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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북극에서 온 편지

sanna 2006.12.22 17:09

“네가 아빠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사는지 물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널 위해 내 모습과 내가 사는 집을 그려봤단다. 이 그림을 잘 간직해주렴.”


산타 할아버지를 궁금해 하는 세 살배기 아이 존을 위해 아빠가 산타인 척 하면서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 23년간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클로스의 편지가 배달됐답니다. 산타클로스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만큼 존이 자란 뒤엔 마이클 크리스토퍼 프리실라 등 그 아래 동생들이 차례로 수신인이 됐죠.


눈 범벅이 되고 북극 우표가 붙은 편지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간 다음날 아침 집에서 발견되거나 우편배달부가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쓴 답장은 아무도 없을 때 벽난로에서 사라졌고요.


그 오랜 세월 한결같이 편지를 보낸 산타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그는 20세기 최고의 판타지 문학인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쓴 영국 학자 J.R.R 톨킨입니다.

그가 1920년부터 1943년까지 자녀들에게 쓴 이 편지들을 그의 사후에 가족이 엮어 ‘북극에서 온 편지’ 라는 예쁜 책으로 펴냈습니다.

(위의 그림은 톨킨이 아이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영문판엔 이 그림이 표지에 올라와 있더군요)

아이들에게 쓴 편지와 그림을 모았지만 어린이 책은 아닙니다. 요즘의 영악한 아이들이 보기엔 따분할 지도 모릅니다. 국내 번역본은 어린이가 보기엔 활자도 너무 작습니다.

그보다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 ‘반지의 제왕’을 읽었거나 영화를 본 성인들이 볼만한 어른용 판타지 동화라고 해야 알맞겠네요.


톨킨이 우표와 편지봉투 소인까지 직접 만들어 보낸 정성도 놀랍지만, 일부러 산타 할아버지의 떨리는 필체로 쓴 편지와 상상력이 풍부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절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림 실력도 정말 탁월하더군요.

톨킨 그 자신이 4살 때와 12살 때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수도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편지와 그림들은 더 애틋합니다. 자신은 제대로 받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듬뿍 주려는 듯 환상의 세계를 꾸며 들려주는 아버지의 따뜻한 정성이 갈피마다 스며 있어요.


이런 뒷이야기 말고도 이 책은 그 자체로 멋진 판타지 스토리입니다. 처음에 산타 할아버지의 식구는 북극곰뿐이었다가 점점 늘어나 눈 요정들과 붉은 땅의 신령들 눈사람들 동굴 곰, 북극곰을 방문하러 왔다가 눌러앉은 사촌 박수와 발코투까 등이 등장합니다.

사고뭉치 북극곰의 실수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대한 불꽃놀이가 일어나 북극 전체를 까맣게 만들고 별들을 다 흔들어 뽑아버리고, 달을 네 조각으로 깨뜨려 그 속에 살던 남자가 우리 집 뒤뜰에 떨어지고 마는” 사고가 일어나는가 하면, 사슴들을 훔쳐가는 도깨비를 혼내주기 위해 산타는 황금 트럼펫을 불어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죠.

산타 뿐 아니라 북극곰도 굵고 각진 글씨체로 가끔 편지를 쓰거나 산타의 편지에 낙서를 했는데, “영어 대신 나만의 글자 아크티크를 만들었다”면서 희한한 인사말을 들려주기도 한답니다. 톨킨이 이후 ‘반지의 제왕’에서 직접 만든 엘프, 고블린 종족의 언어도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톨킨이 편지를 쓰던 후반부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휩쓸 무렵이었습니다. 잔인한 세상에서도 아이들이 환상의 힘을 잃지 않도록 톨킨은 계속 도깨비를 물리친 북극곰의 맹활약을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비참해지지 말자”는 격려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언제까지 자라지 않도록 하는 마법의 주문은 톨킨에게 없었던 모양입니다. 톨킨은 아이들이 차례로 14살이 될 때마다 “양말을 올해까지만 걸어두었으면 좋겠구나”하고 부드러운 인사를 전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떠나보냅니다.

1943년 막내딸 프리실라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톨킨이 보낸 마지막 편지는 그 오랜 세월 멋진 판타지의 세계를 운영해온 아버지가 산타의 이름을 빌어 딸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슬프고도 따뜻한 작별 인사입니다.


