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3 21:35

일상의 낯선 풍경


지난 해 예쁜 비밀 전시회를 했던 제 동생 김현경이 올해 개인전을 합니다.
전북 전주시의 갤러리 공유 (063-272-5056)에서 '일상의 낯선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11일 오픈했구요. 3월31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해 우연히 참여한 그룹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을 눈여겨본 갤러리의 초대로 열리게 됐습니다. 지난 해에도 매일 보는 창밖 풍경에서 예쁜 비밀을 건져내었던 제 동생은 올해에도 그 연장선 상에서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매일 보는 담벼락" "매일 가는 밥집의 작은 화단"에서 그가 찬찬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건져올린 화사한 풍경들입니다.
"102호와 103호 사이"라는 제목을 단 위의 그림은 말 그대로 아파트 102호와 103호 사이의 담벼락에 붙은 자잘한 담쟁이 넝쿨들입니다. 동생이 그리기 전에는 우중충한 콘크리트 담벼락 위에 저 자잘한 식물들이 화사한 벽화를 그리고 있는 줄도 몰랐었네요. 맨 위의 메인포스터도 인쇄물을 스캔한 것이라 좀 흐리게 보이긴 하는데, 지난 가을 집 앞 주차장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꽃잎들을 모티프로 삼은 "주차장" 연작입니다.
 
아래의 그림 "103호 앞 2"는 아파트 앞의 볼품없는 화단에 피었던,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들꽃이구요.

문외한인 저의 주절거림 대신, 아래 '작가의 말'을 붙입니다. 혹시 이 블로그에 들르시는 분들 중 전주나 인근 도시에 사시는 분들이 있다면 한번 놀러가보세요. 갤러리가 전북대학교 앞 번화가에 있지만 작고 소담한 정원, 카페가 함께 있어서 호젓한 느낌을 줍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들은 봄의 햇살과 잘 어울리는 제 동생의 그림도 보고 차 한잔 하는 나들이를 계획해보세요~. ^^

작가의 말

생물학적 개념 중에 ‘역치’라는 말이 있다.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역치가 없다면, 오감이 느낄 수 있는 것마다 모두 반응을 나타낸다면 너무나 피곤해서 생산적인 것에 신경 쓸 수 없는 미개한 인간으로 남거나 세세한데 모두 신경 쓰다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생물학적 본능이 그렇게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상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간혹 사진기를 들이대기만 하면 쓰레기통조차 그림이 되는 타지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 주민들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들만의 환경이 그들의 '역치'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예술가들은, 역치가 낮은 사람들이 아닐까. 남들은 지나치는 일상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감탄하고, 화내고, 의미를 캐는 사람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삶이 힘들지만 그러면서도 더 아름답고 역동적인 '삶'을 가깝게 느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오감이 무척 예민한 편이다. 시각 뿐 아니라 듣기도 잘 듣고, 냄새도 잘 맡는다. 좀 덜 느낄 수 있으면 덜 피곤할 텐데…라고 바랄 때도 많지만, 싫지만은 않다. 주변에 늘 있지만 내가 먼저 발견해 내는 것, 혼자서 느끼게 되는 무언가가 있을 때는 내게만 주어진 어떤 비밀스런 선물 같아서 감히 불평은 못 할 것 같다.

일상이 무미건조할 때, 멀리 떠나는 것도 좋지만, 예술가처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가끔은 사시사철의 변화가, 작게는 매일의 날씨 역시 일조를 하는 것 같다. 늘 보던 나무에서 못 보던 꽃이 피고 지고 하니까. 스스로의 역치를 조금 낮춰서 보면 매일 보던 담벼락도, 매일 가는 밥집 앞의 작은 화단도 너무 화사하고 새로워서 눈물이 찔끔 혹은 미소가 살짝 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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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J 2010/03/14 00:49 address edit & del reply

    축하드립니다. 오늘 미사때, 신부님께서 3월이지만 아직 봄을 "찾아야만" 느낄 수 있다는 얘길 하셨는데, 동생분 그림도 그 "찾는 눈"을 가진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작품들 인 것 같네요. 전주에 사는 친구에게 이 포스트를 전달해주어야겠네요.

    • BlogIcon sanna 2010/03/14 16:18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정말 3월인데도 봄이 사방에 있진 않더군요.

