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7 02:24

피해자의 수치심

(폭력적 외상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의심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무력감, 신체적 안녕의 침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반응이다...<중략>...외상 사건은 주도성에 훼방을 놓고, 개인의 능력을 제압한다....외상이 끝난 뒤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죄책감과 열등감은 실제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 (생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유사한 문제는 강간 생존자들의 치료에서도 표면화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온당한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

'트라우마'(주디스 허먼 지음)를 읽기 시작한 것은 최근 우연찮게 어떤 폭력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난 직후였다. 사건의 조사와 처벌을 요구하고 결론이 나기 전까지, 스스로 위험하다 느낄 정도로 깊어지던 수치심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피해자가 분노뿐 아니라 수치심으로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느꼈'

비유하자면,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성적으로는 그날 입은 짧은 치마가 성폭력의 이유도, 면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둔감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었냐'는 폭력적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피해자는 그런 2차 가해와 싸우면서도 '왜 하필 내가 그날 짧은 치마를 입었을까'하는 수치심에 휩싸이는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랄까내가 겪은 일은 이처럼 개인에게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던 종류의 폭력이었고, 피해자가 겪는 모욕감과 수치심은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나간 일은 덮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도 그런 수치스러운 감정을 후벼 파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자기검열이 강한 성향 때문에 이런 느낌들을 증폭해서 겪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수치심은 외상 사건을 겪는 피해자들이 비켜가기 어려운 감정이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찾으려고 할 때,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가해자가 은폐, 침묵을 시도하다가 안 되어 피해자를 깎아 내리기 시작할 때, 외상 사건이 발생했음을 기꺼이 인정해주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선입견없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수치심은 피해자가 빠지기 쉬운 늪 같은 감정이다.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괴로웠지만, 폭력사건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도 알게 됐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공감과 노력 덕택에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한 '조치'가 표면적으로라도 이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닌데, 매일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수치스러운 감정이 그 소식을 들은 뒤 싹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무력감은 그와 별개로 여전하지만......당사자들이 소속된 공동체가 사건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때 비로소 피해자의 트라우마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부분적이나마 겪어보았다.  

사회적으로 크나큰 비극적 사건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폭력 사건은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다. 이 사소한 사건을 통해 겪은 감정의 파고가 이럴진대, 대형 재난과 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얼마나 파괴적일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느낌을 재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동체의 두 가지 반응으로 인정과 배상을 꼽는다. 그러나 인정은커녕 매일같이 드러나는 가해자와 권력자들의 뻔뻔한 놀음과 거짓말. 하루하루 더 세상은 무참해져만 간다.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올라올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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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07 11:1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6.11.13 22:04

R.I.P 레너드 코헨

정신없는 와중이지만 기록해두고 싶다. 10일 레너드 코헨이 세상을 떴다. 향년 82세.

 

14년 전, 코헨의 노래를 거의 매일 듣던 시기가 있었다.
이혼 직전 무렵. 회복해보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던 관계의 위기를 피해 밤봇짐 싸 달아나는 사람 마냥 우연한 미국 연수 기회를 덜커덕 붙잡아 LA에 갔더랬다. 얼떨결에 1년짜리 MBA 과정을 다니게 되었는데 수업이 그렇게 빡빡한 줄 모르고 갔다가 거의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사는 생활을 해야 했던 시간.

 

그래도 어쨌거나 LA 아닌가. 10분이면 해변에 갈 수 있고 사시사철 화사한 곳. 그럭저럭 즐겁게 지냈지만...우울한 날들이 더 많았다. (당시엔 그 뒤에 더 많은 나쁜 일들이 생길 줄 몰랐던 때라)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고, 비뚤어진 심사에 심지어 LA의 화창한 날씨도 곧잘 거슬렸다.내 인생은 이리 망가져가는데 세상은 나랑 상관없이 저 화창함과 함께 매일 웃고 있는 듯한 기분. 그 뒤로 나는 힘들어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나도 같이 힘들기 때문에 ‘힘 내자’라고 말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힘 내’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 짜내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힘 내’라는 말은 얼마나 무성의한가. 나야 기분이 어떻든 말든 저 혼자 웃고 있던 LA의 태양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지만) 세상 모든 반듯하고 따뜻하고 살가운 것들에게서 외면당한 듯한 기분에 휩싸여 있던 내게 당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게 코헨의 노래였다. 친구가 연수가던 나에게 선물해준 코헨의 CD를 듣고 또 듣다가 울며 잠든 날이 부지기수... 낮게 읊조리는 그의 음울한 노래들이 마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버텨주고 같이 울어주는 친구 같았달까.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그 감정들은 어찌 해결되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해결’이 안되어 그냥 끊고, 묻고, 잊기로 체념했던 듯도 하다. 기억나는 것은 그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bird on the wire’에서 코헨이 노래하듯, 나도 내 식대로 애썼다는 것 뿐. 자유로워지려고 (I have tried in my way to be free).

 

R.I.P 레너드 코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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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inuit.co.kr inuit 2016.11.13 23:5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산나님 글은 여전히 매력적이네요. 절제되었는데 읽는 사람이 울음이 터질듯한 감성. ^^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sanna 2016.11.14 00:22 신고 address edit & del

      제가 아니라 읽는 분의 감성이 충만한 것이죠~^^; 오랜 블로그 이웃을 페이스북 말고 여기서 만나니 좋네요 ^^