“이제 “잘 있어”라는 인사를 해야겠다. 하지만 널 잊지 않을 거야. 우린 옛 꼬마친구들과 그들이 보내준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단다. 그들이 자라서 집을 꾸미고 아이들을 낳게 되면, 우린 다시 만날 거라 믿고 있지.…네가 바라던 것들을 찾게 되길 바랄게.”

북극에서 온 편지  존 로날드 로웰 톨킨 글.그림, 김상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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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inuit.co.kr/tt inuit 톨킨의 그림실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말씀처럼 이런 상상력이 자양분이 되어 반지의 제왕을 쓰게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특히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대한 불꽃놀이가 일어나 북극 전체를 까맣게 만들고 별들을 다 흔들어 뽑아버리고, 달을 네 조각으로 깨뜨려 그 속에 살던 남자가 우리 집 뒤뜰에 떨어지고 마는” 류의 서술은 반지의 제왕 내내 이어졌던듯 하군요.

    다른 무엇보다도, 14살에 아이들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그 마음 씀씀이가 세심하기도 하고, 한구석 스산한 애비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그러네요.
    2006.12.22 22:0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책을 보면서 톨킨의 아이들은 참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 무렵이 되면 아이들을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떠나 보내야 하는 애비의 스산한 심정이 절절이 묻어난답니다. 2006.12.23 23:02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dangunee.com 당그니 톨킨이 요즘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만화가가 ^^ 되었을 겁니다. 아닌가 -_- 2006.12.23 20:3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 네~ 그럼요. 환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옮겨놓는다는 것. 아무나 갖는 능력은 아닌 것같아요. 2006.12.23 23:0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unjena.com/ Hee 음..한글판에는 왜 표지를 바꿨을까요..
    그나저나 꼭 한 번 읽어야겠네요..
    반지의제왕조차 책으로 읽기는 힘들었던 터라..
    두려운 마음이 앞서긴 하지만요 ^^;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6.12.23 22:24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이 책은 아주 쉽습니다. 두려움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읽으셔도 되는 책이예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활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아프다는 정도....한글판 책 디자인은 사실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2006.12.23 23:0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ilifelog.net Memory RPG마니아들 사이에서 창시자(?)로 여겨지는 톨킨의 색 다른 모습이군요 ^^ 성탄절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2006.12.25 19:56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아~Memory님, 오래간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제 성탄절은 독감의 기습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는.....쿨럭쿨럭~ ㅠ.ㅜ 2006.12.25 21:5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ohnul.com 미래도둑 지금은 어떠세요?(감기) 옥체를 보존하소서, 마마!!!(술 땜시?) 2006.12.26 18:2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무슨 소리! 술이 먼데요? @.@ 2006.12.28 01:17 신고
  • 프로필사진 susun 톨킨의 진한 부성애에 떠올려지는 한 사람 있습니다.
    물론 쟝르?와 감성이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요,,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를 지낸 네루.
    그는 생애 모두 아홉번 투옥되었는데 그중 여섯번째 투옥기간에
    열세살의 무남독녀인 인디라 간디에게 196통의 편지를 보내어
    주로 세계사 공부를 시켰습니다.

    톨킨과 네루 두사람이 속해있는 시대와 세계는 다르지만
    자식 사랑의 지혜와 열정은 兩岸에서 으뜸이겠죠.
    <북극에서 온 편지> 아직 읽지 못했구요 읽고픈 욕구가 몽실몽실 피어오릅니다.
    susanna 님. 새해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들 맞으세요~!
    * p.s. : 한때 '이런 사람이 아니면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게 하지 하겠다,, ' 는
    용감무쌍하고 단순무식한 생각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답니다. ㅎㅎ
    2006.12.31 11:30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 네루의 편지를 엮은 책이 '세계사 편력' 맞죠? 저도 그 책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susun님도 멋진 한 해 맞이하시기를!!! 2006.12.31 16:19 신고
  • 프로필사진 톨킨매니아 <북극에서 온 편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도 좋은 책이더군요.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는 내용이구요. 추천합니다.
    간만에 겨울이 행복해졌어요.
    2007.01.02 11:3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아~읽으셨군요. 톨킨매니아님이 행복해지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2007.01.02 18:45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leekangbin.blogspot.com coup doeil 멋진 책입니다. 읽지는 못했지만 리뷰만으로도 톨킨의 가슴찡한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가를 어렵풋이 알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2007.01.05 16:01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usanna 네. 저도 책 읽으면서 이렇게 멋진 아버지를 둔 톨킨의 아이들이 참 행복했겠다 싶더군요. 2007.01.06 23: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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