  2. BlogIcon 지아 2010/03/14 06:21 address edit & del reply

    작년에 한국 갔을때 전주에서 공유에 자주 갔었는데... 저의 집이 바로 그 옆이거든요. 거기서 전시를 하는군요. 아 보고 싶다. 저도 역치는 무척 낮은편인 것 같은데 현경씨처럼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없어서 ㅋㅋㅋ 그림 좋네요..

    • BlogIcon sanna 2010/03/14 16:19 address edit & del

      아,너네 집이 거기에 있구나. 길도 새로 뚫리고 나는 이번에 처음 가본 곳. 좋더라.

  3. 동생 2010/03/14 15:09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지십니다...화이팅!(진짜 동생께)

    • BlogIcon sanna 2010/03/14 16:21 address edit & del

      ㅎㅎㅎ 고마우
      내 동생이 예전에 '동생'이라는 댓글을 보고,
      아니, 내가 동생인데 이 분은 누구셔? 한 적이 있다는 ^^

  4. 사복 2010/03/14 16:18 address edit & del reply

    지난 번 전시회 때, '다음 전시회는 꼭 끝나기 전에 알려주세요!'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뿔싸, 전주로군요..;; 어쿠야;;

    가보기에는 너무 멀어서.. '역치가 낮은' 그림들을, 그리고 그만큼 예민하고 예쁘게 와닿는 글을, 대신 보고, 대신 읽고 갑니다...

    산나님 동생분, 전시회 축하드려요.. ^^*

    • BlogIcon sanna 2010/03/14 16:22 address edit & del

      그러게요. 가까운 곳이면 좋았을텐데~
      전시가 아니라도 언제 기회되면 전주에 한번 가보세요.참 예쁜 도시예요.

  5. 2010/03/15 09:52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 BlogIcon sanna 2010/03/15 11:47 address edit & del

      전부 유화. 호수는 모르겠네.꽤 큰 편인데. 네 말 전해줄게. 되게 좋아하겠다. ^^

    • 2010/03/15 19:25 address edit & del

      비밀댓글 입니다

    • BlogIcon sanna 2010/03/15 21:18 address edit & del

      50호란다~ ^^

  6. lebeka58 2010/03/15 08:41 address edit & del reply

    전주를 내 생애 두번째 방문할 기회인가 생각이드네요, 학교때 답사여행으루 딱 한번 가본 곳이거든요, 마침 동생이 전북대 수업이 있는 날 겸해서 찡겨 내려가 그림보구 와인마시면서 역치 좀 낮춰볼까해요.

    • BlogIcon sanna 2010/03/15 11:48 address edit & del

      와~갤러리가 전북대 바로 앞에 있고 바로 옆에 와인바도 있어요.^^

  7. BlogIcon 엘윙 2010/03/15 22:41 address edit & del reply

    들꽃도 클로즈업하면 저렇게 화려한거군요.
    전시회 제목처럼..일상인데 역치를 낮추면 신기하고 낯선 기분입니다.
    미술학원을 두달째 다니고 있는데..연필로 도형그리다가 지쳤지 뭐에요. ㅜ_ㅠ

    • BlogIcon sanna 2010/03/16 00:47 address edit & del

      오~그래도 두달쨰 다니신다니 조만간 엘윙님의 그림도 볼 수 있겠는걸요 ^^

2010/03/09 01:49

안도 다다오-빛의 교회

일본 오사카 근처 이바라키 시에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빛의 교회를 찾아갈 때였다. 길을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주택가였지만 유명한 건물이니 표지판 같은 건 있을 줄 알았다. 아니면 교회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높은 십자가라도.

웬걸,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 모양인지,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안도 다다오”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따라오라며 길을 보여주었다. 가까이에서 봐도 교회라는 걸 알 수 있는 표지판은 없었다. 노출 콘트리트 담벼락에 그저 ‘일요일은 교회에’라고 적힌 크지 않은 표어가 붙어있을 뿐이다.


육중한 미닫이문을 열고 교회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천장에 등도 없고 어둑한 공간을 비추는 유일한 빛은 정면 벽에 뚫린 십자형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십자가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빛의 십자가는 크고 압도적이었다. 노출 콘크리트 벽에 가로세로로 기다랗게 교차하는 창을 뚫어놓았을 뿐이지만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십자가는 다른 교회나 성당의 대형 십자가보다 더 위엄 있고 경건했다. 

