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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두 대의 소시지 기계가 있었다. 한 대는 열심히 돼지고기를 받아들여 소시지를 만들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으로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기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부는 더 공허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결국 이 기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버트란트 러셀 '행복의 정복'에서-

석달 전,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때 나 자신이 텅빈 내부만 들여다보는 소시지 기계처럼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다. 걸으면서 본 것이 오직 나 자신 뿐이었던 날들. 내 자책, 내 후회, 내 불안...그러려고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도.

낯선 풍경과 사람들, 세상의 무수한 사건들은 내가 관심을 기울일 때에만 내 경험이 된다. 어디서든 뭔가를 얻고 싶다면, 근사한 풍경과 만남, 사건이 날 찾아와주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선 나 자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했다. 그 길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두달 전 마쳤던 여행의 경험을 밤새 정리하면서, 다시 그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그때는 뭔지 잘 몰랐던 느낌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명료해지기도 한다. 어떤 일을 겪든 사람이 저절로 변화하는 경우란 없는 것같다. 변하기로 '선택'할 뿐이다. 그 선택이 당장은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무엇보다 어떤 경우든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선명한 인생의 메타포를 갖게 되어 그 길을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이 잘 안보일 땐 그 길에서 모진 비바람이 불 때 무작정 걷던 일을 생각한다. 그 길에서 언덕을 오를 때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상상했다. 때론 좋은 사람, 멋진 경치, 또 때론 진창, 메마른 자갈밭을 만났다. 무엇을 만날 지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간다는 걸,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은 어디쯤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답은 자명하다. 걷는 일 뿐이다. 조금 지나면 배낭을 내려놓고 쉴 바위를 만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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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dangunee.com 당그니 길은 선택할 수 없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2008.08.17 14:3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없던 길을 몸으로 밀고 가보면서 만드신 분이 무슨 말씀을 ^^ 2008.08.17 17:27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08.08.17 15:07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겁''심란''초조'같은 단어보다 '두근두근''콩닥콩닥''설렘'같은 단어들이 더 어울릴 여행을 목전에 두고 무슨 말씀을! 환송회 해야겠구나 ^^ 2008.08.17 17:28 신고
  • 프로필사진 마음산 점점 책에 대한 기대감이^^ 질투감과 함께..헤헤 2008.08.17 19:3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무슨 말씀을~ 괜히 질투하는 척 하시는 거죠? ^^ 2008.08.18 01:25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음~ 사실 제가 산티아고 순례에 눈길을 빼앗긴건 다름아닌 후자의 소시지 기계가 되고 싶어서였던거 같아요.
    세상이 주는 모든 연결 고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면서 나 자신에게만 몰입하고싶은...
    그래서인지 전 혼자서두 무척 잘알 놀아요. 영화, 음악회, 밥먹기, 저희 아파트 등산로 산책.....
    2008.08.18 19:5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혼자 영화 음악회 밥먹기 산책을 즐기면서 잘 노신다니 lebeka58님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의 소시지 기계신 거죠. ^^
    후자였다면, 혼자 밥먹거나 산책하면서 잘 놀기는커녕 '난 왜 혼자일까...나는 왜 이렇게 살까...'같은 종류의 생각으로 자기 속을 들들 파고 있었겠죠.^^
    2008.08.19 00:59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글쎄요, 전 후자의 소시지 기계가 더 끌리네요(저자의 의도와는 영 아니올시다지만은요) 소시지 기계 그 이상이
    되고자하는 타는 목마름의 열정이 미쁘지 않아요?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자유에의 도피>가 아닐까유ㅠㅠ ( 어법에 맞나요? 왠지 쫌 이상한거 같네요)
    참, 쓰고 계신 책은 진도 팍팍 나가고 있으신가요? 엄청 궁금하담니당!
    얼마전 모 라디오 방송국의 <세상의 모든 음악>의 '풍경과 음악' 코너가 있었는데 근 1년(?) 가까이 유럽을
    혼자 다니며 자유로이 쓴 편지 형식의 여행기였죠, 젊은 작가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 그리고 문화 예술에 대한 경장한(?) 지식으로 한동안 일요일 저녁을 기다리게 했던게 문득 기억나네요.
    2008.08.19 14:4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소시지 기계 그 이상이 되려는 열정'-멋진 해석이신데요.^^ 책 진도는 너무 안나가서 영...-.-; 2008.08.20 19:3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conteworld.tistory.com 컴속의나 전자의 소고기 기계가 돼지고기를 받아들였을 때 그 관계에 의해 서로의 가치나 의미가 드러나듯이, 삶도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의미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는게 아닐까요. 기계를 만나 소시지가 만들어지고 돼지고기를 만나 소시지를 만드는 기계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저는 세상과의 관계속에서가 아니라 혼자 끙끙 앓아오지나 않았나 생각이 드는 군요.

    하지만 또 자아와의 관계나 대화도 필요도 하겠지요^^
    2008.08.19 15:3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혼자 끙끙' 이거 너무 오래하면 병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2008.08.20 19:4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crazia.fiaa.net 광이랑 잘 읽고 갑니다. 저는 누가 말했지만 '진정한 여행은 가본적이 없어 니가 간것은 단지 관광 일뿐이야. 놀러 간 것이지.' 라서.. '여행' 다녀오신 수잔나 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2008.08.20 15:5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진정한 여행'이 뭔지는 좀 모호하지만 아무튼 다녀오면 싹 잊어버리는 여행이 아니었다는 점에선 좋았어요.^^ 광이랑님도 언젠가 하게 되실 거예요. 하고 싶어하고 자꾸 생각이 나면 언젠가는 꼭 하게되더라고요. 2008.08.20 19:42 신고
  • 프로필사진 사복 저리저릿 > _<* 어쩐지, 잔잔하면서도 진한 위로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2008.08.27 15:2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 저릿저릿 옆의 이모티콘(?)을 보니 정말 저릿저릿한데요. ㅎㅎㅎ 2008.09.06 00:54 신고
  • 프로필사진 lebeka58 '답은 자명하다. 걷는일 뿐이다'에 완죤 공감입니다. 걷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길이 보이고 그 다음 길이 계속해서 나타나는거 같아요. 처음부터 모든게 선명하고 확신을 주는 거는 없더라구요,
    산나님은 경장한 비장의 좋은 무기를 많이 갖고 계신 (엄청 부러워용!)잠재적인 능력의 소유자시니, 분명 뭐든 하시면 산나님의 목소리로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가 확실하리라 믿습니다요!
    2008.09.01 12:0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아이고...저를 만나보시면 '엄청 부럽다'는 맘이 싹 사라지실 걸요.^^; 뭘 잘하진 못하니 '더 잘하려는' 노력대신'다르게'해보자 생각은 하는데 참 그게 어렵더군요. 말슴대로 처음부터 선명하고 확신이 드는 일이란 없다는 거 알면서도 말이죠. 그나저나 lebeka58님의 격려 덕분에 우울했다가도 기신기신 움직이게 됩니다. 감사드려요!!!~ 2008.09.06 01: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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