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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나무의 죽음

sanna 2007.08.18 15:54

오래된 숲에 가본 적이 있으신지요.

적막함이 뒤덮은 숲 속이지만 뭔가 미세한 움직임의 기운이 늘 귓전과 뒤통수를 간질이지 않던가요.  저 굵은 나무 뒤편 어디에선가 날 지켜보는 다른 생명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때론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하지요.


산림학자 차윤정이 쓴 ‘나무의 죽음’을 읽다보면 오래된 숲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이 미세한 기운이 실은 평온함 속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역동을 증거하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오래된 숲의 나무를 주인공 삼아 새로운 종의 탄생과 소멸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다뤘습니다. 얼마 전 이 책을 읽은 뒤 강원도 횡성의 산자락에 올랐는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무, 그 위에 피어난 이끼, 나무 밑동의 버섯들이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저자는 차분한 경어체 어투로 나무의 일생과 죽음을 설명합니다.

나무는 한 번 정착한 곳에서 일생을 보내는 탓에 평생 온갖 생명체의 공격으로 성할 날이 없습니다. 나무가 잎과 뿌리를 통해 공기와 흙속의 양분들을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여 농축시켜 놓으면, 바로 그 때문에 무수한 생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나무를 향한 생명들의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무에게 가해지는 상처는 많아지고 나무 또한 상처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나무의 수액은 벌 개미 나방 장수풍뎅이 등의 먹이다툼의 대상이 되고 딱따구리는 수액을 가로채기 위해 나무의 껍질을 쪼아 벗겨내지요. 수액을 찾는 동물들이 갈라낸 틈은 호시탐탐 나무를 노리는 곰팡이를 비롯한 온갖 미생물들에게 침투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작은 짐승들은 나무 밑동에서 안전한 거처를 구하지만 밑동에 숱한 상처를 냅니다. 그 틈을 통해 토양 속의 무수한 미생물들도 살 자리를 찾아 나무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지요. 숱한 동물들과 몸속으로까지 들어온 애벌레, 미생물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나무는 스스로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줄기 속 조직이 와해되면 땅으로 쓰러집니다.


나무는 쓰러진 채 썩어가면서도 다양한 생물들과 생태적 기능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죽은 나무는 “오래된 숲에 의존해 살아가는 약한 생물들을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가 되지요.
토양 속 개미나 천공성 딱정벌레들이 모여들면 그들의 몸에 박테리아 효모 미생물들이 따라오고 또 이들을 먹고 사는 톡토기 진드기 같은 곤충들이 모여듭니다. 또 이들을 먹고 사는 거미 전갈 지네가 모여들고…. 쓰러진 나무처럼 곤충들에게 잘 차려진 만찬테이블이 따로 없다고 하는군요.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게 온갖 생물들이 들어차면서 살아있을 때에도 단지 5% 정도의 살아있는 세포로 유지되던 나무가 죽어서는 40% 이상의 살아있는 세포로 채워지게 된다고 합니다.


나무를 통해 연결된 다양한 생물들이 나무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재촉하는 연쇄적 활동을 읽다가 책을 덮고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그렇게 흘러가다보면 나무의 일부분이 어느 날 딱따구리의 깃털이 되고, 전갈의 다리 하나가 되고, 버섯의 머리에도 스며들었다가 내 머리카락의 하나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나무의 죽음 이후의 풍요로움을 생각하면 나무는 죽었지만 절대로 죽은 게 아니지요. 살아있는 세계와 죽은 세계가 금 긋듯 분리되지 않고 물질의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순환하는 이 신비로운 흐름을 생각하면, 그리고 나 역시 그 흐름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덜 공격적이고 덜 외로워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나무를 둘러싼 숲 생태계의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세세하게 드러내 보여준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건조한 개념어로 일관하지 않고 멋진 비유들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저자의 글 솜씨입니다.

