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1 16:40

하늘의 뿌리

살아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중 하나는 내 ‘명예의 전당’에 모셔둔 몇몇 작가들의 전작(全作)을 다 읽는 일이다. 그 중의 한 명이 로맹 가리. 오래 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처음 만났고 자서전적 소설인 『새벽의 약속』에 매혹된 뒤 그의 소설들을 계속 찾아 읽는 중이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공쿠르상을 탄 『하늘의 뿌리』였다.

 

로맹 가리만큼 세상사의 아이러니, 사람의 표변과 이중성, 이념과 믿음의 무가치함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때론 냉소 또는 혐오를 드러내면서도 결국 사람에 대한 대책 없는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작가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려낸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혀 모든 것을 빼앗길지언정, 하다못해 땅바닥에서 뒤로 나자빠져 버둥거리는 풍뎅이를 뒤집어주는 행위라도 하면서, 그 어떤 폭력도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수는 없음을 선포한다. 절망에 맞서 끝끝내 존엄을 지키는 개인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은 『하늘의 뿌리』에서도 역력하게 드러난다.

 

600쪽이 넘지만 소설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2차 대전 때 나치에 맞서 싸우다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프랑스인 모렐은 전쟁 후 아프리카 차드에서 코끼리 구명운동을 벌인다. 상아를 얻으려는 서구인들, 고기를 얻으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한 해 3만 마리씩 도살되는 코끼리를 구하려고 무장투쟁을 펼치는 모렐과 그를 둘러싼 각양각색의 사람들 이야기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왜 하필 코끼리일까. 소설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모렐의 코끼리 구명운동이 자연보호다, 아니다, 사람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퇴행적 행위다, 아니다, 아프리카 독립투쟁을 위장하는 연막에 불과하다 등등 해석이 구구하다. 왜 코끼리인지를 이해하려면 모렐의 강제수용소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수용소에서 모렐과 포로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가상의 여인이 같은 방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행동거지를 가다듬었다. “우리를 지탱해줄 어떤 위엄 있는 규율이 없다면, 허구나 신화에 매달리지 않으면, 되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 것에나 굴복하고 심지어 협력하게 되리라는 생각”때문이다. (‘여인’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과연 프랑스인답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책에서 아침에 반드시 세수를 하는 포로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는 증언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람에겐 지켜야 할 의례, 규율, 상상과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포로들은 가상의 여인을 내보내라는 나치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아 고문을 당한 뒤 다시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코끼리 떼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코끼리를 상상하면서 옹호하려고 했던 것은 “유용한 이익도, 손에 잡히는 효율성도 없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불멸의 필요로 남아 있는 것이 숨어 살만한 여백”이었다.

 

“속도와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겠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코끼리. 이 존재를 어쩌면 인권, 혹은 존엄성으로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끝까지 지켜야 할 기본적 권리, “성가시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경쟁에서 앞서가는 데에 방해가 되고, 그래서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없어져서는 안 될” 개인의 마지막 권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 무엇.

 

『하늘의 뿌리』가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계몽적 소설에 그치고 말았을 터. 그러나 모렐의 싸움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며 때로 맞서고 때로 돕는 사람들의 다양한 세계관과 태도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어쩌면 외통수 같은 모렐의 싸움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모든 좋은 책들은 시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들은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태도, 행로와 마음을 짚어 따라가면서 독자가 현재를 살아가는 문제를 견주어볼 수 있게 만드는데, 『하늘의 뿌리』 역시 그렇다. 예컨대 이상주의자의 씁쓸한 타락, 사명감에 짓눌려 ‘자유’니 ‘정의’니 ‘진보’니 하는 말을 기치로 내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싸움터에 몰아넣는 사람의 사정, 발전이 우선인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우선인가, 그것이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등을 생각하게 만드는 논쟁들. 또 고상한 추구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파헤치는 대목에선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특정 집단의 인간혐오가 떠올랐고, 지독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피하는 사람의 심리를 묘사할 땐 우리 사회에서 지독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하자’는 말을 퍼붓는 세태가 떠올라 쉽게 책장이 넘겨지질 않았다.

 

결국 뚜렷한 승리 같은 것 없이 소설은 끝난다. 그럼 그렇지, 쉽게 말했다가 금방 잊히는 희망, 연대, 이상을 냉소하는 로맹 가리가 주인공에게 쉬운 승리 따위를 안겨줄 리가 없다. 대신 “거추장스럽고 성가셔서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는 존재, 발전에 방해가 되는 존재,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하는 그런 존재”인 코끼리, 다시 말해 인권, 존엄, 우애 같은 것들을 지키려면 어떤 태도를 질기고 집요하게 지녀야 할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아래 인용한 모렐의 주장처럼 말이다.

 

“당신은 고생대 초기에 최초로 물 밑의 진흙에서 나와, 없는 허파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겨우 숨을 쉬면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서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의 파충류 동물을 기억하오? …<중략>… 그놈 역시 미쳤다오. 완전히 머리가 돌았지. 그 때문에 그렇게 애쓴 거지요. 그놈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오. 이걸 잊어선 안 되오. 그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있지도 못할 거요. 그놈은 아마 간이 부었을 거요. 우리도 시도를 해봐야 하오. 그게 진보라는 거요.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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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3:09

김소연의 [경험]

아침에 신문에서 본 시인 김소연의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자주자주 보려고 링크 걸어놓는다. 시행착오일 게 뻔한 인생이라 이 글에서 위로를 얻는 건가....아무튼 적어도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 그리고 시인의 말마따나 비루함과 지루함, 낭패감, 드물게 찾아오는 지극함 등이 골고루 섞인 경험은 열심히 겪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항상 일정 정도의 비루함과 지루함과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한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경험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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