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세계 최초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완등….

독일 출신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숱한 ‘세계 최초’들. 첨단 지원 장비나 남의 도움 없이, 거창한 명분 없이 혼자서 높이, 많이 오르는 것을 추구했던 남자. 그에게도 두려움이란 게 있을까.


단호하고 약간은 오만한 구도자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책을 펼쳤는데, 처음부터 당황스럽다.
책은 1973년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을 시도하던 메스너가 암벽에서 두려움에 몸을 떠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곳에 있다는 무서움, 앞으로 어떠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두려움’에 짓눌리고, ‘내려가고 싶다’와 ‘올라가야 한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오죽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으면 ‘텐트를 걷은 뒤 결단을 내려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텐트를 다 걷은 뒤에는 배낭을 멘 뒤에 생각하자고 결정을 또 유보한다.

겨우 발걸음을 뗐을 때, 다행히 몸을 움직이니까 기분이 좀 나아져 안도했지만 갑자기 그는 자신이 산을 내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몸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가야할 곳으로 가고’ 있었고, 여기에 저항할 순 없었다.


4년 뒤. 다시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을 준비하면서 배낭과 카메라, 자일 등 짐을 싸기 위해 필요한 물품을 죽 늘어놓던 메스너는 그만 울고 만다. ‘지금 떠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길을 떠나지 못했다.


반년 뒤. 그는 1978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하는 ‘세계 최초’ 기록을 세우고 돌아온 지 6주 만에 곧장 낭가파르바트로 떠났다. 기록 경신에 눈이 먼 사람 취급을 받았고, 이상주의적 명분을 찾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그가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라고 밝힌 등반의 이유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남의 시선이야 아랑곳 않고 떠난 그는 오랜 세월 두려움의 대상이던 산, 번번이 그를 내쳤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운명적인 산을 홀로 오르는 데 성공한다. 1970년 그가 이 산에서 눈사태로 동생을 잃은지 8년만이었다.


나는 이 책을 심하게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메스너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독 등반을 처음 시도할 무렵 아내와 헤어지고도 사랑을 철회할 수 없었던 그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검은 고독’이, 어떻게 해서 ‘흰 고독’으로 변모했는지에 대해서였을 것이다. 1978년 낭가파르바트에 홀로 오르며 그는 이번엔 자신이 해낼 거라는 걸 알았고, 이렇게 말했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얼얼하게 남은 건 책에서 그다지 많이 다뤄지지 않은 기간, 즉 1970년 동생을 잃고 초주검이 되어 기어내려온 그 산에 1978년 그가 다시 오르기까지 8년간의 세월, 번번이 시도했다가 두려움 앞에 무너지던 그 시간들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 그런 사람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짐을 싸다가 울고, 무서워 주저앉기도 했다니...

일말의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걷는 이의 단호한 발걸음을 선망했으나 메스너는 그런 걸음이란 없다고 들려준다.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전부터 아는 길을 갈 때에도 '그때마다 다시 찾아나서는' 사람으로 걷는 것,  한 생애의 아름다움은 거기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내 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나는 강해진다. 무엇이 나에게 이 힘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힘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그저 그 힘을 이용할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 힘을 황량한 협곡에서, 쓸쓸한 고지대의 계곡에서, 그리고 높은 산중에서 찾아냈을 뿐이다.”

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살아 있는 산악인의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 책은 세계 등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이라는 세기의 도전을 하는 불굴의 도전 정신과 그의 깊은 내면의 고독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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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