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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밑줄긋기

바벨

sanna 2007.03.04 01:24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 -

이름도 낯선 이 철학자의 말을 요즘 통렬하게 절감한다.
항상 일이 벌어져버린 후에야, 누군가가 떠나버린 후에야 깨닫게 된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전하지도 못했는데....
그러나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상대에게 가닿지 못했던 내 마음은, 입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저 혼자 떠돈다.


영화 '바벨'을 보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떠들다 끝내 탑이 무너져 버렸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처럼, 영화 속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서너개의 이야기 마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가 상황의 핵심에 놓여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모로코의 낯선 땅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미국인 여행객, 사소한 태도 때문에 불법 체류자로 몰려 난데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막을 헤매야 했던 멕시코 여인,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잔뜩 독기를 품은 청각장애인인 일본 소녀....
이 영화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언어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경찰은 상대의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로 말하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조차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절박한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앰뷸런스도 보내지 않고 미적댄다.

영화를 보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미어졌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뭔가를 시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는 이런 관계에서 도대체 소통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무구한 관계에 대한 희망,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한 걸까.
다행히도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자그마한 희망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난데없는 총격으로 위기에 처한 미국인 부부는 그전에 이미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세상에 대해 날을 세우던 일본 소녀는 낯선 형사를 붙들고 오열한 뒤 아버지와도 화해하려는 작은 몸짓을 보인다.

내가 보기에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상황들의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바닥을 쳤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너무나 절박할때, 더 이상 계산할 무엇, 패를 돌려볼 카드가 내 손에 남아있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서는 살아가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남의 말을 곡해하지 않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관계의 상실을 후회하고 있는 나는 아직 절박하지 않아서, 손해보지 않으려고 먼저 이해득실부터 따져보는 장삿꾼같은 속셈 때문에, 사람을,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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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aggie.tistory.com aggie 저도 얼마전에 '바벨'을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느낀 뭔가 모를 허전함과 미어지는 마음이...어떤 것이었는지 님의 글을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 2007.03.04 11:5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저랑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다니 반갑습니다. ^^ 2007.03.04 19:38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px.tistory.com 민재 바닥을 쳤을때 심한 좌절만 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기회의 시기도 없는듯 합니다.
    정말 밑줄 그을 가치가 있어 보이는 영화네요. 바로 어제 "라디오 스타"를 봐서.. 텀을 둘려고 했는데.. 바로 좋은 영화가 대기하네요. ^^
    2007.03.04 17:0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라디오 스타'도 참 좋죠? 그 영화 리뷰도 블로그에 쓰려고 했는데 게을러서 끝내 못하고 말았다는...ㅠ.ㅠ 2007.03.04 19:3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gogunhwa.tistory.com 고군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2007.03.05 02:06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이렇게 늦은 (이른?) 시간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깨어있던 터라 거의 실시간 댓글입니다요.^^ 2007.03.05 02:10 신고
  • 프로필사진 광풍바루 이 영화 보고 나오면서 소통에 대해서 제 일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함께 영화를 본 언니는 좋은 영화였다고 하는데, 저는 제 일에 연관해서 회의를 품던 차에 보아서 그런지
    꽤 충격이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어요. 저도 영화 후기를 썼는데, 차마 남에게 보여주기가 어려울 정도로 몇 문장만.. 아으으. 부럽습니다.
    2007.03.05 14:5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네...자기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좋은 영화인 것같아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영화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보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2007.03.06 19:0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panic.egloos.com/ panic 처음엔 어렵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장면들이 스치고,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뭔가가 남아있네요.
    한 번 더 보면, 감동이 훨씬 더 할 것 같아요.
    2007.03.06 12:2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그러게요. 전 영화 보고 나오니까 술 생각이 간절해지더군요.ㅎㅎㅎ 2007.03.06 19:0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crazia.fiaa.net 광이랑 최근에 돌아다니며 사업에 성공한 선배들을 만나서 조언을 듣고 있는데, 그분들이 말하는 성공담에는 공통점들이 한가지씩 있습니다. 성공하기 전에 모두 '나락'을 겪었다는 것이죠, 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다시 정상을 향해 달릴 수 있나 봐요. suanna 나 님의 후기에 정말 공감이 되며 영화도 보고 싶습니다. 2007.03.09 08:1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후기는 너무 주관적이라 영화보시면 생각을 달리 하실 수도 있다는......^^; 2007.03.09 18:38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inuit.co.kr inuit 앗 그림도 저랑 같은걸 고르셨네요. ^^ (이 영화는 보려고 마음먹어서 리뷰를 하나도 안봤습니다.)

    마지막에 그나마 한줄기 희망을 비춰주지 않았으면 매우 안좋은 인상을 가졌을듯한 영화지요. 술생각이 간절하다는 명언에 동감!
    2007.03.17 10:4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이 그림이 젤 '필'이 강해서리~ ^^ 2007.03.17 22: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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