예배당 안엔 난방 시설도 따로 없이 석유난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안도 다다오가 빛의 십자가를 착안하게 된 계기는 극도로 부족한 예산이었다고 한다. 교회 신자들이 모아 준 건축비가 "너무나 안쓰러운 수준"이었던 탓에 단순한 박스형 공간으로 최대한 종교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1년을 고심해 내놓은 설계였다. 

십자가 창을 통한 안과 밖의 뚫림이 주는 느낌은 묘했다. 빛의 십자가로 어둑한 공간을 그 어느 곳보다 종교적 느낌이 강한 수도원의 분위기로 만들어 내면서도, 동시에 그 앞에 무릎꿇은 사람에게 '구원은 저 밖에 있나니, 밖으로 나아가라'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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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로뿌호프 2010/03/09 11:21 address edit & del reply

    안도 타다오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아는 사람 같아요. 조금 감동적이었습니다. ^^;

    • BlogIcon sanna 2010/03/09 23:42 address edit & del

      이전에 종교건물건축을 해본 적이 있지만 이 교회처럼 신자들의 공동체적 열망이 강한
      종교건물을 건축해보는 것이 자기 꿈이었다고 하더군요.
      열악한 환경과 천재의 꿈이 만나 작품을 이룬 셈이죠.

  2. BlogIcon 지저깨비 2010/03/09 11:47 address edit & del reply

    외부 회의가면서 글과 교회 사진을 보고서 감동받아서, 회의끝나고 같이 회의하던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였답니다. 정말 멋있는 교회같습니다.
    저녁에는 어떻게 예배를 보냐는 질문도 나오더군요. ^^

    • BlogIcon sanna 2010/03/09 23:43 address edit & del

      저도 그게 궁금했는데 벽에 작은 등이 달려있는 게 사진에서 보이실겁니다.몇개 안되지만..
      그렇게 어둑하게 밝혀놓고 달빛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는 맛도 괜찮겠지요.^^

  3. lebeka58 2010/03/09 12:40 address edit & del reply

    부족한 예산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라니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생각케하네요.맞아요, 풍요로움이 항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건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많이 보아왔어요.

    • BlogIcon sanna 2010/03/09 23:49 address edit & del

      풍요로워 부족한 게 없으면 창작의 의지도 줄어들 수 있을 듯해요

  4. Playing 2010/03/09 13:04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주위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제 자신이 조금 부끄..;;
    매일 떠오르는 빛만으로도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운 지 알 수 있는 거 같습니다다
    한 줌의 흙이나 빛에도 희망이 있는 거 같아요 ^^

    • BlogIcon sanna 2010/03/09 23:46 address edit & del

      되레 playing님 댓글읽고 저도 생각하게 되네요.
      빛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뭘 더 바래! 하고요 ^^;

  5. BlogIcon 엘윙 2010/03/09 21:49 address edit & del reply

    독특하군요. 밖에서 빛이 들어오는 것이 구원의 손길같이 보여요. (구원이 필요한 늙은 양입니다. -_ㅜ)
    근데 비가 오거나 바람불면 춥겠는데요. 크크.

    • BlogIcon sanna 2010/03/09 23:54 address edit & del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책에 보니까,
      저 단순한 건축물도 짓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그럼 지붕 얹지 말고 열린 하늘로 놔두자 그랬대요.
      비가 오면 우산받고 예배보고 그러다가 돈 생기면 나중에 지붕얹으면 되는 거 아니냐면서요.^^
      사진의 장의자들도 공사장 비계로 쓰이는 참나무 판자로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꽃다운 엘윙님께서 늙은양이라시면....저는 뭐란 말입니까....털썩....ㅠ.ㅠ)

  6. 마음산 2010/03/10 11:18 address edit & del reply

    미식여행이라시더니 ㅋ 안도 다다오까지...^^
    산나 님은 달라도 달라...음...달라!

    • BlogIcon sanna 2010/03/10 12:07 address edit & del

      뭘 달라굽쇼? ^^

  7. 2010/03/10 14:0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 BlogIcon sanna 2010/03/10 19:26 address edit & del

      한때는 자기밑에서 배우는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단 야그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음 ^^
      권투선수 출신한테 맞으면...거의 듁음일 듯...

  8. 사복 2010/03/14 16:19 address edit & del reply

    음.. 진짜.. 빛이... 빛이... 참 감동적이네요...

    • BlogIcon sanna 2010/03/14 16:25 address edit & del

      다른 사진을 보니 안밖의 명암대조가 강한 날에는 저 빛이 바닥에도 십자가를 만들더군요.

  9. 2010/03/15 12:2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