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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크레타로 데려가 주시겠소?”(조르바)

“왜요?”(배즐)

“그놈의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거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됩니까?”(조르바)

-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말인 어제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에서 상영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러갔습니다. 꼭 보고 싶은 옛날영화이지만 국내에 DVD도 출시되지 않아 안타까웠던 참에, 이게 웬 떡이랍니까. 게다가 무료 상영! 공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판에 이걸 놓칠 리가 없죠~.

막상 가보니 ‘그리스 걸작 영화제’라는 행사 명칭에 걸맞지 않게 작은 세미나실 같은 곳에서 앞사람들 머리 사이로 몸을 기울이고 보느라 허리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


원작이 있는 영화는 대개 원작보다 못하거나 낫거나 이지만 이 영화와 책은 서로를 잘 받쳐주는 드문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실존인물이었다던 조르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저는 앤서니 퀸 말고 조르바를 연기할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열린책들에서 2000년에 새로 출간된 책 ‘그리스인 조르바’의 표지에도 앤서니 퀸이 연기한 조르바가 실렸죠.


같은 대상을 반복해 보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나 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책 제목이 ‘희랍인 조르바’였던 듯…), 그 땐 제 눈에 조르바가 제멋대로인 마초의 표본으로밖에 안보였어요. 뭐 이런 재수없는 남자가 다 있나…. 조금 읽다 말고 책을 휙 던져버렸지요.


두 번째 만난 건 서른이 넘었을 때쯤입니다. 조르바의 자유분방함과 그 원시적 배짱에, 작중 화자처럼 저도 놀랐습니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니요.

20대의 저를 지배했던 말은 “자네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네”라고 말하던, 프랑스 소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에 나오는 충고였습니다.
들뜬 대학 신입생에게 던져진 이 충고는 개인 이전에 전체를 보게 했지만, 그만큼 개인에겐 억압적인 명령이기도 했지요.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선언하고, 체중을 실어 온 몸으로 삶을 음미하는 조르바를 다시 만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니?’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 시작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게 30대 초반이었으니…. 한참 덜 떨어진 거죠. ^^;


나이가 더 들어 이번에 영화를 볼 땐,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주 단순화해 말한다면 크레타 섬에 광산을 개발하러 떠난 두 남자의 실패담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가진 돈을 다 털어 조르바가 산에서 목재를 아래로 굴리는 장비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대재앙이었지요. 이 재난은 책에서보다 영화에서 가속도를 타고 내려와 행사장을 엉망진창을 만드는 통나무로 실감나게 묘사되더군요.

그러나 주인공이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건, 이처럼 모든 것이 어긋나고 끝나버린 순간이었습니다. 방에서 혼자 어색하게 스탭을 밟아볼지언정 한번도 춤을 춰보지 못했던 그는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참패했지만 그로 인해 영혼이 부서지지 않았으니, 그는 스스로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춥니다.
영화는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나지만. 책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집에 돌아와 다시 소설을 뒤적이다 보니, 아래와 같은 대목도 눈에 띄는 군요.

나는 어느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주었다. 열심히 데워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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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freesearch.pe.kr 고감자 저두 이 소설 정말 재밋게 봤는데...

    영화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보셨다니 내심 부럽네요.

    저두 언젠가 한번 봐야 겠습니다.
    2007.05.20 23:22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소설 재미있게 보셨으면 영화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영화제'라지만 DVD를 틀어주더군요. 그것두 영어자막만 있는....ㅠ.ㅠ 2007.05.20 23:4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moonstar.tistory.com 광풍바루 살짝 우울한 뉴스에 침울한 월요일 오후를 보내는 중인데, 마지막 문장에서 힘을 얻습니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운 내서 다시 전진할 의욕이 샘솟네요.
    정말 글을 잘 쓰십니다. 부러워요~
    2007.05.21 17:5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엇~ 인용하신 마지막 문장은 제가 쓴 것이 아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책에 쓴 걸 발췌한 대목입니다. ^^; 어쨌거나 힘을 얻으셨다니 저도 좋네요~ ^^ 2007.05.21 22:50 신고
  • 프로필사진 사복 영화가 있다는 말은 들었더랬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책이 재밌었던지라, 영화를 구해서 보기 좀 무섭기도 하더라구요;; 근데, 정말, 앤서니 퀸이 아니라면... 누가, 조르바를 연기할 수 있을까요;; 2007.05.22 17:5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그러게요. 앤서니 퀸은 정말 '본 투 비 조르바'이더군요.^^ 2007.05.22 17:5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dangunee.com 당그니 뭔가 저랑 상황이 비슷한거 같은 ㅜ.ㅜ....느낌입니당 2007.05.25 00:22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흠....누구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헷갈리오나, 부디 조르바와 비슷한 마음 상황이시길! ^^ 2007.05.25 23:40 신고
  • 프로필사진 회색기사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하신 문단은 저도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입니다.. 저도 거의 30이 되서야 처음 이책을 읽었는데요. 그당시 저의 조급함에 스스로 실망을 금치 못하고있었던 떄라 더 그랬었던 것 같네요 2007.09.22 18:4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그러셨군요. 인상깊었던 대목이 비슷하다니 반갑습니다 ^^ 2007.10.07 23:09 신고
  • 프로필사진 알마 20살 초반때 처음 접했던 책입니다.. 워낙에 감명깊게 읽어서 영화를 보러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겨우 뒤져서 봤던기억이,.,그러나 한글 자막이 없었고 열람시간이 다되어 중간에 나왔던 씁쓸한 기억이 납니다. 나이30인 지금에야 제대로된 자막에 깨끗한 화질로 감상했습니다. 2008.02.23 01:49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산나 ㅎㅎㅎ 한 10년쯤 뒤에 다시 한번 보세요. 감회가 새로우실 겁니다. 2008.02.27 16:41 신고
  • 프로필사진 mlee 얼마전 OBS<전기현의 씨네뮤직> 매주 토요일,10:10방영 프로그램에서 짦은 시간 이 영화와음악을 설명해주기에 가슴 뭉클했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고 자주 찾아뵙겟습니다. 유익한 공간에 감사드립니다. 2012.02.14 21:1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그랬군요 ^^ 근데 신기해요. 오늘 제가 준비한 행사가 있어서 그거 끝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제가 우연히 그리스인 조르바 이야기를 했었는데,
    집에 와서 블로그를 보니 조르바 이야기에 mlee님의 댓글이 있네요.^^
    그냥 신기하고 반가워서요.^^
    2012.02.14 23:49 신고
  • 프로필사진 mlee 좋은것은 3번 마스터하신 경륜과 저도 이제서야 인문학적 깊은 공감을 느끼는 영화와 음악에 오랜만에 시간 갖으며, 갈구하던 길에 조르바 만나고, 더큰 기쁨은 오늘 이 블로그 만나 찬찬히 공부하겠습니다. 좋은 글, 정보의 글 많은 감사드립니다. 서점에서 책 만나뵙지요. 2012.02.15 10:19 신고
  • 프로필사진 비밀댓글입니다 2012.02.19 13:07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ufosun.com UFO 자랑하나^^카잔차키스 무덤을 보러 크레타섬에갔다왔다....
    20년 휴가여행을 섬에서 잘 보내다 왔단다....
    광화문올 때 연락주길
    2012.10.24 20:4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오옷~멋지다!!! 3주 다녀왔음? 좋겠다!!! 2012.10.26 21: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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