수피(나무껍질)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한번 볼까요. 수피는 "나무가 죽음을 맞이했을지라도 나무의 죽음을 은폐하는 역할"을 합니다. 끝까지 나무의 죽음을 수호해온 수피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나무는 초라해지기 시작하죠. 저자는 이 과정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주인을 잃은 호위무사는 이제 주인의 모든 것을 정리해주는 늙은 집사가 됩니다. 늙은 집사는 주인의 모든 것이 드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주인의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나무의 죽음 - 오래된 숲에서 펼쳐지는 소멸과 탄생의 위대한 드라마  차윤정 지음
'나무가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한 나무의 죽음의 과정 속에 어떠한 생물작용이 일어나는지, 다른 생명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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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 알라딘 ttb 타고 왔습니다. 전 같은 저자가 쓴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었어요. 그 책도 좋았는데 이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2007.08.19 09:5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아, 전 '신갈나무 투쟁기'는 안읽었는데. 그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야겠군요. 감사합니다. ^^ 2007.08.19 20:5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ufosun.com UFO 아...나무에도...그런 일생이..그것도 우리나라 학자의 시각으로..
    다독가는 아니지만..우리 출판계도 미시적인 접근의 서적이 요근래 많이 나와 기분이 좋네..
    좋은 일만 있기를 ..몸과 마음에..그리고 주변에...
    2007.08.19 09:5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그러게 마랴. 그대도 건강하시길~ 2007.08.19 20:55 신고
  • 프로필사진 사복 이 책을 읽고 나면... 정말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 달라질 것 같아요... 나무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이 주고 받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구요.... 이만큼만 이야기 들어도, 가슴 속 나무 어딘가에 새잎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말이죠.... ^^; 2007.08.19 15:1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네. 그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죠. 사복님도 좋아하실 듯.^^ 2007.08.19 20:58 신고
  • 프로필사진 광풍바루 신갈나무 투쟁기의 저자 분이 새로 책을 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전 책과 마찬가지로 차분한 글솜씨를 펼치는가 보군요. 전공이 임산학(林産學)이라 그런지 이 분 책이 자꾸 눈에 보이는군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과 비슷할 정도로 쉽게 글 쓰시는 산림학자가 없는 듯도 하고요. 2007.08.19 16:5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네. 글 참 차분하게 잘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색하는 듯한 분위기가 책 전체에 걸쳐 균질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필자라고 생각합니다. 2007.08.19 20:59 신고
  • 프로필사진 둥지 가끔 들리는 객입니다. 왜 제가 이 시각에 하필 자료를 찾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뭏튼 블로그를 읽다가 이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저자가 차윤정씨라니. 또 그의 저서와 관련된 글을 마주쳐야하다니...

    4대강사업본부에 홍보역활로 취직을 하신 차윤정씨가 4대강사업을 정당화하는 홍보성 기고문을 보노라면 참 이유는 분명하지만 맥없이 황망해지기도 합니다.

    신갈나무투쟁기에서도 또는 님의 말씀대로 이책에서도 저자의 글솜씨가 도드라지는데 사실을 토대로 쓰는 글이라 할지라도 글은 작가의 인간적 진실성과는 무관하며 글은 그저 꾸며진 기능 또는 수단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하게 합니다.

    차씨의 글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비록 지식을 전달하는 글이라 할지라도 글은 영혼이 쓰는게 아니라, 잘만들어진 기계나 잘다듬어진 기능으로 쓰는 것일뿐 그의 영혼이 투영되는게 아니라는... 아주 실망스럽고 절망스런 충격이었기 때문이죠.

    생태학자인 그의 저서와 훗날 그가 취직한 뒤 정부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는 글을 비교해보면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으니, 그의 어떤 변명이 그의 저서와 또한 매치되는바 없으니, 안타까울뿐입니다. 오래된 글이긴 하지만 자료찾다, 님의 글이 있어서 분노...오바하여 글 남깁니다.
    2012.06.28 11:2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저도 그 뉴스 듣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글과 사람이 일치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씁쓸하게 확인하는 것으로,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마음을 달랠 뿐입니다.
    2012.06.29 23: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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