그런 싸움을 수월하게 해 줄 것 같다는 것은 또다른 희망이자..싸움...
    쓰고보니 말의 유희같군요.
    2008.12.04 11:2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항상 싸움이라면 전 피곤해서 그냥 손들고 말아버릴 것같은데요.^^
    기회가 닿으면 백석의 시 한번 읽어보세요.
    겨울밤에,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읽기엔 이보다 좋은 시가 없습니다.^^
    2008.12.07 22:09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요즘처럼 뒤숭숭한 때 백석의 시를 읽으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오랜동안 잊고 살던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의 정서에 귀한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지요. 평안도 방언이 낯설긴해도
    왠지 정겹고 따뜻하고 뭉클하게 하는 뭔가가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시집을 하루만에 다 보았죠.
    2008.12.10 09:52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그러셨군요.^^
    그렇게 감성적인 시인이 그 숨막히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참 안스러워요.
    2008.12.10 21:57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재북시인이라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쉬워요,글구, 1995년 운명하기전 까지의 삶과 창작활동이 어떠했을까 넘 궁금했어요, 훗날 통일이 되서야 가능할지 ㅠㅠ~ 2008.12.11 15:4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백석의 시를 엮은 여러 책들이 있던데,
    제가 갖고 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엔 그의 개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좀 나옵니다.
    참고하시길~ ^^
    2008.12.14 00:18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아, 그렇군요. 감사! 글구요, 산나님의 책은 진도가 어데까정 왔나요? 궁금 만땅! 2008.12.14 16:12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아, 그게요 ^^; 내년초로 미뤄졌습니다.
    출판사가 도저히 출판 못하겠다고 마음을 바꾸지만 않는다면요. ^^
    2008.12.16 19:54 신고
  • 프로필사진 gaia0218 읽어 내려가며 어느샌가 눈물이 괴이게 만든 백석님의 시였어요. 2009.05.25 12:4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그렇지요? 전문을 읽으면 더더욱.... 2009.05.26 13:36 신고
  • 프로필사진 오늘 아...좋은 시에 좋은 소감이네요.말씀하신대로 겨울에 더욱 어울립니다. 트윗타고 와서 읽었어요. 잘 보고 갑니다 2010.12.09 10:38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아이폰으로 블로그 댓글도 달수있군요^^ 이 시 참 좋지요? 2010.12.09 15: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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